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436년, 단기 2769년. 간지 병자년. 팔왕의 난(중국 역사상 최악의 내부분열) 이후 5호 16국 시대를 거쳐 어느덧 위진남북조 시대에 접어든...유연·북위·송으로 삼등분된 대륙은 각국 황제들의 통일야욕 때문에 전쟁이 끊이질 않는다. 하여 수백 년 전 대륙을 통일한 한나라의 육천만 인구는 현재 삼천만 명 수준으로 반 토막 난다. 

 반면 고구려는 정복군주 광개토태왕의 뒤를 이은 고거련(장수태왕)이 지난 24년간, 정복전쟁 없이 오직 내치에 집중해왔다. 해외무역을 장려하고, 농업을 활성화하였다. 각종 복지를 통해 민생을 안정시키고, 국적 가리지 않고 이방인들의 귀화를 장려한 결과, 삼백만 명을 웃도는 인구수를 보유하기에 이른다. 물론 대륙의 유연·북위·송과 비교하면 터무니없이 적은 숫자지만 말이다.

 한편 고구려와 대륙 3국 사이에는 북연이라는 나라가 있다. 전연->후연->북연으로 계승되어 왔는데...전연(前燕)일 때는 고구려의 수도를 함락시키고, 선왕의 무덤을 파헤치고, 태후를 비롯한 오만 명의 고구려인을 포로로 사로잡아갈 정도로 화북(지금의 허베이)지역의 패자(霸者)였다. 

 하지만 후연(後燕)이 되면서 고구려 광개토태왕의 정복전쟁에 의해 끝없이 쇠락한다.  더욱이 후연의 4대 황제, 폭군 모용희의 탐욕에 의해 민생이 파탄의 지경에 이른다. 결국 고구려인 포로후손이자 왕족출신인 고운이 일으킨 반란에 의해 멸망한다. 

 이후 고운은 북연이라는 나라를 세우고 친 고구려 노선을 표방한다. 고구려인 포로후손들을 적극 등용했고, 장기적으로 고구려와 평화적으로 하나가 되는 길을 택한다. 당시 고구려의 임금이었던 광개토태왕도 이에 화답하기 위해, 민생이 어려운 북연의 백성들을 위해 곡식을 비롯한 각종 재화를 제공한다. 

 그러나 이는 당연하게도 북연 내부의 반발을 사기에 충분했다. 연나라는 본디 선비족이 근간이 되는 나라. 선비족 관료든 백성이든 이들 모두 북연이 고구려에 흡수통일 되는 걸 원치 않았다. 

 결국 409년, 선비족 고위 관료였던 이반, 도인이 북연의 초대 황제 고운을 죽인다. 그러자 고운의 최측근이었던 풍발이 동생 풍홍과 함께 이반과 도인을 죽이고 반란의 세력들을 제압한다. 그리고 스스로 북연의 2대 황제가 된다.

 반란은 제압했으나 주군의 아들을 저버리고 스스로 황제가 된 비정한 풍발이지만, 정치는 잘한 편에 속한다. 백성들에게 농사와 누에를 장려하여 국가의 부를 늘리고, 그 부를 바탕으로 민초들의 노동력을 함부로 갈취하는 요역(徭役)과 부세(賦稅)를 줄인다. 

 강대국인 북위와 국경을 맞대면서도 세력싸움에서 밀리지 않았다. 또한 고운과 마찬가지로 고구려와의 외교에도 공을 들인다. 고구려가 보내오는 고물과 재화가 민생에 큰 도움이 되기도 했거니와, 강대한 북위를 견제할 수단이기도 했던 것이다. 

 하지만 풍발은 고운과 달리 고구려인 포로후손이 아니다. 한족 출신이다. 따라서 북연이 고구려에 흡수통일 되는 걸 원치는 않는다. 그래서 고구려인 포로후손들을 중용했던 고운과는 달리, 선비족과 한족을 국가 중책에 등용한다. 또한 고구려 식으로 바뀌어가던 관제(官制)를 다시 선비족과 한족의 중간 방식으로 되돌린다.

 풍발의 치세 하에 재건되어가던 북연은 430년 그가 죽으면서 급속히 무너지게 된다. 탐욕의 화신인 동생 풍홍이 형의 자식을 모두 죽이고 북연의 3대 황제가 된 것이다. 그는 단기간 내에 국고를 탕진하면서 백성들의 피고름을 짜내어 나라의 곳간을 다시 채우고, 강대국 북위의 창검으로부터 백성들을 지켜주지 못한다. 북연이라는 나라를 멱살 잡고 수렁으로 빠트리는 것이다.

 하지만 풍홍은 스스로를 되짚어보기는커녕, 성난 민심을 잠재우기 위해 고구려인 포로후손들을 혐오하는 방식을 택한다. 

 “이 모든 건 고구려인 포로후손들이 땅도 빼앗고 재물도 빼앗기 때문이다.” 

 고구려인 포로후손들에게 낙인을 찍는다. 상징적인 의미가 아니라 진짜 낙인을 찍는다. 열다섯 살이 넘은 고구려인 포로후손 이마에 拷(약탈할 고)라는 글자가 새겨진 불도장을 찍는다. 고구려의 高(높을 고)와 음이 같으면서도, 고구려인 포로후손들이 선비족 백성들의 모든 걸 빼앗을 거라는 의미로 말이다. 사내와 여인을 가리지 않는다. 

 이 소식을 접해들은 고거련은 크게 분노한다. 마음만 먹으면 순식간에 북연을 멸망시킬 수도 있다. 하지만 참는다. 이전처럼 구휼을 위해 곡물과 각종 재화를 보낸다. 그에게는 피를 최소한으로 흘리며 북연을 흡수 통일할 대전략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풍홍이 나라를 망쳐 북연이 재건될 가능성이 사라지면서, 소위 ‘그날’이 오히려 앞당겨진 상황이기도 하고 말이다.

 오랜 세월 준비해왔다. 많은 반대가 있었고, 지금도 불만의 목소리가 작지 않지만,  고거련은 흔들리지 않는다.  

 ...

 고구려의 수도, 평양의 외성이자 전시(戰時) 수도인 대성산성. 왕궁인 안학궁성은 대성산성의 소문봉 남쪽 기슭의 평탄지에 위치해 있다. 성 주변에는 소문봉의 남쪽 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세 개의 물줄기가 동쪽과 서쪽은 북에서 남으로 흐르며 자연해자를 형성하고 있고, 가운데 물줄기는 북벽에서 남쪽으로 흐르고 있다.

 대성산성 외각 부근에는 평양의 젖줄인 패강(지금의 대동강)이 흐르고 있다. 패강 인근에는 비옥하고 광범위한 농토지대가 형성되어 있고, 그에 걸맞은 규모의 민가와 시장 역시 형성되어 있다. 

 또한 당대의 고급문화의 상징이었던 사찰이 무려 아홉 개나 도처에 자리 잡고 있다. 이는 선대인 광개토태왕 재위 2년에 지어진 것으로서, 사십여 년이나 된 사찰의 역사는 수도로서의 평양의 기품을 한껏 드높이고 있다.

 벚꽃이 만개한 4월의 저녁. 신분고하, 사내와 여인, 노인과 어린아이를 막론하고 수많은 인파가 거리를 활보한다. 그중에서도 특별히 눈에 띄는 사람들이 있으니, 피부색과 복색, 언어가 남다른 이방인과 벌써 고구려국적을 취득한 귀화인들이 눈에 띈다. 왜(일본), 송(중국), 북위(선비), 굽타(인도), 그밖에 서역(서아시아, 서남아시아) 등에서 온 사람들 말이다.

 고구려는 고국원왕 시절 시범적으로 대륙인들을 평양에 수용하였다. 이후 고거련이 427년 평양천도를 성황리에 마치면서, 본격적으로 이방인들을 받아들이고 수도인 평양에서 거주토록 했다. 그 결과 평양의 전체 가옥수가 21만 508호에 다다른 것이다. 한 호당 평균적으로 다섯 명씩 잡으니, 무려 백만 명이 평양에 상주하는 셈이다.  

 이렇듯 다양한 문화가 한데 어우러진 수도 평양에는 다양한 볼거리가 존재하는데...힘센 장사들의 수박(전통무술)경기, 광대들의 가면연극과 공 던지기(저글링) 장대놀이, 악사들의 뿔 나팔·멜북 공연 등. 

 또 이러한 볼거리들을 구경하러 나온 내지인, 이방인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는 야간 주막. 또 전통적인 탁주와 국밥만 파는 주막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저잣거리에 다양한 국가들의 식문화가 깃들어있다.

 한편 어두운 복색차림의 중년 사내가 어두운 색 피부와 거대한 덩치를 지닌 서역인 출신 수행원과 함께 수박 경기를 구경하고 있다. 이윽고 중년 사내가 수행원에게...

 “감회가 새롭지 않은가?”

- 선, 고구려로 가다. Prologu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