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동 감독이 연출한 <시>는 알츠하이머를 막 진단받은 한 할머니가 시를 쓰는 이야기이자 무엇이 옳은지에 대한 숭고함을 담고 있는 작품입니다. 그리고 그해 깐느영화제에서 각본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외손자 종욱(이다윗)과 단 둘이 살고 있는 할머니 미자(윤정희)는 요즘 들어 단어들을 깜박깜박합니다. 팔을 다쳐 병원으로 갔는데 결국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게 됩니다. 미자는 미뤄봤던 동네 문화원에서 주최하는 '시' 강의를 듣게 되고 수업이 끝날 때까지 시 한편을 쓰라는 숙제를 받게 됩니다.

한편 영화의 시작이기도 한 소녀의 자살이 동네를 뒤숭숭하게 만드는 데 알고 보니 종욱과 그의 친구들이 그 소녀를 괴롭힘과 동시에 성폭행을 했다는 사실이 알려지게 됩니다. 미자는 자신의 선에서 종욱의 엄마 즉 딸에게 연락하지 않고 이 일을 해결해보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녀가 하는 일로 합의금 500만원을 모으기엔 힘에 벅차던 와중 미자는 자신이 일하는 집의 강노인을 통해 그 돈을 마련해보려고 합니다.

당시 영화 <시>는 영진위에서 지원금을 받기 위해 출품한 작품이었는데 예선 탈락(?)했던 시나리오로 유명했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바로 깐느에서 그것도 각본상을 받았으니 참 아이러니 했던 상황이 아직도 기억이 납니다. 당시는 정치적인 이유가 너무나 분명했기 때문에 예술이 이런 정치적인 힘의 논리에서 제대로 대접받지 못한다는 것에 화가 나기도 했었습니다. 물론 <시>라는 영화의 시나리오가 문학적이라고 평가하는 사람들도 많겠지만 문학적이라는 이유가 과연 제대로 심사를 받지 못하게 되는 이유가 되어선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암튼 영화로 돌아와서 당시 실제로도 병세가 있었던 윤정희 배우를 캐스팅한 이창동 감독은 윤정희 배우의 본명인 손미자에서 미자라는 이름을 그대로 가져와 캐릭터를 만들었습니다. 시상을 찾아 떠나는 그녀의 모습에서 간절히 그 시상을 떠올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그녀의 모습에서 그리고 잔인하지만 자살한 소녀의 마지막 자취를 따라가면서 그녀는 시상을 만나게 되고 결국 시를 써내려가게 됩니다. 그리고 손자 종욱과의 마지막 배드민턴을 친 후 헤어지는 그 장면에서 그녀의 선택이 진정으로 손자를 위함과 동시에 떠나간 소녀에 대한 예우로 보였고 인간이라는 존재는 역시 연민과 함께 숭고함을 지닐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일깨워줍니다.

실제 시인이기도 한 김용택 시인이 '김용태'라는 캐릭터의 이름으로 시 강의를 하는 인물로 등장합니다. 시를 아무도 읽지 않는 시대에서 시에 관심을 가지는 인물이 기억을 잃어가는 캐릭터이라는 것이 참 아이러니함과 동시에 훌륭한 캐릭터 설정이 아닌가 싶습니다. 잊혀져가는 것(시) 그리고 잃어가는 기억이라는 두 가지를 등치시키면서 너무나 많은 것을 느끼게 해준 작품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