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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밤까지 힘쓰고 곯아 떨어졌던 선은 병사들의 외침과 함께 잠에서 깨어난다. 그리고 다른 죄수들과 함께 마당으로 모이는데. 각기 싸리 빗자루 하나씩 건네받고 마당청소를 한다.
“몸 푼다고 생각하고 부지런히 하거라. 이따가 농터에서 땀 흘리려면 적지 않게 힘이 들 터이니.”
‘농지에서 땀을 흘린다고? 이게 무슨 소리지?’
청소를 마친 후 주먹밥으로 조반(早飯)을 해결한 선과 죄수들은 병사들의 인솔과 함께 평양 인근 농터로 향한다. 이윽고 농터에 도착한 그들은 본격적으로 농부들의 일을 돕기 시작한다. 나라차원에서 죄수들을 각종 노역에 활용하는데, 그중 하나인 것이다.
“젠장...이렇게 몸 쓰는 일 할 줄 알았으면 어제 그냥 자는 거였는데...”
아직 4월 말이라 날씨가 덥지 않아 그나마 다행이지만, 농사일은 실로 전쟁과도 같은 고된 강도의 노동이다. 선이 땀을 비 오듯 흘린다.
“새참 좀 먹고 해!”
어느덧 시간이 네 식경 정도 지나자, 농부들이 새참거릴 잔뜩 가지고 온 모양이다. 참외랑 주먹밥. 선을 비롯한 죄수들이 병사들의 감시를 받으며 간만에 휴식을 취한다.
‘하...죽는 줄 알았네.’
선이 참외를 우걱우걱 씹어 먹는데, 노부부가 옆에 앉더니...
“힘들지?”
“네...할아버지.”
“그니까 다음부터는 죄 짓지 말고 착하게 살아야 돼. 알았지?”
‘뭐? 착하게 살아야 돼? 이 할아버지. 약 올리시는 것도 아니고...’
할아버지의 말이 오지랖처럼 느껴져 살짝 짜증이 난 선이 속으로 흉을 보는데. 그러한 마음이 고스란히 그녀의 얼굴에 드러났는지, 옆에 있던 할머니가...
“영감도 주책은...저 애 표정 변하는 것 좀 보고 잔소리를 하든 말든 해요.”
“뭐야. 이 할애비 말이 귀찮아?”
“그...그...그럴 리가요. 당연히 죄 짓지 말고 살아야하죠.”
‘귀신같은 할머니...’ 겨우 속내를 들키지 않은 선이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
노역을 마치고 다시 형옥으로 돌아온 선은 들입다 대자로 누워 천장을 바라보는데...
“편한데...답답하다.”
가슴이 뻥 트이는 농터에서 고된 시간을 보내고 왔는데, 막상 몸 편히 누워서 쉬게 되니 사방이 막혀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다른 죄수들과의 기선제압에 성공해서 공간을 여유롭게 쓸 수 있다는 것. 그러나 형옥은 역시나 답답함을 수반하는 장소다.
“에이치!”
날씨가 건조해서 그런지 거리의 꽃가루 때문인지, 목이 간질간질하고 기침이 나온다. 아무래도 어제 밤에 무리해서 운동을 한데다가, 농사까지 해서 몸이 피로한가보다.
“오늘은 빨리 잠이나 자야겠다.”
근데 옆에 죄수가...
“지금 자면 안 돼.”
“왜?”
“관리들이 저녁마다 서책을 읽어주거든.”
“웬 서책?”
교화의 밤이라고, 매일 저녁마다 죄수들을 마당에 모아놓고 좋은 서책이나, 성현들의 좋은 글귀를 읽어준다고 한다.
“어젠 안 했잖아?”
“네가 밤늦게 들어왔잖아.”
“아...그나저나 고구려에서는 별걸 다 하네?”
결국 때가 되어 관리들이 죄수들을 호출하자, 선은 피곤한 몸을 이끌고 밖으로 나간다.
...
병사들의 삼엄한 경계와 감시 하에, 선은 죄수들과 함께 낭독 시간을 기다리는데...
“뭐라? 그게 사실이냐!”
“예...나리.”
관리들이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걸 보고는 선이...
“왜 저래...그나저나 언제 한다는 거야. 대충 듣고 빨리 자고 싶은데.”
...라며 혼잣말을 내뱉는다. 잠시 후 관리들이 호들갑을 떨었던 이유가 밝혀지는데...
“태왕 폐하 납시오.”
‘뭐? 태왕이 왔다고?’
고거련이 내관과 궁녀를 비롯한 수행원들과 함께 모습을 드러낸다. 죄수들이 바닥에 바짝 엎드려 ‘태왕 폐하’를 외치자, 선도 얼떨결에 따라는 하지만...
‘뭐야...왜 온 거야, 여기.’
“콜록콜록!”
선이 기침을 하자 고거련의 시선이 잠시 그녀에게로 향하다가, 다시 모든 죄수들을 바라보며...
“모두들 저녁밥은 먹었느냐?”
“예...폐하.”
‘웬 밥 타령?’
제대로 살겠다고 다짐한 선이지만, 여전히 고거련을 위선자라고 생각하기에 그의 모든 행동이 못마땅할 따름이다.
“내 오늘 형옥으로 온 것은 짐이 직접 교화의 밤을 주관하기 위해서다. 자네들에게 알려주고 싶은 글귀가 있어서 말이야.”
이윽고 고거련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향하자...
‘왜 날보고 저런 얘길...’
선이 애써 시선을 피한다. 한편 고거련이 내관으로부터 ‘맹자’를 건네받고는 서책을 펼치더니 낭독을 시작한다.
“맹자께서 말씀하시길, 하늘이 어떤 사람에게 장차 큰일을 맡길 때에는 먼저 마음을 괴롭히고, 몸을 망가뜨리며, 가진 것을 남김없이 불태운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그가 해야 할 일을 자꾸 어긋나게 만듦이리라. 이로써 마음을 분발케 하고 인내심을 강하게 하여, 실패한 것 보다 더 많은 것을 이룰 것이라고 하였다.”
고거련이 서책을 덮는다. 그리고 덧붙여 말하길...
“삶이 고되면 분명 어긋난 길로 빠지고 싶은 욕망이 들기 마련이다. 허나 진정으로 어긋나는 순간 하늘의 뜻을 이루기는 더욱 더 요원해진다. 좋은 사람들이 곁에서 떠나고, 하여 좋은 일이 생길 기회가 사라지니 어찌 하늘의 뜻에 다다를 수 있겠느냐. 허니 언제나 마음을 닦고 수양해야 하느니라. 알겠느냐?”
태왕의 이야기를 묵묵히 듣고만 있던 선이 문득 손을 들고 말하길...
“콜록콜록. 소인. 태왕 폐하께 한 가지 여쭈어 올려도 되겠나이까?”
궁중 수행원들과 형옥 관리들이 당황해하지만 고거련은 개의치 않으며 수긍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인다.
“폐하께서도 아시다시피 소인은 연나라에서 살았습니다.”
“그래...안다.”
“콜록콜록. 연나라에서 살았을 때 벗이 있었나이다. 저와 같은 고구려인 포로후손이었고, 이름은 억새였사옵니다. 한 번 보고 들으면 모든 걸 외워버리는 놈이었습니다.”
“똘똘한 녀석이었구나.”
“맞습니다. 똘똘한 녀석이었죠. 헌데 그뿐이게요? 힘도 세서 싸움도 잘했고, 효심은 또 얼마나 갸륵한지, 부모가 몸져 누우니까 자신의 약지를 깨물어 피를 먹였습니다.”
“너희들의 자랑이었겠구나.”
“맞습니다. 헌데 자랑이면 뭐하겠습니까. 콜록콜록. 전쟁터에서 두 동강이 나 죽었는걸요.”
고거련의 동공이 흔들린다.
“방금 전 훗날을 위해 시련을 주는 거라고 하셨지요. 콜록콜록.”
“그래...내 그리 말했다.”
선이 비웃으며...
“아무리 생각해도 말입니다. 아무리 참으려 해도 말입니다. 비웃음을 멈출 수가 없습니다. 콜록콜록. 그 맹자라는 인간, 참으로 실없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콜록콜록.”
얼핏 맹자를 비웃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질적으로 고거련을 비웃고 있음이리라. 그래, 선은 어제와 마찬가지로 또 다시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태왕에게 망신을 준 것이다.
사람 성격 쉽사리 안 변한다고, 고거련의 말이 아무리 위선처럼 느껴진다 할지라도 신분제 사회에서는 참으면 참을수록 오래 사는 법이거늘. 감정조절이 안 될 때마다 후회하면서도 같은 상황이 오면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걸 보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유년기를 생명경시가 일상화된 북연에서 자란 탓이라 하겠다. 목숨이 소중한 걸 모르니 함부로 객기를 부린다는 뜻이다. 근데 만약 그것도 아니라면 말이다.
‘당신이 그렇게 고결하고 완전무결한 존재라면 내가 이렇게 당신의 화를 돋우어도, 절대 나를 죽여선 아니 되는 거잖아? 왜, 화나? 열 받아? 그럼 죽여 보던가. 죽여 보던가!’
...라며 투정어린 생떼를 부리는 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고거련은 선이 생각하는 그 이상으로 그릇이 큰 사람이다. 선이 아무리 버르장머리 없게 굴어도, 고거련에게는 그저 불쌍한 고구려인 포로후손일 뿐이다. 게다가 어른이 되어가지고, 최고 권력자인 태왕이 되어가지고 어리고 불쌍한 백성의 도발에 넘어가 함부로 사법권을 남발한다면, 그것만큼 본인이 초라한 권력자라는 걸 스스로 입증하는 것도 없을 것이고 말이다.
“그래...너의 말도 옳구나. 미안하다.”
‘뭐? 미안하다고?’
“내 할 말은 끝이 났으니, 이만 그만 궁으로 돌아가겠다.”
고거련이 궁중 수행원들과 함께 안학궁성으로 돌아간다. 힘없이 돌아가는 태왕의 모습에서 쓸쓸한 감정이 전해져서 일까? 선은 어제 망신을 줄때는 겁이 나면서도 나름 통쾌한 감정이 들었는데, 오늘은 왠지 모르게 뒷맛이 개운치가 않다.
“아...몰라...몸도 안 좋은데, 빨리 들어가서 잠이나 자야지.”
...
형옥 안.
잠들만 하면 나오는 기침 때문인지 선은 몸은 피곤한데 쉽사리 잠에 들지 못한다. 이때 보초 한 명이 물이 가득 담긴 나무통을 들고 오더니, 바닥 곳곳에 물을 뿌린다.
“뭐하세요?”
“넌 안자고 뭐해, 꼴통!”
“제가 왜 꼴통이에요?”
“죄수 주제 감히 태왕 폐하께 대들었으니 꼴통이지.”
“참나...그나저나 진짜 뭐하시는 건데요? 콜록콜록. 바닥에 왜 물을...”
“너 같은 꼴통들도 고뿔 걸리지 말라고 바닥에 물 뿌리는 거다. 건조하지 말라고.”
“누가 시켰는데요?”
“태왕 폐하.”
“설마...”
“설마는 무슨. 얼른 잠이나 자. 내일 또 일해야 하니까.”
물을 다 뿌렸는지 보초가 밖으로 나간다. 가뜩이나 심란했던 선의 마음은 더욱 더 뒤숭숭해질 따름이다.
...
한편 안학궁으로 돌아가는 고거련의 마음도 심란한 건 마찬가지다. 선의 마음을 얻고 싶었다. 그래서 나랏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바쁜 와중에도 교화의 밤을 준비했다. 사정이 어찌되었든 잘못을 저질러 형옥에 갇힌 건 맞으니, 태왕인 자신이 직접 나서서 좋게 타이르면서도 위로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역효과만 살 따름이다.
‘맹자의 글귀가 선이 살아온 삶에 부합하지 않은 게 문제인 걸까. 아니면 애당초에 나를 위선자로 보고 있는 아이에게 뭔가를 가르치려고 했던 태도 자체가 문제인 걸까.’
고거련은 좀 더 선의 입장에서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과연 그녀에게 가장 결핍된 요소는 무엇일지를 떠올렸다. 자신에게 가장 요구하고 싶은 게 무엇일지를 고민했다. 마침내 안학궁에 도착해서야 생각이 났다. 선이 가장 필요로 하는 건, 용성에 납두고 온 가족이라는 걸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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