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대는 이제 유방이 항우고 뭐고 다 쳐부수고 명실공히 전중국 최강자가 된 시점입니다. 까부는 한신은 일단 이 시점에서는 살아있었지만 제후왕은 빼앗긴 시점이구요. 초한쟁패기의 싸움 중에 장이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보통 친구였다가 원수가 된 진여와 세트로 묶이는데, 유방의 천하통일 후에는 조나라 왕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장이의 아들은 장오라는 인물이었는데, 이 사람의 왕후가 유방의 딸입니다. 장이가 죽고, 당연히 장오가 왕으로 임명되었습니다. bc 200년 무렵, 유방은 평성에서 장안으로 들어가면서, 조나라 변경을 지나갔고, 당연히 장오도 헐레벌떡 나와서 유방을 대접했습니다. 황제를 대접하는 일이니 친히 음식을 올리면서 매우 신경을 썼죠. 하지만 유방은 딱히 악의가 없더라도 본래가 무례한 사람이라, 친절을 베푸는 장오에게 상당히 무례한 태도를 취했습니다. 기록된 그대로 보자면 의자에서 내려와서 발을 쭉 뻗고, 장오에게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장오는 그래도 명색이 조왕입니다.
장오 본인은 별로 신경을 안 썻는데, 장오의 부하 중에 관고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장이 시절부터 활약했던 사람으로, 나이가 60이 넘었는데 이 말은 관고 역시 초한쟁패기의 풍파를 걸친 호걸이었죠. 그는 유방의 이런 태도에 분개해서, "왕을 위해서 유방을 죽이는것이 낫지 않은가." 하고 말을 했습니다.
장오가 당연히 혼비백산해서, "절대로 안된다. 우리가 잘 살고 있는것도 황제 덕이다." 하면서 손가락을 깨물고 피를 흘리면서 말립니다. 이 모습을 본 관고 등은, 거사를 치루면서 만약 성공하면 그 기쁨을 조왕에게 돌리고, 실패하면 절대로 조왕이 피해를 받지 않게 하겠다고 자기들끼리 몰래 맹세를 했습니다.
그리하여 bc 199년, 유방이 또 장안으로 가면서 조나라 변경을 지날 무렵이었습니다. 유방은 백인현(柏人縣)이라는 마을에 머무를 예정이었는데, 관고는 미리 예정을 알고 백인현에 사람을 매복시켜 유방을 암살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역시 천하를 꿀꺽한 사람이라 그런지, 유방은 내심 무언가 불안해져서, 주위 사람에게 여기가 어디냐고 물어보았습니다. 대답을 듣자하니 백인현이라는데, 백인이 핍박의 뜻인 박인(迫人)과 비슷비슷해서 불안하다며 재빨리 떠나, 이 음모는 성공을 못했습니다.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이라, bc 198년. 관고의 일을 알고 있던 사람 중에, 관고에게 앙심을 품은 누군가가 유방에게 이 사실을 고자질 했습니다. 당연히 유방은 주모자들을 모두 잡으려고 했고, 주모자들은 어차피 잡혀가면 살 수 있는 방법도 없고 죽도록 고문당할 것이 뻔하기에, 자결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관고가 말렸습니다.
"우리가 자결하면, 결국 조왕께서 모반에 엮이실 것이다. 우리가 조왕의 무죄를 증명해야 한다."
그리해서 관고는 잡혀들어갔습니다. 관고의 나이가 60이 넘었는데, "주모자를 대라." 면서 몽둥이로 수천대를 얻어맞고 송곳으로 살을 때어내는 지경이라 몸이 완전히 망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절대로 조왕 장오가 관계 되었다는 말을 안하면서 버틴 것입니다. 그 사이에 장오의 부인인 노원공주는 여후에게 사정사정했고, 여후는 유방에게 한번 봐주라고 말을 합니다. 유방은 "장오가 천하를 꿀꺽하면 네 딸(노원공주) 같은 여자가 어디 한 두명이겠느냐." 하면서 성질을 냈지만, 관고가 그렇게 버티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자 상당히 감탄합니다.
그리하여 관고하고 본래 잘 아는 설공이라는 사람을 관고에게 보냈습니다. 관고가 어떻게 말하는지 한번 보자는 식이었습니다.
"내 삼족이 모두 나 때문에 죽을 지경이거늘, 어찌 내가 슬퍼하지 않겠소. 하지만, 그렇다고 육친을 왕하고 바꿀 수야 없지. 실제로 조왕은 반란을 꾸미지 않았고 모두 우리가 꾸민 일이오." 설공이 유방에게 이 말을 전하자, 유방은 관고야말로 진짜 사나이라고 하면서 바로 장오와 관고를 석방했습니다. 관고는 감옥에서 나오더니, 자신은 이제 여한도 없고, 신하로서 모반의 죄를 지었으니 더 살 필요도 없다고 하면서 바로 자결해버렸습니다.
이때를 보면 유방은 장오의 가신들 때문에 확실하게 목숨을 잃어버릴 뻔 했습니다. 반란 음모는 일부러 꾸며낸 거짓도 아니고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하지만 유방은 결국 이들을 용서했습니다. 물론, 장오는 제후왕 자리는 잃어버렸지만 그 후로도 계속 대접을 받았구요. 심지어 암살 음모에 관계되었던 장오의 가신들은 모두 제후왕의 상국 등 높은 자리로 임명을 받았고, 그 후손들은 모두 2천석의 관직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즉, 자기를 죽이려던 사람들을 모두 용서한 수준에서 끝나는게 아니라 아예 포상을 잔뜩 주었다는 말이죠. 바로 이럴때 유방의 리더로서의 면모가 드러납니다.
사실, 유방이 제거한 제후왕 중에, 진짜로 억울한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대부분 자기들도 속에 꿍꿍이를 품고 있다가 결국 당해버렸죠. 정치적인 의도인 하지만 유방과 사이가 안 좋던 옹개도 유방이 보기에 그게 더 낫겠다 싶으니까 오히려 대접을 받았고, 한번 의심했다는 소하는 나중에는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제일공신으로 했으며, 장량이 조언을 하면서 자기 앞에서 젓가락을 부러뜨려도 조언이 옳자 신경도 쓰지 않았고, 노관은 공도 없었는데 의리만으로 제후왕에 임명을 해주었습니다.
다른 마음이 전혀 없었는데 죽은 사람은 팽월 정도 뿐으로, 꿍꿍이 안 부리고 진심으로 충성했던 유방의 고향 친구들 중에서는 도망간 노관을 빼고는 모두 천수를 누리면서 잘 먹고 잘 살았습니다. 유방이 반대를 무찌르고 크게 썻던 진평은 말할것도 없구요.
만약 유방이 정말 눈에 불을 키고 공신이고 뭐고 다 죽이려고 했으면, 이들의 충성심은 이해가 안가는 일입니다. 하지만, 이 사람들은 나중에 세상이 여씨천하가 되고, 자기들도 모두 손마디는 가늘어지고 허리도 제대로 펴기 힘든 노인네들이 다 되어서도, 유씨, 즉 유방에 대한 충성심을 전혀 잊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다시 유씨의 천하를 만들어주게 됩니다.
유방이 순전히 안면몰수의 면모로만 가득찬 사람이었다면, 이는 설명할 수 없는 일입니다. | 
등록안내
글들이 재밌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