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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수도, 평양. 안학궁성 내 관청.
각부의 귀족들과 대신들이 한데 모여 선에 대한 처우에 대해 논의 중이다. 동부는 태왕을 능멸한 선을 극형에 처해야한다는 것이고, 서부는 선의 나이와 처지를 고려하여 용서해야한다는 입장이다. 남부와 북부는 여느 때처럼 중립이고 말이다.
“나이가 어리다하여 그 처지가 딱하다하여 대역 죄인을 용서한다면, 장차 이 나라의 기강이 어찌 되겠소. 모두가 다 보는 앞에서 태왕 폐하를 능멸한 죄를 물어, 극형에 처해야하오.”
“선이라는 아이의 발언이 다소 경솔하고 무례했던 건 사실이나...어찌 되었든 태왕 폐하께서 별 문제 삼지 않은 사안이오. 폐하께서도 문제 삼지 않은 일을 어찌 동부만 과민반응한단 말이오.”
“폐하께서 체면이 있어 그러신 게 아니오. 그런 건 우리가 알아서 처리해야하는 게 순리 아니겠소.”
“동부욕살의 말씀이 맞소. 폐하께서 체면이 있지, 어찌 고작 그런 일로 어린아이의 목숨을 앗아가겠소이까.”
명림고보는 자신의 말을 비틀어 되받아치는 아불보구가 못마땅할 따름이지만, 애써 아무렇지 않은 듯...
“폐하를 능멸하는 언사가 겨우 고작 그런 일이오? 서부욕살은 평소에 왕실의 권위를 어찌 생각했기에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게요!”
“왕실의 권위를 생각하신다는 분이 폐하께서 용서하신 아이를 구태여 죽이겠다는 것이오? 그대야 말로 진정 태왕의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인사가 아닌가!”
“뭐라! 폐하에게 정면으로 도전하는 인사?”
명림고보가 발끈하지만, 아불보구는 개의치 않고 남부와 북부의 입장을 묻는다. 남부와 북부는 동부와 서부가 합의한 대로 따라가겠다고 한다. 이에 아불보구가 다시금 명림고보에게...
“들으셨소이까? 이 사람을 비롯한 서부는 결단코 선이라는 아이를 죽일 수 없으니, 고집 피우시려거든 어디 마음대로 하시오.”
옆에 앉아있던 을연이 함께 거들며...
“지금 처리해야할 일이 산더미 같은데, 동부에서 고작 열네 살 아이의 목숨 빼앗는 일에 사활을 거니...참 나라의 녹을 받는 입장에서 백성들 볼 면목이 없소이다.”
이윽고 서부의 귀족과 대신들이 박장대소를 하며 비웃자, 동부에서 고성을 지르며 반발한다. 결국 동부와 서부가 서로에게 폭언과 삿대질을 하느라 난장판이 되고, 이런 상황 자체가 부끄러운 명림고보가 참다못해 탁상을 세게 내려친다. 그럼에도 조용해지지 않자, 미친 듯이 탁상을 내려치자 그제야 조용해진다. 이윽고 명림고보가...
“동부의 입장을...철회...하겠소.”
...라고 말하자 동부의 귀족과 대신들이 한숨을 내쉰다. 을연이 쌤통이라는 듯 명림고보를 바라본다.
...
고구려의 수도, 평양. 안학궁성 외각 시내.
아불보구와 을연의 가마가 나란히 지나간다. 부부가 가마의 소문을 열고 서로 활기차게 대화를 나눈다.
“부인. 아까 동부욕살 표정 보셨습니까?”
“못 봤을 리가 있겠습니까. 꿀 먹은 벙어리마냥 아무 말도 못하고.”
“동부욕살의 그런 우스꽝스러운 표정은 처음 봅니다.”
을연은 그간 동부의 귀족들과 대신들에게 희롱을 당해왔다. 사내놈이 늙은 여인한테 팔려갔다는 둥, 시집갔다는 둥, 빌붙어 산다는 둥. 그 때문인지 오늘 있었던 일을 몹시 통쾌해한다. 눈치 빠른 아불보구가 이를 못 알아차릴 리 없고 말이다. 아불보구가 을연을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고구려의 수도, 평양. 안학궁성 외각 관청.
오랜 시간 줄을 서서 기다렸던 선과 갈로맹광은 해질 무렵이 되어서야, 용무를 마치고 녹초가 되어 관청에서 빠져나온다.
“선. 집 다 지어지려면 보름 정도 걸릴 겁니다. 그동안 내 집에서 잡니다.”
선이 다소 경계하듯 갈로맹광을 위아래로 훑으며...
“방 몇 개인데요?”
“두 개입니다.”
“뭐...괜찮네요.”
“선. 그 눈빛 뭡니까?”
“내...내가 뭘요? 아...배고파...뭐 먹으러가요.”
선이 급히 주제를 돌리자 살짝 기분이 나쁘면서도, 마찬가지로 배가 고픈지라...
“나도 배고픕니다. 밥 먹으러 갑니다. 따라옵니다.”
...
귀화인이 운영하는 주막.
갈로맹광은 일전에 고거련이 알려준 주막으로 선을 데려왔다. 선이 눈이 휘둥그레져 주위를 살피는 동안, 갈로맹광이 주문을 한다.
“낫토. 2개 줍니다.”
“감사하므니다.”
선이 주문을 받고 돌아가는 주인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선. 낫토 맛있습니다. 먹어보면 빠져들 겁니다.”
“헌데...저 사람 말이 이상합니다.”
“왜국에서 귀화한 사람입니다.”
“왜국이 뭐예요?”
“바다 건너에 있습니다. 남동쪽 아래 있습니다.”
“바다 건너...남동쪽?”
무슨 말인지 모르지만 일단 이해하는 척부터 하는 선...
“나라에서 재물을 줬습니다. 그 돈으로 가게 차린 겁니다.”
“나라에서 재물을 줬다고요?”
“맞습니다. 재물 줍니다.”
“아무한테나 막 줘요?”
“귀화인만 줍니다. 딱 한 번 줍니다. 자리 잡으라고 주는 겁니다.”
“헌데...왜 저는 안 줘요? 저도 귀화인 대우라면서요?”
“집 다 지어지면 그 때 물어봅니다. 농사 지을 건지. 장사할 건지.”
“그에 걸맞게 재물을 주는 건가요?”
“선. 똑똑합니다.”
이때 주인이 낫토 두 접시를 가지고 와, 상 위에 올려놓는다. 그러고는...
“식사 나오셨스므니다.”
‘아무리 귀화인이라지만 식사 나오셨습니다...라니.’
웃겨죽겠는 선이 억지로 웃음을 참는다. 갈로맹광은 선의 그런 모습이 어처구니가 없어 웃기고 말이다.
주막 밖. 평양 시내 저잣거리.
갈로맹광이 계산을 하며 주인장과 대화를 나누는 동안, 선은 밖에 나와 평양의 아경을 바라본다. 화려한 빛깔과 수많은 볼거리, 지인과 연인, 그리고 가족과 함께 거리를 누비는 수많은 인파들의 따스한 정서가 그대로 느껴진다.
‘행복해 보인다...’
이때 평민계급으로 보이는 어린아이가 부모와 함께 선의 앞을 지나가는데...
“아버지. 저기에서 악사들이랑 광대들이 장대놀이한대요. 보러가요.”
“그래그래, 거기가 어디냐?”
어린아이가 부모의 손을 꼭 잡고 장대 놀이하는 곳으로 향한다.
‘다리 없는 우리 아버지가 나 먹여 살리려고 했던 게 장대놀인데...’
코끝이 매워진다. 이러다가는 또 울 것 같았는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웃음을 터뜨린다. 그러고는...
“인생 공평하네. 정말 공평해.”
...라는 반어법 섞인 말을 내뱉는 선. 이때 어디에선가 사내들의 수군거림이 들려 저도 모르게 귀를 쫑긋하는데, 아무래도 자길 뒷담화하는 것 같아 얼굴을 찌푸린다.
“쟤라며? 연나라에서 도망친 애.”
“응. 싹수가 더러운 계집아이야.”
“저 년이 다들 보는 앞에서 태왕 폐하를 망신을 줬다지 뭐야.”
“뭐라고 했는데?”
“지켜만 보는 사람이래. 겁쟁이라는 거지.”
“아이고...간도 큰 년이네...”
“헌데...겁쟁이는 맞잖아? 오죽하면 조공태왕, 선물태왕, 구걸태왕...이렇게 불리겠어. 선대이신 광개토태왕 명성에 먹칠을 하는 거지.”
유연·북위·송나라와의 평화를 위해, 그들을 상국으로 예우하며 조공하는 고거련을 조롱하는 것이다.
“이 인간아! 폐하께서 자존심 구기고 조공하면서 평화를 유지하니까, 자네가 자네 아들 혼인하는 것도 보고 그러는 거야.”
“그런...가?”
“불쌍한 처지 받아줬으면 감사한 줄 알아야지, 어느 안전이라고 감히 태왕 폐하께 함부로 지껄여?”
“나보고 한 말이야?”
“너 말고, 저 계집애.”
‘이 자식들이 보자보자 하니까!’ 순간 울화가 치밀어 오른 선이지만...그렇다고 무작정 다가가서 주먹을 내지를 순 없었다. 그건 자신에게 ‘새로운 삶’이라는 기회를 주기 위해 본인을 희생한 부모에 대한 모욕이니까. 하여 화를 억누르려고 애를 쓴다. 근데...
“나는 저년이 불쌍한 지도 모르겠어. 그냥 죄 짓고 도망친 개 잡것일지 누가 알아?”
“진짜 고구려인 포로후손인지, 연나라 연놈들인지 우린 모르는 거지.”
“솔직한 심정으로 연나라가 그렇게 살기가 힘들면...태왕 폐하께 지켜만 보는 사람이라고 지껄였던 겁 대가리로 들고 일어나 싸울 것이지 왜 도망을 쳐? 우리 폐하는 만만하고, 연나라 왕은 엄청 무서운 가보지?”
‘잘 알지도 못하는 것들이!’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선이 그들에게 다가가 일행 중 한 명의 멱살을 잡는다. 그리고...
“편안하게 개돼지처럼 산 주제에 뭐 어쩌고 어째?”
“이년이? 놔! 안 놔?”
“재주껏 풀어보든가. 이 개자식아.”
사내가 멱살 잡은 선의 손을 풀려고 하지만, 역부족인 모양인지 낑낑거리기만 할뿐이다. 한편 지나가던 행인들이 발걸음을 멈추고 몰려들어 구경하기 시작한다.
“당신 가장 맨 앞에서 적과 싸워본 적 있어? 사람 죽여 봤어? 아니 칼이라도 잡아봤냐?”
“네가 고구려 군사훈련을 알아? 너 같이 훈련도 안 된 계집년들이 전쟁에 나가니까 연나라가 그 모양이지. 그래놓고 꼴에 유세부리기는...”
이성을 잃은 선이 먼저 주먹을 날린다. 이윽고 싸움은 일행들에게도 번진다. 한바탕 난투극이 벌어진다. 행인들 중 말리는 사람이 하나둘씩 생기는 가운데, 뒤늦게 선이 싸우고 있는 걸 발견한 갈로맹광이 서둘러 밖으로 다툼을 말린다. 사내들은 갈로맹광을 알아차리고 서둘러 몸을 사리는데, 선은 갈로맹광이 그러거나 말거나...
“놔요! 놔보라니까요!”
“선. 이러면 안 됩니다. 싸우면 안 됩니다.”
“놔보라니까요!”
“선. 그만 합니다! 상대도 그만하질 않습니까.”
“쟤네들이 그만하면 나도 그만 해야 하나요? 빨리 비켜요, 비켜!”
“선 안 됩니다.”
“비키라고 이 깜둥이 새끼야!”
“선. 지금 제정신입니까!”
격노한 갈로맹광의 일갈이 시내를 가득 메울 지경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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