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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은 너무도 놀라 딸꾹질만 연거푸 할 따름인데...갈로맹광이 그토록 화가 난걸 처음 봤기 때문이다.
“고구려에서는 안 됩니다! 피부색으로 상대 모욕하는 거. 옥에 처박힙니다.”
“아...아니...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말 됩니다! 뭐가 말이 안 된다는 겁니까?”
선은 다시금 고성을 지르는 갈로맹광에게 또 다시 놀라 재차 딸꾹질을 한다.
“또 당신들! 선이랑 싸우는 거 봤습니다. 당신들도 옥에 처박힙니다.”
사내들이 내빼려고 하자...
“혹여라도 도망칠 생각 하지 않습니다. 내가 반드시 잡을 겁니다.”
고구려에서 갈로맹광의 무공과 체력을 모르는 자는 아무도 없기에...상황은 순식간에 정리된다. 선과 사내들이 갈로맹광의 인솔 하에 옥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
선이 옥에 갇혔다는 소식이 고거련에게도 전해진다. 오전에 있었던 일 때문에 하루 종일 부채의식에 시달려 괴로웠던 그에게 있어, 선이 소동을 일으키고 주먹다짐을 벌이다가 옥에 갇혔다는 소식은 너무도 뼈아픈 것이었다.
“아무래도 적응하는데 시일이 좀 걸리지 않겠사옵니까? 허니 너무 심려치 마시옵소서. 폐하.”
마침 함께 술을 마시고 있던 우중려로부터 위로 섞인 말을 전해 듣지만 그리 큰 힘이 되진 못한다. 애시 당초에 태왕과 신하가 짊어져야할 책임감이 다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이리 참담한 심정인 것은, 이번 일이 비단 선에게만 국한되는 문제가 아닐 것 같다는 초조함이 들었기 때문이다.
“짐이 우려스러운 것은...”
추후에 고구려의 일원이 될 수많은 고구려인 포로후손들이, 억하심정을 품고 고구려 문화에 융화되기를 기피하며 많은 사회적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겠다는 불안감 말이다. 아니면 반대로 고구려인 포로후손들에게 선입견을 갖고 시비를 거는 백성들 때문에 갈등이 심화될 수도 있고.
“짐의 예상했던 수준을 아득히 넘어설 것 같소. 서둘러 방안을 마련해야하겠소이다.”
“분부 받잡겠사옵니다. 폐하.”
고구려의 수도, 평양 내 형옥(감옥).
평양에 많은 백성이 살고 있지만, 형옥은 비교적 널널한 편에 속한다. 흉악한 죄인은 진압과정에서 불구가 되거나 노역장에 끌려가고, 가벼운 죄인은 그 수가 적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사내와 여인은 분리해서 가둬두고 있다. 혹시 모를 불상사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선도 여인들이 갇혀 있는 곳에서 좀 전에 있었던 일을 곱씹고 있다.
“피부색가지고 뭐라고 하면 옥에 갇힌다고? 이게 말이 돼?”
옆에 있던 여인 죄수가...
“야...뭘 자꾸 구시렁거려 시끄럽게!”
하지만 생사의 갈림길에서 수없이 살아남아왔던 선이 고작 어설픈 죄수 따위에게 겁먹을 리 없고...
“시끄러우면 귀 막고 있던가.”
“이 쪼끄만 게 어디서 까불어?”
“사람은 말이야. 크던 작던 죽는 건 매한가지야.”
“뭐...뭐라는...거야...”
“너...사람 죽여 봤어?”
“꼬...꼬맹이...너는? 너는 죽여 봤어?”
“나는 죽여 봤어. 응? 응? 응?”
선이 한발자국, 또 한 발자국 다가간다. 죄수는 겁을 집어먹고 뒷걸음질치고 말이다. 그 모습을 보고 비웃음을 흘리는 선이다.
“까불지 말고 잠이나 자.”
이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제법 무게감이 있는 발걸음소리가 들려온다. 바로 갈로맹광이다.
“선. 반성하고 있습니까?”
“반성은 무슨...”
갈로맹광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선은 둘 중 하나입니다. 바보이거나 고집불통이거나.”
“뭐 바보? 지금 말 다하셨습니까?”
“원래 바보가 바보라는 말 가장 싫어합니다.”
“장군!”
갈로맹광이 농담은 이쯤 하고 진지하게...
“선.”
“왜요!”
“고구려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삽니다.”
“헌데...요?”
“그들 모두 다릅니다. 피부색도, 생김새도, 말도, 생활양식도 다 다릅니다. 헌데도 우리 모두 뭉칩니다. 하나의 기치 아래로.”
“그게 뭔데요?”
“고구려.”
“장군은 고구려가 그리도 좋습니까?”
“사랑합니다. 내 나라니까.”
태어나서 단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던 것, 내 나라. 하지만 눈앞의 갈로맹광은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내 나라를 사랑한다고 말한다. 그게 너무도 샘이 나는 선이지만...한편으로는 부러울 따름이다. 소속감은 인간의 주요한 본능 중 하나니까.
“내 나라 고구려의 화합을 깨는 행위. 절대 못 참습니다. 알겠습니까?”
선이 자존심 때문인지 대답을 안 하자...
“나...선한테 알겠냐고 물었습니다.”
“알겠습니다...”
“선은 옥에 열닷새(15일) 있을 겁니다. 그땐 집도 다 지어졌을 겁니다.”
“열닷새씩이나요?”
갈로맹광이 어이가 없는 듯...
“선. 지금...씩이나 라고 합니다. 맞습니까?”
“제가...뭐...못할 말이라도 했습니까?”
갈로맹광이 한숨을 내쉬며...
“선, 정신 차리려면 멀었습니다.”
갈로맹광이 뒤돌아 걸어 밖으로 나간다.
“장군! 꼭 열닷새까지 있어야 합니까? 장군! 장군!”
하지만 갈로맹광은 대답 없이 밖으로 나가버린다. 이에 선은 한숨을 내쉬고 바닥에 주저앉는다. 그러고는 무심결에...
“열닷새 동안 뭐하고 버티나...”
...라고 내뱉는데, 그 순간 뒤통수를 한 대 세게 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는다. 부모의 양보와 희생으로 얻은 새 삶인데, 벌써부터 초심을 잃고 기껏 한다는 소리가...
‘뭐하고 버티나...라니. 미친 거 아니야?’
살아온 나날들이 주마등처럼 흘러지나간다. 수많은 생사의 갈림길의 순간들 말이다. 이윽고 자신의 뺨을 세게 때린다. 연이어 때린다. 미친 듯이 때린다. 어느덧 양 볼이 부풀어 오를 때 쯤...
“뭐라도 해야겠어.”
맨바닥에서 운동하기 시작한다. 팔운동, 다리운동 가릴 것 없이 열심히 한다. 몸에서 열이 나고, 땀이 흐르고, 점점 힘에 부치는 팔다리가 파르르 떨리지만...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라며 스스로를 다잡는다. 매섭게 채찍질한다. 형옥 안에 갇혀 있다고 해서 시간을 허투루 쓴다면, 그건 비겁한 자기변명일 뿐이니까.
북위.
근간 세력인 탁발 성씨의 선비족과 다른 북방민족들에게서 탑가치 혹은 타브가치로 불리며, 중국식으로는 위나라 혹은 대위국으로 불린다. 북위는 동명(同名)의 국가와의 구별을 위해 훗날의 역사가들이 칭한 이름이다.
수많은 북방 유목민족 중 하나에 불과했던 탁발 선비족은 386년 북위를 건국하고 서서히 자리매김하더니, 탁발도가 세 번 째 황제가 되고부터 완벽한 욱일승천의 기세를 달리고 있다. 중원의 패자로서 북쪽으론 유목국가인 유연을 압도하고, 남쪽으로는 한족국가인 송나라와 막상막하의 구도를 펼치고 있다.
탁발도는 본격적으로 유연과 송나라에 군사력을 투사하기 전에, 골칫거리 하나를 제거해야만 한다. 바로 북연 말이다. 영토 확장과 후환 제거는 물론이요, 선비 통합이라는 상징성을 위해서라도 말이다. 북연의 황족이 풍씨인 한족으로 바뀌었다고는 하나, 여전히 대다수의 선비족이 상, 하층부 모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으니까.
...
북위의 수도, 평성.
“이부지부사 고필은 들으라.”
“말씀하시옵소서. 황제 폐하.”
“그대에게 정예 5만을 줄 터이니, 백랑성과 용성을 점령하고 연왕 풍홍을 산채로 잡아 와라! 내 이번에야말로 연을 완전히 복속할 것이다.”
“신 이부지부사 고필. 기필코 명을 수행하겠나이다.”
탁발도가 고필을 지그시 내려다보며...
“비록 그대의 연배가 이립(서른 살)도 채 되질 않으나...충성하기는 촉한의 강백약(강유)못지않고, 용맹하기는 초패왕(항우)에 버금가며, 영민하기는 한나라를 설계한 장자방(장량)을 넘어서니 이리 중책을 맡기는 것이다. 그 무게를 절대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알겠느냐?”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탁발도가 다른 신하들에게도 명을 내리는데...
“짐의 번국(신하의 나라), 고구려에 국서를 보내도록 하라. 만일 고구려가 개입하여 연을 도운다면, 짐이 직접 60만 대군을 이끌고 나아가 평양을 불바다로 만들겠다고 말이다. 알겠느냐?”
“예, 폐하.”
고구려와 북위의 관계는 실로 오묘하다. 양국 간에 단 한 번도 전쟁이 일어난 적 없다. 심지어 국지전조차 없었다. 하지만 상하관계는 정해졌다. 고구려의 태왕 고거련이 북위에게 조공을 바치며 상국의 예를 다하기 때문이다. 영토의 크기로 보나, 백성의 머릿수로 보나, 문물의 질적 차이로 보나 북위의 국력이 더 강한 것은 분명한 사실.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고거련이 이번 탁발도의 명을 따를 가능성은 없다. 오랜 세월 북연을 흡수 통일할 생각을 하고 있던 그가 순순히 포기할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고구려가 북위와 전쟁을 해야 하는 상황이 올 것이다. 그건 고구려에게도 막대한 피해가 끼치는 일이다.
과연 고구려와 북위의 관계는 어찌 될 것인가. 고구려가 북연을 포기할 것인가, 북위가 북연을 포기할 것인가. 아니면 둘 다 포기하지 않고 결국 전쟁을 하여 양국 모두 파국으로 치닫게 될 것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전쟁을 하지 않고도 양국 모두 이득을 볼 수 있는 새로운 방안을 모색할 것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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