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기 후기가 되면서 만주족은 점차 수렵과 약탈에 의존하던 생산체제를 농경체제로 변화시키게 된다. 누르하치는 정복전쟁이 성공을 거두면서 늘어난 인구를 부양하기 위해 농경체제를 구축하여 식량의 자급자족 구조를 구축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전쟁을 통한 약탈만으로 생활물자를 획득하는 것에는 한계가 분명하였고 명의 경제봉쇄로 인해 농경에 능숙하지 못한 만주족 사회는 식량 문제가 커다란 사회 문제로 떠오르고 있었다. 한편 명의 입장에서는 누르하치가 여허(葉赫)를 제외한 전 만주지역을 통합하고 명과 국경을 접함에 따라 전통적인 기미정책(羈靡政策)이 한계에 이르렀기 때문에 여허를 적극적으로 도와 누르하치를 견제하려고 하였다.
누르하치는 만주의 식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많은 수의 농업노동인구를 얻고 이들을 광대한 농토에 묶어두고 강제로 농경에 종사케 함으로써 자급자족체제의 기반을 마련하고자 하였다. 그는 입버릇처럼 “요동을 얻은 다음에야 가히 생활할 수 있다.”고 하였으며 결국 1621년 요동을 점령하였다. 요동 점령은 누르하치가 원했던 농경체제를 실현시켜 줄 영토였다. 기존의 혈족단체 혹은 지역단체가 주를 이루던 원시성을 혈연적 연관성이 없는 한인들을 노예로 삼아 니루제에 편입시킴으로써 변화를 야기시킬 수 있었다.
한인 노예는 농경체제의 확립 뿐만이 아니라 만주 사회에 계급 분화를 가져왔다. 요동 점령을 통해 다수의 한인 포로를 획득한 누르하치는 한인 20인이 1인의 병사를 감당하게 하였으며 1니루 300명 가운데 갑사 100인을 뽑아 백 바야라(bayara) 10인, 홍 바야라 40인, 흑영(黑營) 50인으로 편성하였다. 이들부터 그 상위계급들은 군공에 따라 노예와 가축 및 재화가 상급되기 때문에 갑사 이상의 계급은 만주 사회의 지배계급이라 할 수 있었다.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분화가 현저해지면서 만주족과 한족의 민족적 차별은 심각한 사회문제로 부상하였다. 요동에 이주한 만주인은 한인과 함께 섞여 살면서 한인의 집과 곡식 및 전토를 강제로 빼앗았고, 이렇게 빼앗은 곡식은 만주인들에게 분배되었다. 노예들은 대부분 전쟁에서 포로로 잡은 한인들로서, 버일러부터 일개 병사에게 지급된 상품의 성격을 띠는 비인격적인 존재들이었다. 노예의 대다수는 칸과 여러 버일러 및 공신들에게 집중되고, 장전(莊田, tokso usin)에 배치되어 붙박이로 농경에만 매달리게 되었다. 1장전은 장정 13인과 소 7마리로써 1장(莊)을 이루고 전(田) 100상(晌) 가운데 20상이 공과전이고 나머지를 식료로 하는 것이 일반적인 형태였다. 1621년을 예로 들면, 8인의 호쇼 버일러의 장전은 총 2400장, 장정 수는 31200인에 이르렀다. 이후 만주족이 점령한 요동, 심양, 광녕과 같은 대도회의 노예 숫자를 합하면 그 수의 몇 갑절은 되었을 것으로 추산할 수 있다. 이러한 노예들은 집과 니루에 배속되어 생산 활동을 담당하고, 생산물의 일부와 잉여 노동을 공과로서 국가에 바쳤다.
이처럼 만주 사회는 대다수의 한인 노예들을 최하층에 두고 착취의 대상으로 삼아 이들이 제공하는 노동력과 생산물을 토대로 성립한 권력구조라고 할 수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인 노예의 도망과 저항은 만주족의 사회 근간과 권력구조를 위협하는 중대한 사회 문제였다.
만주족이 요동을 점령한 후에 요동에서는 한인들의 저항이 줄기차게 일어났는데, 이러한 저항들은 모문룡 휘하의 명군과 연관된 일이 적지 않았다. 다시 말해, 한인 저항의 배후로는 평안도 철산 가도에 주둔하고 있던 모문룡이 유력하다고 할 수 있다. 모문룡은 한인의 저항을 부추긴 다음, 1624년과 1625년 두 해에 걸쳐 휘발지(輝發地)로 침입하기도 하고 요주의 남쪽 蕎麥衝에서 官屯에 이르는 지역을 공격하기도 하였다.
만주족은 요동을 점령하고 요동 한인의 노동력을 기반으로 삼아 기존의 호시무역(互市貿易) 경제체제를 탈피하려 하였다. 그럼으로써 단기적으로는 만주족의 통합체제를 유지하고, 장기적으로는 명을 압박하여 안정적인 대명 관계를 수립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요동 진출이 안정적인 대외경제관계를 담보해 주지는 않았다. 모문룡을 배후에 두고 계속되는 한인의 도망과 반란은 만주족의 경제 상황을 계속 악화시켜 나갔다. 만주족은 가까스로 구축한 농경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한인의 이반을 막고 식량과 물자공급체계를 유지해야 했다. | |
|
등록안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