뽐뿌

독서/e-book 입니다.

북마크 아이콘

책과 관련된 모든 정보를 공유하는 공간입니다.
5[창작 웹소설] 선, 고거련에게 달려가다. 7화.
분류: 자작글
이름:  밤이오지않는나라


등록일: 2022-03-16 05:34
조회수: 264





요동.

 고구려의 태조왕이 요동을 침공한 이래로, 요동정벌은 그 후손들의 숙명이었다. 하여 많은 시도들이 있었으나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요동을 넘보았으나 패배하였고, 도리어 수도를 함락당하고, 선왕의 시신과 태후와 왕비, 그리고 수많은 백성들이 볼모로 잡혀가기도 했다.

 그러나 고구려는 포기하지 않았고...마침내 광개토태왕 대에 이르러, 장장 수백 년 만에 요동을 차지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그 뒤를 이은 고거련은 선대가 수없이 피 흘려 차지한 요동을 지켜야하는 사명에 놓였고, 그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고거련이 택한 전략은...

 ‘밥 짓는 연기로 요동의 하늘을 가득 메우리라.’

 선대가 급격하게 넓힌 국토, 그 중에서도 특히 넓은 요동을 백성들로 가득 채우기 위해 정복전정을 중단하고 내치에 집중했다. 그 결과 요동 땅에는 생업에 종사하는 수많은 백성들로 가득 채워졌다. 

...

요동성 인근 농터.

 하지만 이러한 배경을 모르는 선은 요동의 농터를 지나치는 동안, 인근 집집마다 내뿜는 연기를 바라보며...

 “전쟁이...난 건가요?”

 “무슨 전쟁입니까?”

 “집집마다 저 연기...도대체 뭐예요?”
 
 “밥 짓는 연기입니다. 곧 식사할 시간입니다.”

 “지금...밥을 먹어요?”

 “선. 뭘 당연한 걸 묻습니까?”

 “점심을 먹는다고요?”

 선은 태어나서 매 끼니마다 밥을 먹어본 적이 없다. 특히 아침과 저녁 사이에는 더더욱 먹어본 적이 없다. 혼란스러운 마음을 금할 수가 없던 차에, 선의 시야에 어렴풋이 평지성이 보인다.

 “성이...보입니다.”

 “요동성입니다.”

 ‘저기가 말로만 듣던 요동성이구나...’

 “우린 저기 가서 밥 먹습니다.”



요동성.

 광활한 요동벌판에 세워진 평지성(坪地城). 평평한 땅에 세워진 만큼 산성(山城)에 비해 방어에 취약할 수밖에 없기에...100척(대략 30m)의 앞도적인 높이와 태자하(요동성 인근 강)의 강물을 끌어들여 만든 해자가 평지성의 약점을 크게 보완한다. 이를 지나쳐가는 선에게는 눈앞의 장관이 경이로울 따름이다. 북연의 수도였던 용성보다도 튼튼하고 아름다워 보였으니까.

 이윽고 성 안에 들어가서 난생 처음 점심식사를 그것도 맛있게 마치고 난 후. 요동성주의 재가를 받고 갈로맹광과 함께 성곽 위를 누비던 선은, 압도적인 고구려군의 위세에 눌릴 따름이었는데...더욱이 수천 명의 경기병과 철기병이 성 밖으로 나가는 걸 목격하고는...

 “혹...전쟁이라도 난 것입니까?”

 “선. 왜 아까부터 자꾸 전쟁타령입니까?”

 “저렇게나 많은 철기병이 성 밖으로 나가니까요.”   
  
 “훈련입니다.”

 “훈련인데 저렇게 많이 나갑니까?”

 “고구려에 있는 철기병 전부 합칩니다. 대략 5만 명 정도 될 겁니다.” 

 ‘뭐? 5만 명? 아니 병사가 저렇게나 많은데...그것도 철기병이 저렇게나...많은데.’

 선은 마냥 놀랄 수가 없었다. 솔직한 심정으로 기분이 몹시 나빠졌으니까. 

 ‘저 병사들이 나서줬더라면...내가 겪었던 고통을...겪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선이 살면서 겪어온 14년간의 고통의 기억이, 그녀의 얼굴을 단숨에 일그러트린다. 요동을 지나 만주의 여러 지역을 거쳐 압록수(압록강)를 건너, 고구려의 수도 평양에 가까워지는 내내 선의 얼굴은 밝지 못한다. 갈로맹광이 자초지종을 물어도 답할 수가 없다. 이는 당사자가 아니면 절대 이해 못할 감정이니 말이다.

 ...

 마침내 내일이면 평양에 당도한다. 평양으로부터 전갈이 왔는데, 태왕이 직접 마중 나온다고 한다. 선이라는 아이가 보고 싶다고 말이다. 속편한 갈로맹광은 옆 칸에 있는 사람들한테까지 다 들리도록 코를 골며 잠을 자지만...선은 아니다. 솔직히 말해 두렵다. 마음이 좋지 못한 자신이 내일 태왕에게 무슨 말을 내뱉을지 모르겠으니까. 

 “기껏 그 지옥 같은 곳에서 빠져나왔는데...”

 부모를 버리고 얻은 고구려다. 부모의 희생으로 얻은 고구려다. 고구려를 삶이란 말로 바꿔도 의미는 통한다. 삶. 전쟁 때문에 희생되었던 수많은 요하 인근의 백성들이 그토록 염원했다던 내일. 지금의 선에겐 너무도 당연해진 미래 말이다. 내일 태왕 앞에서 감정조절만 잘하면 된다. 그러면 앞으로 무난히 살아갈 수 있다.

 “그래, 참는 거야. 참는...거야.”

 선은 잡생각을 떨치기 위해 애써 잠을 청한다.   
 


고구려의 수도, 평양. 아불보구의 사가.

 내일이면 평양에 두 개의 커다란 행사가 치러진다. 하나는 북위의 사신을 영접하기 위해 대대로 우중려가 직접 맞이하러 나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태왕이 직접 신하들과 함께 선과 갈로맹광의 행렬을 맞이하는 것이다.

 아불보구와 을연도 내일 태왕과 함께 해야 하기에 평소보다 일찍 잠을 청하려 한다. 하지만 을연이 좀처럼 잠에 들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가 고구려의 평범한 평민출신이 아닌, 바로 북연에서 태어난 고구려인 포로후손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북연의 황제가 풍발이었던 비교적 평화로운 시기에, 부모와 함께 고구려로 넘어왔던 것이다.
 
 “어찌 자꾸 뒤척이십니까...”

 “송구합니다, 부인.”

 “선이라는 고구려인 포로후손 때문입니까?”

 “그 아이의 나이가 열넷이라고 하더군요.”

 “맞습니다, 서방님.”

 “제가 연나라(북연)에서 고구려로 넘어왔을 때가 열다섯이었습니다.”

 아불보구가 고개를 돌려 을연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열다섯은 보통 지학이라고도 부르지요. 학문에 뜻을 두는 나이라는 의미로, 저도 열다섯에 고구려로 넘어와 경당에서 문무를 수양했고...그 수양이 결실 맺어 서부의 귀족이신 부인의 눈에 들어 혼인을 하고, 이리 호사를 누리는 것 아니겠습니까.” 

 “서방님...”

 “헌데 요즘 연나라에서는 고구려인 포로후손들이 열다섯만 되면 이마에 낙인을 찍는다고 합니다. 拷(약탈할 고)라는 글귀가 새겨진 불도장으로 생살을...”

 을연이 말을 끝까지 잇지 못하고 괴로워한다. 아불보구가 눈시울을 붉히며 연민의 시선을 보낸다.

 “제가 연나라에서 핍박 받고 있는 고구려인 포로후손들을 위해 대관절 무얼 했단 말입니까. 제가 무언가라도 했더라면...그리 했더라면...어쩌면 선이라는 아이가 구태여 목숨을 걸고 고구려로 넘어오지 않아도 되었을 겁니다.”

 “그게 어찌 서방님 탓이란 말입니까. 또한 우리 모두가 함께 힘을 모아 연나라를 흡수하기 위한 전략을 준비하고 있지 않습니까. 허니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아불보구가 을연을 끌어안고 그의 마음을 달랜다. 

 ... 

같은 시각 안학궁성, 침소.

 고거련은 늦은 시각까지 퇴청하지 않고 북위 사신을 영접할 준비를 하는 우중려를 격려하기 위해, 침소로 불러 함께 요깃거리를 나눈다.

 “술은 가져오지 말라하였소. 짐이나 그대나 공사가 다망하니 말이오.”

 “실로 옳으신 판단이옵니다.” 

 “내일 선이라는 아이를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하니 일찍 잠을 청해야 하는데...”

 “떨리시옵니까?”

 “맞소. 가슴이 어지간히 두근거려야 말이지. 좀처럼 잠이 오질 않더이다.”

 “폐하께서 가슴이 두근거리는 건, 비단 그 아이 때문만은 아니지 않사옵니까?”

 “물론 그렇소.”

 “확답을 내리기엔 이른 듯싶으나...이번 사태가 열네 살 여인의 탈출조차 막지 못할 정도로 연나라의 경비가 허술해졌다는 걸 어느 정도 방증하는 것이 아니겠사옵니까. 때가 점점 가까워지는 듯싶사옵니다.”

 “설레기는 하나 걱정하진 않소. 누이를 믿고, 그대를 믿고, 백성들을 믿으니까.” 

 고거련과 우중려가 가장 신뢰하는 정치적 동지를 바라본다. 바로 서로를 말이다. 



고구려의 수도, 평양. 대성산성 성문.

 선이 평양으로 오고 있다는 소문이 시내에 삽시간에 퍼져나갔고, 수천 명의 백성들이 구경을 위해 성문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연나라(북연)에서 살고 있던 고구려 사람이 온대!’

 ‘선 태왕 때 잡혀갔던 사람들 후손이래.’

 ‘되게 오랜만이지?’

 마침내 선과 갈로맹광의 행렬이 성문을 통해 평양 시내로 진입한다. 갈로맹광과 마찬가지로 말을 타며 이동하는 선을, 수많은 백성들이 물끄러미 바라본다.

 ‘뭐야. 어린애여 다 큰 애여?’

 ‘계집아이여, 사내여.’

  성인도 어린아이도 아닌 것 같고...사내로 보이기도 여인으로 보이기도 하는 선의 모호한 외관 때문인지, 그녀를 바라보는 백성들은 무척 혼란스러울 따름인데. 수군거리는 그들의 아우성이 선에게 전해지고...

 “내가 무슨 동네 개가 된 느낌이네.”

 썩 유쾌한 느낌을 주지는 못하는 듯싶다. 이때 칠순 넘은 노인이 말 속도에 맞춰 따라오더니, 선의 다리를 툭툭 친다. 

 “할아버지?”

 노인이 선에게 육포를 건네며...

 “이거 맛있어. 씹을수록 달아.”

 “감...사합니다.”

 “잘 왔어! 그 정도 용기면 잘 살 거야.”

 마지막 말을 끝으로 점점 시야에서 흐릿해져가는 노인...잠시 후엔 기억에서 사라질 모습이지만, 마음에 새겨진 글귀는 영원히 기억에 남는다. ‘잘 왔어! 그 정도 용기면 잘 살 거야...’

 어렴풋이 안학궁성 성문이 보인다. 그곳에 용교의(왕의 의자)에 앉아있는 고거련과 그 주위로 왕당(왕의 친위대)과 각부 귀족들을 비롯한 대신들이 모여 있다. 

 “선. 저기 태왕입니다.”

 선의 심장이 요동친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무난히 참고 지나갈 것인가. 속에 담아둔 서운함을 잔뜩 퍼붓고 대역죄로 목이 잘릴 것인가. 야속하게도 고민을 할 시간은 짧았다. 어느덧 태왕의 앞에 당도했으니까. 갈로맹광의 지도하에 말에서 내린 다음, 고거련에게 절을 하려한다. 

 “됐네, 되었어.”

 고거련이 앞으로 걸어 나와 선과 갈로맹광을 일으켜 세운다. 

  “태왕. 그간 강령합니까?”

 ‘강령하셨사옵니까?’가 아닌 ‘강령합니까?’라는 갈로맹광의 말이 불편한 명림고보가 굳이 자신의 감정을 감추지 않고 헛기침을 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고거련은...

 “이를 말이겠는가.”

 “헌데 어찌하여 직접 나옵니까?”

 “대대로는 대위국(북위) 사신을 영접하느라 바빠서 말일세.”

 “아...위나라. 이해됩니다.”

 그러나 선은 고구려가 북위의 사신을 영접한다는 게 불쾌할 따름이다. 선에게 있어 북위는 북연 못지않게 자신의 삶을 지옥으로 만든,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나라기 때문이다. 북위가 계속 쳐들어오는 바람에 아비는 한쪽 다리를 잃고, 자신은 전쟁터에 끌려가 죽을 뻔했기에...

 고거련이 선을 바라보며...

 “또한 직접 보고 싶어 말일세.” 

 “송구하옵니다...”

  고거련의 시야에 선의 물집투성인 손바닥과 울퉁불퉁한 손마디, 무언가에 셀 수 없이 긁힌 얼굴이 들어온다. 

 “내 너의 나이가 열넷이라 들었다. 맞느냐?”

 “맞사옵니다.”

 ‘고작 열넷이거늘...’ 고거련의 눈시울이 붉어진다. 그러나 선에게는 이러한 고거련의 모습조차 위선처럼 느껴질 따름이다. 결국 참지 못하고 속에 담아두었던 말을 꺼내기 시작하는데...

 “태왕 폐하.”

 “오...그래...선아.”

 “한 가지 여쭈어 올려도 되겠나이까?”

 명림고보를 비롯한 권위주의적인 동부의 대신들은 몹시 불편해하는 가운데, 아불보구와 서부의 대신들, 특히 을연이 선의 행동을 귀여워하며 미소를 짓는다.

 “물론이다. 어서 말해 보거라.”

 “폐하께서는 연나라(북연)에 있는 고구려인들과 위나라(북위). 둘 중에 위나라가 더 소중하시옵니까?”

 고거련은 물론이거니와, 나와 있는 모든 귀족과 대신들...심지어 그간 선을 어여삐 여기던 갈로맹광과 고구려인 포로후손 출신인 을연조차 당황해한다.
추천0 다른 의견0

  • 욕설, 상처를 줄 수 있는 댓글은 삼가주세요.
짤방 사진  익명요구    
△ 이전글▽ 다음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