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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밀)비밀 문서들의 공개로 이젠 드러나는 6.25비극역사.05편. 2
이름:  김경찬


등록일: 2020-01-23 18:17
조회수: 264 / 추천수: 0




04편에 이어서~~

 

 

 

 

미국은 1945년 12월 16일부터 26일까지 개최된 모스크바 三相會議에서 남북한을 통일하기 위하여 미···소 4개국에 의한 신탁통치안을 제의하였다. 이에 대하여 소련 몰로토프(Molotov)외상은 미·소 양국에 의한 신탁통치안을 제시하고 미국측은 거의 수정없이 소련안을 수락하였다.

 

소련의 신탁통치안은 두 점령지역의 독자적인 존속을 허용하고 있다. 두 점령지역의 폐지는 한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이후에야 가능했다. 소련안은 임시정부를 구성하는데 있어 좌익성향의 정당·단체를 충분히 참가시킬 것을 내포하고 있어 소련의 국익이 미국보다 우월하게 보장될 것을 예견하고 있다.

 

 

몰로토프안은 미국이 원하고 있던 신탁통치 실시를 받아들이는 듯한 태도를 취하면서도 결국은 소련이 독자적으로 북한통치를 계속하고 신탁통치의 실제적인 시행을 막을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놓았다.

 

실제로 소련은 1946년 3월 20일 서울에서 개최된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에서 쉬티코프(Terentii Fomich Shtykov)대표의 연설을 통하여 “소련은 한국(한반도)이 진실한 민주주의적 독립국가가 되기를 바라며, 소련과 우호적인 국가가 되기를 희망한다.

 

그리하여 한국이 향후 소련을 공격할 기지가 되지 않기를 요망한다”라고 천명하고 미·소공동위원회 회의 기간 중 시종일관 소련의 신탁통치안인 모스크바협정을 반대한 민주주의 인사들의 임시정부 참여 배제를 주장하였다.

 

스탈린은 제정 러시아의 짜르처럼 2차대전후 만주와 한반도 전체를 소련의 안보를 위한 완충지대(Buffer Zone)로 간주하고 세력균형자로서의 위치를 유지하려 하였으나 2차대전후 미·소관계가 악화되어 가자 한반도가 소련 공격기지가 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현재 점령하고 있는 지역인 북한지역에서 친소정권을 수립하는 것이 현실적이라고 판단을 하였다.

 

소련측 입장에서 볼 때 친소위성국가를 북한지역에만 수립하는 것은

 

(1) 2차대전 종료 後 내부 검토를 한 바 있는 한반도 전체 지배에는 이르지 못하지만 1896년 로바노프 – 山懸(Lobanov – Yamagata) 협정으로 39도선을 경계로 하여 한반도를 일본과 분할한 것에 비하여는 유리하고

 

(2) 한반도가 극동에서의 소련 국가이익의 부차적 목표임에 비추어 소련이 세계 최강의 유일 핵보유국인 미국과 대결을 하지 않고 극동에서의 소련 국가이익의 핵심인 만주지역을 보호할 수 있는 최소한의 완충지대를 확보할 수 있고

 

(3)국경을 맞대는 한반도 북반부가 對蘇 攻擊基地가 되는 것을 방지할 수 있고

 

(4)소련 점령군이 북한내에 있는 일본 군수ž중공업 시설을 대일 전쟁 참전대가로 몰수할 수 있다는 점에서 선택할 수 있는 차선의 대안이 될 수 있었다.

 

 

1945년 가을 개최된 런던 외상회의가 일본 및 동구 관리문제에 대한 미국과의 의견대립으로 교착상태에 빠지게 되자 소련은 중국 국민당 정부와의 조약을 위배하면서 중국 공산당과의 연계를 강화, 군사지원을 하기 시작하고 한반도 분단을 고착, 북한 지역에 대한 공산화체제 구축을 추진하였다.

 

스탈린은 소련군사령부 소속의 연락장교단을 서울에서 철수시켰다. 9월 9일 서울에 진주한 하지(John R. Hodge)중장이 남북한 지역간 정책조정을 위하여 상호 연락장교단 파견을 소련군 치스차코프(Ivan M. Chistiakov)대장에게 제의한 바에 따라 소련측은 연락장교단을 9월 25일 서울에 파견하고 미국측은 9월 30일 평양에 파견하였다.

 

 

그러나 치스차코프대장은 10월 11일자 서한에서 “고위레벨에서의 정치·경제적 문제가 해결되기 전에는 연락사무소가 필요없다”고 하면서 연락장교단을 철수시켰다.이후 미·소 양측사령부간 몇 차례 접촉이 있기는 하였으나 소련측은 미국측 인원들이 38도선 이북지역에 들어오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태도를 명확히 하였다. 심지어 소련측은 미군차량이 옹진반도와 왕래하기 위하여 일 주일에 세번 소련점령구역을 통과하는 것을 일 주일에 단 한번으로 줄여버렸다.

 

스탈린은 1945년 10월 들어 북한 주둔 소련군사령부로 하여금 한반도 분단 고착화를 위한 조치를 취하게 하는 일방 한반도에서 스탈린의 명령에 충실한 지도자를 찾아내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33세의 김일성을 북한지도자로 지명하였다.

 

스탈린이 김일성을 지도자로 지명했다는 것은 김일성이 1945년 10월 10-13일 극비리에 개최되었던 조선공산당 서북5도책임자 및 열성자 대회에 참석, “새 조선 건설과 민족통일 전략에 대하여” 題下 강령적 연설을 한 사실에 비추어 알 수 있다.

 

이어 소련은 1945년 10월14일 김일성장군 환영 평양시 민중대회를 개최하여 그를 대중 앞에 데뷰시키고 1945년 12월 17-18일 평양에서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제3차 확대 집행위원회를 개최, 당 책임비서로 선출한 후 북조선분국이란 이름 대신 북조선공산당이란 이름으로 개명하였다.

 

스탈린은 서울의 조선공산당 하부조직으로서의 북조선분국이 아닌 북조선공산당으로 개칭하여 김일성 중심의 공산당으로 새 출발시켰다. 소련 군정당국은 김일성이 당의 지도권을 장악케 한 후 1946년 2월 9일 극비리에 북조선 중앙주권기관으로서의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조직, 그를 위원장에 선출하였다.

 

1940년대에 스탈린의 후계자로 여겨져 왔던 쥐타노프(Zhdanov) 레닌그라드 당 위원회 제 1서기의 충직한 부하로서 본격적으로 정치활동을 시작하여 1945년 4월 이래 연해주 군관구 군사평의회 위원, 1948년- 1951년 북한주재 소련 특명전권대사를 역임하면서 소련의 한반도정책을 입안하고 실천에 옮기는 과정에 주도적 역할을 한 쉬티코프의 「일기」를 검토해보면, 소련 군정이 모든 정책결정의 주도자 및 집행자로 등장하여 북한을 지도하며 계획을 관철시켜 나가는 정치 메커니즘을 잘 보여준다.

 

쉬티코프를 정점으로 하는 북한주재 소련군 사령부는 정책결정과정에서 주도적이면서도 최종적인 권력을 행사하였다. 2차대전 종료 후 북한의 정치드라마는 쉬티코프의 책상에서 기획되어 연해주 군관구와 북한주재 소련군 사령부 지도자들과의 회의에서 확립되면 모스크바의 재가를 얻은 후 북한지도부를 독려하여 기획자의 의도에 충실한 북한인 출연자를 선발하고 기획자의 최종적 결재를 맡아 진행되는 것이었다.

 

북한은 1948년 2월 조선인민군 창설, 4월 29일 북조선인민회의 특별회의에서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 초안 승인, 8월25일 최고인민회의 선거, 9월 8일 헌법 채택, 9월 9일 공화국 정부수립 선포와 같은 順으로 정치 드라마를 진행하게 되는데 이러한 모든 일들이 소련의 기획과 적극적 추진에 의한 것이라는 것은 더 이상 상세히 언급할 필요가 없다.

 

따라서 북한의 김일성체제는 대부분의 동구 공산국가들의 지도체제와 같이 스탈린의 의도대로 소련의 치밀한 계획과 지원에 의하여 성립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상..06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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