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을 처음보시는 분은 먼저 바로 아래에 있는 18살 소년왕 VS 어른 3명의 이야기를 봐주세요.
두 영웅이 대립할 때에는 보통 극명하게 대조되는 성격으로 묘사되죠. 예를 들면 항우와 유방처럼요.
이번 이야기의 주인공인 카를 12세는 마치 중세 유럽판 항우와도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산을 뽑아서 던지고 기세가 세상을 덮는 항우가 정말 좋지만 현실세계에서는 절대로 환영받지 못하는 독불장군일 뿐이고 유방과 같이 타협하고 정치하며 주변 인물을 끌어모으는 친화형이 좋죠.
그럼 항우... 아니 유럽판 항우인 카를 12세를 볼까요?
카를 12세는 상당히 독특한 성격이었습니다. 그것도 15살짜리 왕이라면 말이죠.
1. 여성을 가까이 하지 않았습니다.
마치 일본 전국시대의 우에스기 겐신처럼 여성을 일체 가까이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북유럽 강대국 스웨덴의 왕위 계승자였기 때문에 정략결혼의 블루칩이었고 6명의 공주와 혼담이 오갔습니다. 유력한 결혼 상대자는 덴마크의 소피아 공주였는데, 덴마크가 전쟁을 일으켰기 때문에 혼담이 깨졌고 그 이후에는 아예 여성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습니다.
평생 할머니, 누나와 여동생이 가까이 한 여성 전부였고 그의 사후에는 누나 울리카 엘레오노라(어머니와 동명이인)가 왕위를 계승했습니다. 만약 그가 정치에 좀 더 관심을 가져서 덴마크와 혈맹을 맺었다면 최소한 러시아 원정 전의 상태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을겁니다.
2. 절대왕권 주의자였습니다.
그 당시 군주라면 모두 신에게서 왕권을 인정받았다는 왕권신수설을 주장했는데, 카를은 정도가 상당히 심했습니다. 15살의 어린나이였기 때문에 섭정 위원회가 구성되었고, 그 때까지만 해도 섭정들의 말에 경청하며 온순한 후계자인 것 처럼 보였습니다. 섭정들끼리 반목이 생기면서 15살의 카를을 성년으로 인정하는 편법으로 왕좌에 오르게 합니다.
즉위식이 결정되는 순간, 불과 15살의 카를은 당돌한 태도를 보이며 절대왕권을 확립합니다. 자신은 태어날 때부터 왕이었기 때문에 즉위식을 거행하지 않을 것이며, 다시 왕관을 받는 예식은 말도 안된다며 거부를 합니다. 그리고 즉위식이 아닌 선왕 추도식으로 변경하고 모든 사람에게 상복을 입힙니다. 자신은 왕관을 머리에 쓰고 말을 탄 채로 교회로 들어섭니다.
그리고는 어떤 조언도 거부합니다. 고령의 대신이나 고문은 몇 시간 동안 기다렸다가 간단한 용건만 말하고 물러나야 했는데, 말이 길어지면 카를 12세는 그만 나가라고 말을 끊었다고 합니다.
3. 정의를 추구했습니다.
그는 선왕의 가르침에 따라 왕은 공정하고 정의로워야 한다는 가치관을 가졌고 평생 지키려고 노력했습니다. 심지어 군사훈련과 사냥에서도 정의를 주장했는데, 어린 나이에 곰사냥(불곰과 같은 큰 곰이 아닌)을 할 때에도 화기를 사용하다가 너무 비겁한 짓이라 여겨 칼과 창만을 사용했고 그것마저도 불공정한 대결이라 여겨서 나무 쇠스랑(농기구)만으로 곰과 대결을 했을 정도입니다.
기병 모의전투에서는 타격전끝에 이성을 잃고 (반칙인) 얼굴을 때려 상대방에게 부상을 입히자 자신의 행동을 부끄러워하며 매일 병문안을 가기도 했습니다.
그가 폴란드의 아우구스트를 반드시 왕좌에서 끌어내리기로 마음을 먹은 동기도 비겁하게 선전포고없이 기습을 해왔기 때문입니다.
4. 고대영웅을 꿈꾸며 단련했습니다.
당시에 정상적인 교육을 받은 후계자라면 알렉산드르 또는 카이사르의 위인전은 기본이었습니다. 카를 12세 역시 자신을 알렉산드르의 화신이라고 여기고 그의 업적을 따르려고 했는데, 다른 군주와 달리 어릴 때부터 원정준비를 했습니다.
예를 들면, 나중에 있을 원정에 대비해 침대에서 자다가 상의를 벗고 찬 마루바닥에서 아무 것도 없이 잠을 잤고, 겨울에는 7일 중 3일은 마구간으로 가서 건초만 덮고 잠들었습니다.
스웨덴군의 원정을 보면 다른 군대는 도저히 불가능한 기동(폭우와 폭설을 뚫고)을 하거나 심지어 겨울 숙영지에 들어가지 않고 야지에서 겨울을 보내는 경우도 있었는데 왕이 진흙 위에서 일개 병사처럼 잠잤기 때문에 그를 따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카를의 솔선수범으로 스웨덴군의 규율은 유럽 어느 군대보다 엄격했습니다.
만약 그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정치인이나 전략가가 있었다면 우리는 나폴레옹보다 카를 12세의 이름이 더 익숙했을텐데, 스웨덴에게는 안타깝게도 그런 인물이 없었고, 카를이 너무 어릴 때에 절대권력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전사에서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80% 승리가 가장 좋은 것이며 120% 승리는 절대로 주의해야 한다고요. 80% 승리는 아쉽지만 반성하고 배우는 계기가 되지만, 120%의 지나친 압승은 자만과 파멸의 길로 들어서는 유혹입니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서 15살 아이가 왕위에 올랐고 상당히 버르장머리가 없다는 반쪽짜리 증권가 정보를 얻은 폴란드를 필두로 덴마크와 러시아가 대군을 일으켜 스웨덴을 갈라 먹으려고 했지만, 그 버르장머리 없는 꼬마가 12살에 숲을 뛰어다니며 늑대와 곰을 잡던 바이킹의 후손이라는 것은 모르고 있었죠.
(뽐뿌의 그림제한때문에 http://www.ppomppu.co.kr/zboard/view.php?id=history&no=1379의 지도를 잘 확인해주세요.)
사냥터에서 폴란드의 침공소식 그리고 뒤이어 들어온 덴마크의 침공소식을 들은 카를은 전혀 당황하지 않고 그렇게 꿈꾸던(?) 원정이 제 발로 들어온 것을 기뻐했습니다. 그렇지만 문제는 훨씬 많은 수의 병력이, 그것도 유럽본토의 전략요충지 3곳으로 진격하고 있다는 것이었죠.
그는 전혀 주저하지 않고 결단을 내립니다. 가장 약한 적부터 상대하기로 합니다.
'리가! 너 혼자 살아남아. 나르바! 너도 혼자 살아남아. 나중에 복수해줄께'라며 해협건너의 덴마크 수도 코펜하겐을 노립니다.
문제는 덴마크-노르웨이 함대가 압도적이었고 스웨덴 해군은 '물놀이 온 농부' 취급을 받던 전력이었기에 막강한 육군을 상륙시킬 방법이 없었죠. 바로 이 육군 말입니다.
스웨덴 육군은 경제력을 바탕으로 최신 무기와 상비군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위의 기병 중 스웨덴산은 사람뿐이고 나머지는 모두 수입명품일 정도입니다. 그것도 프랑스 명품입니다.
그리고 선대의 구스타브 아돌푸스부터 시작해서 뛰어난 지휘관이 연달아 배출되었습니다.
그런데 독일, 폴란드, 러시아군과 비교하면 스웨덴군 만의 뭔가가 존재했습니다. 훨씬 많은 수의 적이 소수의 스웨덴군 앞에서 무너져 내리는 것을 보면 무기와 훈련만으로 갖출 수 없는 뭔가가 있었습니다.
전장에서 죽어야 발할라로 들어갈 수 있다고 믿고 죽으려고 기를 썼던 바이킹 선조처럼, 이들도 '인명은 재천이다. 죽을 때가 되면 다 알아서 죽는다'라는 신조여서 아무리 불리한 상황에도 돌격 일변도였습니다. 카를 12세도 전장 한 복판을 고집했고 아무리 만류를 해도 '인명은 재천이당!'이라는 말로 물리쳤다고 합니다. 결국 그 신념이 몰락을 재촉했지만요.
표트르도 전근대적인 러시아군에게 유럽식 군복을 입히고 유럽인 지휘관을 고용해도 전투만 벌어지면 순식간에 등을 돌리고 달아나니 '차르에게 충성하지 말고 조국 러시아에 충성하라'는 신조를 심어주려고 노력했습니다.
카를은 일전을 치루기로 하고 함대를 구성하는데, 하늘이 도와줍니다. 당시는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이어서 모든 나라, 특히 영국과 네덜란드의 공동왕 빌럼 3세는 유럽전체가 대 프랑스 동맹에 참전하게 만들려고 노심초사하던 때였습니다.
그런데 덴마크와 폴란드가 전쟁을 일으켰고 만약에 독일로 확전되면 대 프랑스 동맹은 반토막이 나기 때문에 어떻게든 조기에 마무리 지어야했죠. 빌럼은 영-네 연합함대 전열선 25척을 스웨덴에 급파를 합니다.
덴마크 입장에서는 갑자기 상황이 반전되었습니다. 영-네-스 연합함대의 전력이 압도적인데다가 영-네와 전쟁하고 싶지 않았죠. 멍청하게 지켜만 보는 덴마크 제독의 눈 앞에서, 스웨덴 육군은 연합함대의 호위를 받으며 코펜하겐으로 들어갑니다. 앞에서 스웨덴 육군에 대해 설명했었죠? 덴마크 육군은 아주 가벼운 상대였습니다.
수도가 공격받는다는 황당한 소식을 들은 원정지의 프리드리히 4세는 혼자서 급히 달려가지만 수도를 구할 수 없게 되자 항복을 합니다.
항복을 받아낸 카를 12세는 선전포고도 없이 덤벼든 무뢰한, 심지어 사촌형이었던 폴란드 아우구스트를 치기 위해 겨울바다에 무리하게 배를 띄웠다가 많은 병력을 잃게 됩니다. 겨우 죽다 살아 났는데, 이번에도 하늘이 도와줍니다.
덴마크가 항복했고 카를이 상륙했다는 소식을 들은 아우구스트는 리가 포위를 풀고 겨울 숙영지로 철수합니다. 리가가 완강하게 버티고 있는데다가 이미 10월이었기 때문에 어차피 겨울 숙영지로 들어가야했죠.
카를은 스웨덴에서 증원된 병력과 리가에서 풀려난 수비군을 합쳐 나르바의 러시아군을 상대하러 220km를 행군합니다.
당시로서는 미친 짓이었습니다. 겨울 눈비를 맞고 굶주려 가며 장거리 기동을 감행하는 것은 누구도 따르지 않고 오히려 반란이 일어나는 것이 일반적이었죠. 그런데 앞에서 설명했듯이 왕이 진흙탕에서 잠자고, 스웨덴인은 과장을 보태서 죽지 못해 안달인 희한한 병사들입니다.
바다 폭풍에 이어 땅 위에서도 유럽최강의 병사들이 죽어갔습니다.
나르바에 도착한 스웨덴군의 상태는 말이 아니었고, 러시아군은 이미 구원군을 상대하기 위해 도랑+목책+참호 3중막에 병력은 4~5배, 대포는 10배 이상을 갖추고 있어서 '쟤네들이 저 몰골로 여기에는 왜 왔을까?'라며 희한하게 쳐다봅니다. 이 군대는 표트르가 어릴 때부터 심혈을 기울여 키운 러시아의 핵심전력이었으니까요.
여기에서 되는 집안과 안되는 집안의 차이가 보입니다. 표트르는 이런 저런 이유로 자리를 비웠고 러시아군 임시사령관 두 크로이(외국인)는 너무 적은 수의 스웨덴군을 보고 본대는 따로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40,000명 중 15,000명의 러시아군에게 참호에서 나가 요격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그런데... '차르도 없는데 뭘! 대충 합시다! 너 외국인 노동자님 즐!'거리며 러시아 장교들이 말을 안들어서, 어쩔 수 없이 완전무장상태의 참호속 대기모드로 들어갑니다. 절호의 기회를 이렇게 날려버립니다.
반면에 카를은 도착하자 마자 다시 한 번 미친 짓을 저지릅니다. 그의 전매특허인 '닥치고 공격!'이 이때부터 시작됩니다.
도저히 상대할 수 없는 대군 그것도 안전한 방어막 안에 들어가 있는 적에게 돌격해들어갑니다. 사실 시간끌어봤자 달리 할 수 있는 작전도 없었으니까 이왕이면 빨리 죽으려고 했겠죠.
스웨덴 병사들도 어차피 얼어죽거나 총맞아 죽거나 다를 바가 없으니 차라리 총맞아 죽겠다는 생각이었을 겁니다. 물론 소년왕이 선두에 섰습니다.
역시 나는 한 놈만 팬다는 단순무식한 전술로 러시아군 중앙을 뚫고 들어갔고 바로 위의 지도처럼 양쪽으로 러시아 참호를 말아올려가며 어리버리한 러시아군을 밀어냈습니다.
'어어어?!' 하는 러시아군은 순식간에 궤멸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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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군은 불가능한 전투에서 그것도 반나절만에 20,000명이 넘는 러시아군을 포로로 잡고 표르트가 가장 아끼던 대포 146문을 노획합니다. 참고로 표트르 대제는 대포 성애자라고 불러도 될 정도로 대포에 큰 애착을 느꼈습니다. 절대군주 차르인데도 포에 큰 관심을 가져 포술 교육을 정식으로 받았고 자신을 포병부대 일선장교로 임명했을 정도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딸랑이(?) 지휘관들이 공성전을 앞두고 일부러 기다렸다가 차르가 첫 포격을 시작할 수 있게 배려를 했습니다.
출타 중에 주력이 궤멸되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들은 표트르는 러시아로 달아나 모든 성당과 수도원의 종을 녹여 대포를 만들고 총동원령을 내려 카를의 침공에 대비하는데, 이번에는 하늘이 카를을 돕지 않았습니다. 겨울 숙영지로 돌아가지 않고 원정준비를 하던 스웨덴군 진영에 전염병이 돌았고 절반의 병력이 죽거나 앓아누으면서 원정은 연기됩니다.
그렇다고 악의 근원인 폴란드와 러시아를 그냥 둘 소년왕이 아니었습니다. 이제 겨우 유럽무대에 데뷰한 셈이니까요. 그는 약한 적부터 빠르게 처리한다는 진리를 따라 폴란드 원정을 시작합니다.
그 이야기는 다음에 기회가 있을 때에 다시 정리하겠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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