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독서일기]유럽의 미래를 말하다 - 앤서니 기든스

<유럽의 미래를 말한다>, 앤서니 기든스 지음, 이종인 옮김, 책과 함께, 2014

이번 책 <유럽의 미래를 말하다>는 <좌파와 우파를 넘어서>, <제3의 길>을 저술한 영국의 사회학자 앤서니 기든스가 2013년 출간한 책이다. 2013년 유럽의 많은 나라들은 글로벌 경제위기와 긴축정책으로 인한 빈곤, 높은 실업률을 겪고 있었다. 구제금융을 대가로 가혹한 긴축을 강요하는 독일 중심의 유럽연합(EU)에 대한 불만이 점차 늘어났으며, 가장 심한 위기를 겪은 그리스는 유로화 탈퇴까지 검토하였다. 이로 인해 유로화 체제 및 유럽연합의 장래에 불안한 기운이 드리워졌으며, 급진좌파와 극우파를 망라한 유럽연합 회의론자들이 힘을 얻고 있었다.

저자 기든스는 이러한 불만을 초래한 구조적, 근본적 원인을 구체적으로 짚고 해결 방안을 진지하게 모색한다. 그에 따르면 EU는 집행위원회, 이사회 등 기구와 유럽 국가들 간의 각종 조약, 문서로 구성되는 EU1, 프랑스 대통령과 독일 총리, 그 외 한두 나라의 지도자, 유럽중앙은행(ECB)와 국제통화기금(IMF)의 총재 등 유럽의 유력자들이 참여하는 실질적 의결기구인 EU2로 구분할수 있다. EU1은 의사결정이 느리고 그 결정의 내용도 곧 유명무실해지는 일이 많으며, EU2는 유럽 시민들의 의사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는 비민주성을 내포하고 있다. 이것이 EU의 민주적 의사 결정과 리더십을 결정적으로 약화시킨 구조적 문제점이다. 기든스는 EU1과 EU2가 긴밀하게 통합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편으로 그는 책의 전반에 걸쳐 유로화, 유럽연합으로부터의 탈퇴 움직임에 반대하며 오히려 ‘더욱 통합되고 강한 유럽’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유럽 대륙보다는 대서양을 지향하며 EU 탈퇴를 고민하는 영국인들에게 그는 EU 잔류/탈퇴 등 영국 앞에 놓인 경우의 수를 보고 미래를 전망한다. 결국 탈퇴를 선택할 경우 영국은 유럽 대륙 국가들과의 모든 협력 관계를 상실하고, UN 안보리와 나토에서도 유력한 강대국으로 인정받기 어렵다는 경고를 한다.

그러나 기든스는 EU 회의론을 증폭시키는 촉매제인 긴축 정책도 분명하게 비판하고 있다. EU가 강요한 가혹한 긴축 정책이 민간 투자를 위축시켜 높은 실업률을 초래했으며, 이제는 투자와 성장으로 전환할 시기라고 촉구한다. 가장 심한 경제위기에 시달리는 그리스에도 추가적인 투자를 하되, 반드시 제도를 전문화, 현대화 하는 실천적 개혁이 따라야 한다고 언급한다. 새로운 성장 전략은 디지털 방식을 통한 제조업과 서비스업의 통합에서 나오며, 디지털 생산과 로봇 공학이 유럽인들의 생활 패턴을 바꿔 그 파급효과로 더 많은 일자리를 창출할 것이다. 또한 미국과 유럽의 범대서양 자유무역협정(FTA)가 유럽에 더 많은 일자리를 가져올 수 있다고 전망한다. 이것이 높은 실업률로 EU 정책에 큰 불만을 갖게 된 EU 회의론자들을 설득하기 위한 기든스의 응답이다.

책에서는 유럽의 사회적 모델, 복지제도, 다문화주의, 이산화탄소 배출 등 유럽이 직면한 문제들도 다루며 전작 ‘제3의 길’에서 밝힌 기든스의 사상과 철학을 재확인할 수 있다. 그는 1960~70년대 소위 ‘황금시대’의 유럽 복지제도가 여성의 사회적, 경제적 권리를 제약하고 복지제도에 의존하는 사람들을 능동적 시민이 아닌 수동적 국민으로 간주한 실태를 지적한다. 기존의 복지국가 대신, 인적 자원 개발, 재교육으로 ‘고용의 유연 안전성’을 확보하고 사회적 평등과 경제적 효율, 두 마리 토끼를 모두 갖춘 사회적 투자 국가를 유럽 사회적 모델의 새로운 대안으로 제시한다. 이는 기든스가 ‘제3의 길’에서부터 누차 외친 슬로건이었다. 그 외에도 다문화주의는 유럽 백인 사회의 불만을 키우는 낡은 개념으로, 이민자와 원주민이 상호 이해와 교류를 통해 공통의 정체성을 만드는 ‘상호문화주의’로 대체해야하며, 이산화탄소 배출과 기후 변화 문제도 생태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사전예방원칙을 비판, 새로운 기술 위주의 접근을 고려하자고 설득한다.

이 책 전반에 걸쳐 나타난 기든스의 메시지는 꽤 선명하다. (책이 출간된 시점에서)다가올 유럽의회 선거에서 유럽연합 찬성파들이 펼쳐야 할 선거전략도 제시한다. 유럽연합과 유로존을 보전해야할 당위성에 관한 설득, 긴축과 실업에 대한 불만을 인식하고 투자로의 전환을 촉구하는 목소리에는 글로벌 경제위기 이후 유럽의 현실에 관한 저자의 절박한 위기의식과 진지함이 드러난다. 그러나 한편으로 더욱 통합된 유럽의 일환으로 ‘연방제 유럽’에 관해 언급한 부분에는 책의 전반과 후반부에서 서로 모순되는 태도를 보인다. 그리고 동화되지 못한 무슬림들을 보며 상호문화주의에 관해 다소 나이브한 기대를 갖는 것은 아닐까, 신기술 위주의 기후 변화 대응이 사전예방원칙보다 더 효과적인 전략이라고 믿을 수 있을까 의문을 가질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불만이 가득한 유럽 시민들에게 지금 더욱 강하고 통합된 유럽이라는 비전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느냐고 물었을 때 당장 어떤 대답을 기대할 수 있을까.

이 책이 출간된 후에도 유럽연합의 장래를 불안하게 하는 사건들은 연달아 일어났다. 2014년 유럽의회 선거에서 반EU 성향의 극우정당들이 득세했고 영국은 브렉시트 국민투표로 EU를 탈퇴했다. 대서양의 동맹 미국에서는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됐으며 네덜란드,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에서도 극우파가 득세하고 있다. 유럽은 냉전 이후 가장 불안한 기운 속에 표류하고 있다.

그러나 기든스는 중도좌파와 중도파, 더 넓게는 중도우파까지 포괄하는 폭넓은 목소리를 내며 유럽에 다시 넓은 지평을 제시한다. 긴축으로 고통받고 분열된 유럽의 현실을 인정하고 비전을 제시하려는 그의 노력은 여전히 상당한 설득력을 갖고 독자들에게 다가온다. 그의 목소리는 향후 유럽의 미래를 개척하려는 수많은 목소리들 가운데 여전히 중심의 위치에 있을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