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악산.

 1398년 8월 무더운 여름. 조정의 명을 받은 공요(攻遼)군이 백악산에서 수많은 군기를 나부끼며 진법훈련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장창(長槍)부대는 산 초입을 포위한 채 무언가를 몰이 중이다. 

 백악산 중턱으로 올라가면 조선의 다섯 번째 왕자 방원이 호위 무사 무령, 초복, 말복, 그밖에 수많은 궁수기병들과 함께 역시 무언가를 쫓고 있는데, 바로 호랑이. 이때 느닷없이 까마귀 울음소리가 숲속에 울려 퍼진다. 이에 방원이 인상을 찌푸리며...

 “거슬려.”

 후방에 위치한 까마귀를 향해 배사(背射: 마상에서 상체를 좌측으로 틀어, 후방목표물에 화살을 쏘는 기법)기법으로 활을 쏜다. 화살촉이 까마귀 귀 옆을 스쳐 지나간다. 일부러 위협만 준 것이다. 불길하지만, 그것만으로 죽일 필요는 없으니까. 또 고기가 많이 나오는 실용적인 사냥감도 아니고 말이다.

 어쨌든 까마귀가 놀라서 달아나자, 방원은 무령, 궁수기병과 함께 계속해서 호랑이를 쫓는다. 이윽고 사정권에 다다랐는지, 방원이 말 위에서 균형을 잡고 호랑이를 향해 활시위를 당기는데...

 "꽹과리 소리다!"

 "도련님!"

 호위무사 주제에 감히 왕자에게 도련님이라고 부르는 무령의 외침과 함께, 방원은 오른 손을 하늘을 향해 뻗어 올린 다음, 재빠르게 반원을 그리고 아래로 내린다. 그러자마자 일동 순식간에 말밑에 거꾸로 매달린 채 달리기 시작한다. 

 시끄러운 꽹과리 소리가 전쟁터에서 적의 화살이라고 가정하고, 달리는 말밑으로 거꾸로 매달리는 훈련을 하는 것이다. 거꾸로 매달린 상태로 말의 고삐를 움켜쥐며 능숙하게 방향을 조절하는데, 피가 역류하여 시뻘게진 그들의 얼굴에서 땀이 비 오듯 흘러내린다.

 "..."

 "꽹과리 소리가 멈췄습니다."

 꽹과리 소리가 멈춘 듯하니, 방원을 필두로 무령과 호위무사들, 궁수기병들이 달리는 말위에 올라타서 자세를 바로 잡으며, 다시금 호랑이를 추격한다. 

 "여기서 끝낸다."

 방원이 호랑이의 움직임을 예측하여 활시위를 당기니, 이윽고 범의 오른 앞발을 명중시킨다. 호랑이는 순간적으로 앞발을 못 쓰게 되자 스스로의 속력을 견디지 못하고, 앞으로 굴러버린다. 호랑이가 방원을 노려보더니, 그를 향해 달려온다. 

 "뭣들 하느냐! 어서 정안군 마마를..."

 "호들갑 떨 것 없다!"

 방원은 일반 화살촉이 아닌 편전(일반 화살촉보다 사거리와 파괴력이 강한)을 사용해 호랑이를 향해 활시위를 당긴다. 이윽고 편전이 호랑이의 이마를 정확히 관통한다. 즉사해버린 호랑이와 방원 간의 거리는 불과 한 자(尺: 대략 19~30cm).

 병사들 사이에서 환호성과 함께 휘파람 부는 소리가 들려오지만, 호위무사들은 식은땀을 흘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쉴 따름이다. 

 "괜찮으십니까...정안군 마마."

 "형님 그런 걱정이라곤 하질 마십시오. 우리 마마는 끄떡없으니까."

 두 호위무사는 서로 형제지간이며, 동북면(함흥 지역) 출신이다. 마찬가지로 그 옆에 있는, 아까 왕자에게 감히 도련님이라고 불렀던 호위무사이자 여인(女人). 하지만 도무지 여염집 여인들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덩치의 소유자, '무령'도 한 마디 거든다.

 "하여간 못 말리십니다. 다음부터는 그러지 마시라 해도 구태여 듣지를 아니 하시질 않습니까!"

 ‘도련님’이라는 말이 못 마땅한 말복(호위 무사 초복의 동생)이 얼굴을 찌푸리며 무령을 째려본다. 

 한편 미소를 머금던 방원이 병사들을 일일이 바라본다. 땟국에 전 병사들. 방원의 서서히 얼굴을 구긴다.

성균관 내 명륜당.

 '대광보국숭록대부 문하시랑찬성사 겸 판의흥삼군부사로 동판도평의사사사·판호조사·겸판상서사사·보문각대학사·지경연예문관춘추관사 겸의흥친군위절제사.' 

 이 모든 직책을 한 사람이 수행한다. 6척 장신에 검붉은 피부, 얼굴선이 대체로 굵은 남자. 조선의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 삼봉 정도전. 무더운 여름 날, 상대적으로 서늘한 곳에서 글공부를 하는 성균관 유생들을 상대로 강연 중이다. 도전의 옆에 앞에서 뒤로 넘길 수 있는 대형 지도가 있는데...첫 장엔 고구려의 19대 태왕, 고담덕의 시절이 그려져 있다. 

 "이 시기에 백제는 삼한의 동족인 고구려와 신라를 멸망시키기 위해..

(지도상의 왜국<일본>을 가리키며) 왜놈들에게 붙어먹었다가 실패하였다. 그 뿐인가?"

 도전이 지도를 뒤로 넘긴다. 두 번째 장엔 고구려의 20대 태왕, 고거련의 시절이 그려져 있다. 

 "수십 년 후 또 고구려를 멸망시키기 위해 이번엔...

(지도상의 북위<중국>를 가리키며) 되놈들에게 붙어먹었다가 실패하였다."

 도전이 또 다시 지도를 뒤로 넘긴다. 세 번째 장엔 삼국일통 직전의 지도가 그려져 있다.

 "(지도상의 당나라<중국>를 가리키며) 신라도 마찬가지. 되놈들과 붙어먹었고, 동족을 멸망시키는데 성공하기까지 했다. 허나 고구려는 달랐다. 오직 그들만이 자주적이고, 주체적으로 국권을 행사해왔다."

 이때  젊은 유생 하나가 패기 넘치게 손을 들며 도전의 강연에 이의를 제기한다.

 "소생. 문하시랑찬성사 판의흥삼군부사 대감께 감히 여쭐 것이 있어, 말씀 도중에 염치 불구하고 손을 들었나이다."

 "말해보게."

 "자고로 한 사회가 순리적으로 돌아가기 위해선, 아랫사람은 윗사람을 공경하고 윗사람은 아랫사람을 사랑으로 대해야한다 배웠나이다. 허나 삼국은 서로를 향해 끊임없이 전쟁을 일으켰고, 개중 대국이라 자부하던 고구려 역시 그 한계에서 자유로울 수 없사옵니다. 헌데 어찌 이들을 동족으로 묶을 수가 있겠으며, 땅덩이만 큰 고구려를 어찌 우리 조선의 이상(理想)이라 할 수 있겠나이까." 

 은연중에 고구려를 우상 숭배하는 도전에겐 나름 매서운 언중유골의 질타인 셈이다. 하지만 도전은 당황하지 않고 어린 유생의 질문에 대한 답을 한다.

 "자네 말도 일리가 있네. 헌데 자네가 간과하고 있는 것은...

만일 삼국을 동족으로 묶을 수 없다면, 광개토왕이 5만의 병력을 보내어 신라를 왜놈들로부터 구한 건 어찌 설명할 수 있겠는가. 

 또 백제의 한성을 함락시켰을 때에도, 사직 그 자체는 존속하게 한 건 또 어찌 설명할 수 있겠는가? 

 무엇보다도...삼국이 서로 치열하게 싸웠을지언정, 교류할 때에 통번(通飜: 통역과 같은 말)이 필요했다는 기록을 본 적 있는가? 언어란 동류의식의 유무를 가장 정확하게 판가름할 수 있는 척도인데 말일세."

 도전의 화려하고 내실 있는 언변에 젊은 유생은 납득이 가는지 고개를 끄덕인다. 도전이 미소를 머금다가, 평소 앓고 있던 각기병 증상으로 인해 인상을 찌푸리며 저린 손과 팔뚝을 주무른다. 이때 도전의 당여(黨與: 같은 붕당의 일원) 중 한 명이 허겁지겁 문을 열고 들어와 그의 앞에 선다. 

 "무슨 일인가?"

 당여가 유생들 눈치를 살피더니, 도전에게 귓속말을 한다. 도전의 얼굴표정이 미묘하게 뒤틀린다.

 "지금 하륜은 어디에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