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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악산 오솔길 무렵.
요동정벌을 목적으로 진법훈련과 사냥을 병행한 조선 공요군. 사냥을 통해 얻은 수확이 제법 두둑하지만 지금 당장 병사들에게 돌아가진 않는다. 훗날을 위해 육포라는 전투식량으로 비축될 테니까.
“젠장...”
“빌어먹을...”
“오늘도 밥 둥글게 뭉친 거. 그거나 먹겠지.”
“투덜대지 마. 저것들 싹 다 말려가지고 나중에 전쟁할 때 먹는 대잖아.”
“억울해서라도 살아남아야겠네. 저 고기들 못 먹고 죽으면 억울하잖아?”
그 때문인지 수레에 산더미처럼 쌓인 동물의 사체를 운반하고 있는 병사들의 사기가 바닥이다. 초복은 그런 병사들의 사기를 애써 독려하며 힘들게 통솔하고 있는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말복은 인상을 구기고 싫은 티를 팍팍 내며 게으름을 피운다.
"어찌 또 그러니."
"마음에 안 듭니다. 마마 곁에 찰거머리처럼 딱 붙어있는...그 계집년."
"어허! 말조심하거라! 어찌 자꾸 그러니. 무령 낭자에게."
"그 년이 아까는 정안군 마마께 도련님이라고 하질 뭡니까! 이게 말이 되는 소리오?"
"두 분이 워낙 각별한 사이시니 그러는 것 아니겠느냐. 무령낭자가 정안군 마마껜, 거의 반 유모나 다름없는 분이시다. 너도 잘 알지 않느냐!“
“유모는 개뿔...”
“어허!”
"형님은 부럽지도 않으십니까? 다른 동북면 촌놈들은 개국공신이다 뭐다 해서, 관직의 말석이라도 꿰차는데...우리만 이게 뭐냐, 이겁니다!"
“그게 어찌 무령 낭자 때문이겠느냐.”
“당연히 그년 탓이지요. 저희 윗사람이 사내였으면 자연스레 함께 벼슬길에 오르지 않았겠습니까? 헌데 저년이 계집이라 딱 막혀버리니, 우리에게까지 출세의 기회가 닿지 않았던 겁니다.”
“듣기 싫다!”
“형님!”
“우리가 벼슬길엔 못 오르더라도, 천출에서 벗어나 양인이 되질 않았느냐? 이 형은 그것으로 족하다."
'어이구.' 말복은 자기 딴에는 답답했는지, 말을 이어나가려다 입을 닫고 한숨을 내쉰다.
백악산 중턱 오솔길, 방원의 휴식 근거지.
얼굴이 땟국에 절여진 듯 보이는 초췌한 병사들이 비루한 주먹밥을 먹으며 휴식을 취하고 있다.
"..."
"..."
그들 가운데 5척을 살짝 웃도는 아담한 신장에 흰 피부, 서글서글한 눈을 가졌으나 어딘가 차가워 보이는 사내가 있었으니...바로 공요군의 여러 지휘관들 중 하나이자, 태조 이성계의 다섯 번째 왕자, 정안군 이방원이다. 그의 옆에는 그보다 큰 신장에 철퇴를 지니고 있는 호위무사 조무령이 있다. 그녀의 시야에 굳은 얼굴로 억지로 주먹밥을 먹는 방원이 들어온다.
“도련님. 맛이 없으십니까?”
무령의 말에 정곡을 찔린 방원이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무...무슨 말을...하는 것이냐? 무척이나 맛있는데.”
"소인에게까지 숨기실 필요 없습니다. 조금 참았다가 사저에서 드십시오. 그게 한결 낫지 않겠습니까?"
방원이 무령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살짝 미소를 머금는다.
"요즘 농터에 젊은 사내들이 없다지. 죄다 진법훈련을 받고 있어서."
"해서 여인들이 고생이지요. 조간엔 농터에서 농사에, 석간엔 집안에서 가사(家事)에..."
"그러니까. 저 사내들이 어디 눈치 보여서, 집에서 제대로 밥이나 얻어먹겠는가."
무령이 피식 웃는다.
"내가 저 사내들과 함께 해줄 수 있는 거라곤...이 맛대가리 없는 걸 같이 먹어주는 것 밖에 없네. 지금으로서는."
무령이 방원을 안쓰럽게 바라보는데...이때 말발굽 소리가 들리더니, 저 멀리 거점을 향해 말을 달려오는 파발마가 눈에 띈다. 방원과 무령이 서로를 바라본다. 이윽고 당도한 파발마가 말에서 내린 후 방원과 무령 앞에서 무릎을 꿇는다.
"그래, 무슨 일인가?"
"금일 훈련을 파하고 해산하라는 도당의 전갈이옵니다."
방원이 의아해하며 고개를 갸웃하는데, 무령이 대신 파발마에게 묻는다.
"그게 무슨 말이오? 아직 두 시진이나 더 남았는데 훈련을 멈추라니."
"요동이 무주공산이라는 판의흥삼군부사 대감의 주장이 허위로 밝혀져..."
‘뭐? 허위?’ 순간 감정이 격해진 방원이 고함을 지르며, 파발마의 말을 끊는다.
"그게 무슨 소리냐!"
겁먹은 파발마가 방원과 무령의 눈치를 살핀다.
"그리 언성을 높이시면 겁을 먹지 않겠습니까. 자...계속 말해보시오."
“시...실제로는 요동 땅은 무주공산이...아니라...10만에 가까운 명나라의 강군이...상비중이라 하옵니다.”
“설마...삼봉 대감이...어찌 그런 거짓을...”
방원이 불현 듯 실소를 터뜨리며...
“그래, 네놈이 거짓을 고하는 것이다. 하루가 따분하여 내게 농을 하는 것이야. 아니 그러하냐?”
“소인이...어느 안전이라고 감히 거짓을 고하고...농을 하겠나이까.”
“솔직히 털어놓으면 내 기꺼이 용서할 것이다.”
“정안군 대감...”
방원의 눈시울이 붉어진다.
“진정 거짓이 아니란 말이냐?”
“예...정안군 대감...”
“하...10만이라...”
방원이 쉬고 있는 병사들을 하나하나 바라본다. 그의 시야에 꾀죄죄한 몰골들, 그들이 먹는 비루한 주먹밥이 들어온다. 병사들이 동요하며 수군거리는 가운데, 화가 턱 끝까지 차오른 방원이 끝내 억누르지 못하고 폭발하고 만다. 들고 있던 주먹밥을 땅에 내팽개친다.
"이런 빌어먹을, 개지랄 같은 작자를 보았나!"
"도련님!"
"튀겨 죽여 버릴! 개 종간나..."
무령이 다가가 방원의 양 어깨를 잡고 그를 안정시킨다.
"진정하십시오. 심호흡을 하시옵고...소인이 평시에 올렸던 말씀을 되새기십시오. 그릇된 언사는 그릇된 운명을 불러온다. 그릇된 언사는 그릇된 운명을 불러온다. 그릇된 언사는..."
방원이 두 눈을 질끈 감고 심호흡을 하며 화를 억누른다.
"그릇된 언사는 그릇된 운명을 불러온다. 그릇된 언사는 그릇된 운명을..."
“무령아.”
“예, 도련님.”
“내 철퇴를 돌려 다오.”
놀란 무령의 두 눈이 휘둥그레진다.
"아니 되옵니다!"
방원이 무령을 노려본다.
"포은 선생을 죽이고 제게 맡기신 후로, 다시는 찾지 않겠다, 저와 약조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돌려...달라 했다."
"도련님..."
"어서 내놓지 못하겠느냐!"
무령이 왕자이면서 자식 같은 방원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철퇴를 건넨다. 방원이 철퇴를 등에 걸쳐 메고, 말 위에 올라탄다.
"병사들을 돌려보내 거라. 이럇!"
살기어린 방원이 말을 타고 도성을 향해 질주한다. 무령이 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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