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블로 라라인 감독이 연출한 <스펜서>는 97년에 세상을 떠나기 전 다이애나비의 크리스마스 휴가 3일간을 다루고 있는 작품입니다.

때는 이미 영국 왕실에서 마음이 떠난 다이애나(크리스틴 스튜어트)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크리스마스 휴가를 보내기위해 왕실 일가는 교외에 위치한 저택으로 하나둘씩 보입니다. 다이애나는 봉사활동으로 따로 움직이다가 길을 잃어버립니다. 겨우 방향을 잘 잡아오는데 이곳은 다름 아닌 자신의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었습니다. 아직까지 밭에 설치된 허수아비의 옷은 아버지의 옷입니다.

우여곡절 끝에 크리스마스이브에 모인 가족들이지만 다이애나는 여전히 이들과 잘 섞이지 못합니다. 윌리엄과 해리, 두 아들만 그녀를 걱정해줄 뿐이죠. 다이애나가 외도 한다는 소문이 왕실에 떠돌고 있는 와중 남편 찰스 왕세자는 다른 여성에게 선물한 진주 목걸이를 아내 다이애나에게 선물하는 어리석음을 보여줍니다. 다이애나는 만찬 시간에 진주 목걸이를 하고 갈지 말지 고민합니다.

이렇게 지옥 같은 3일 간의 휴가 동안 다이애나는 틈만 나면 밖으로 나가려고 합니다. 바로 눈 앞에 고향이 있기도 하고 답답함을 해소할 방법이 외출밖에 없어 보였습니다. 이는 유일한 대화 상대인 의상 담당 매기(샐리 호킨스)를 찰스가 출장을 보내는 바람에 더욱 더 심해집니다. 그리고 이 저택에 총 책임자인 그레고리 소령(티모시 스폴)이 그녀의 침대 곁에 둔 '앤 불린'에 관한 책이 그녀를 더욱 더 괴롭힙니다. 앤 불린은 헨리 8세의 두 번째 부인이었는데 헨리8세는 그녀와의 혼인을 위해 종교개혁도 실시했습니다. 하지만 앤 불린이 아들을 낳지 못하자 온갖 모략으로 그녀를 모함하고 심지어 교수형에 치르게 됩니다. 이 이야기를 접한 다이애나는 앤 불린의 환영을 보게 되면서 괴로워하고 어떤 순간엔 앤 불린의 모습이 마치 자기의 얼굴로 보이기도 합니다. 다이애나는 현재의 모습이 앤 불린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다고 여기기기 때문입니다.

크리스마스 3일간의 휴가를 시간적 배경으로 둔 이 작품은 제한된 공간에서 펼쳐지는 심리드라마입니다. 물론 다이애나를 중심으로 모든 이야기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왕실 내에서와 외부에서 보이는 이미지의 괴리 그리고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지 않은 삶에서 오는 고통이 그녀를 지속적으로 괴롭힙니다. 그리고 그녀를 어쩌면 가장 괴롭히는 것은 왕실의 기만입니다. 남편 찰스와 똑같은 불륜을 저지른다는 가정하에서도 비난을 받는 건 그녀뿐입니다. 물론 한 가지 예이긴 하지만 왕실의 기만은 여왕부터 왕세자까지 보여줍니다.

이 작품은 그 동안 여성 서사와 실존 인물을 주인공으로 작품을 꽤나 만들어왔던 칠레 감독 파블로 라라인의 신작입니다. 그는 <글로리아><판타스틱 우먼>으로 잘 알려진 같은 칠레 감독인 세바스찬 렐리오의 작품을 제작하기도 했습니다. 그 작품들도 여성 서사이죠. 아무튼 라라인 감독은 <재키><네루다>등의 실존 인물들의 이야기를 잘 만들어왔습니다. 이번 작품에선 가장 드라마틱했던 다이애나의 마지막 순간이 아니라 그 순간이 오기 전 그러니까 이혼을 하기 전 가장 괴로웠던 순간을 크리스마스라는 일 년 중에 가장 즐겁다고 여기는 휴가 기간을 통해 보여줍니다. 이 대비를 통해 다이애나의 고통을 좀 더 잘 보여주고 있고요.

저택 실내 장면이 주를 이루는 작품입니다. 복도에선 세로의 움직임, 방을 이동하는 다이애나의 모습은 가로의 움직임을 보여주는데 레일 촬영을 통해 이를 보여주면서 공간의 입체감을 더 해주고 있습니다. 또한 의상과 음식이 중요한 소재로 사용되고 있는데 이는 다이애나가 자기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주는 대로 있고 주는 대로 먹는 그녀는 결국 탈이 나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은 상태에서 구토를 하게 됩니다. 진정 그녀가 원하는 것은 두 아들과 함께 먹는 엔딩 장면에 그 음식이 아닐까 싶습니다.

계속해서 좋은 작품에 등장하는 크리스틴 스튜어트가 다이애나 역을 맡았습니다. 아마도 그녀의 최고작 중 하나가 될 것 같고 연기는 단연 그녀의 최고작이라고 생각합니다. 미국 배우로서 영국 억양을 써가면서 다이애나의 생존 했던 모습과 더불어 그녀의 심리 상태를 구현했어야 했을 텐데 꽤나 훌륭하게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론 전혀 닮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배우가 연기를 잘 해내면 외모의 구현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미셸 윌리엄스가 마릴린을 연기했던 <마릴린 먼로와 함께 한 일주일>처럼요.

다이애나 비를 생각하면 엘튼 존의 'Candle in the wind'가 가장 먼저 떠오릅니다. 그녀가 사망하고 엘튼 존이 추모곡으로 불렀죠. 물론 이 곡은 먼로의 추모곡이기도 했습니다. 아무튼 그녀가 떠난 지도 벌써 25년이나 되었군요. 행복한 웃음을 보여줬어도 행복하지 않았던 그녀가 하늘 위에선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다하며 지냈으면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