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남들의 세계사(이기호,민음사)

 이 책을 선택할 때 제목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작가 이기호'에 매료돼 그의 책을 찾아 나선만큼 내 손에 들어온건 예정된 일이었다.

그럼에도 제목은 상상력을 자극했다.

 자식을 셋 이상 낳던 시절에 차남은 독특한 위상을 가졌다.

그때는 죄다 어려운 형편이어서 선택과 집중이 필요했다.

장남은 집안을 일으킬 기대주로 선발돼 수혜를 독점했다.(물론 장남의 희생설화도 널려 있긴 하다)

막내는 사랑을 독점했다.

그래서 이 땅의 막내들은 철이 없었다.

 차남은 애매했다.

수혜도 사랑도 어중간해서 자못 시니컬해졌다.

B형 타입이라고나 할까.

실제 차남들은 B급 인생사를 써내려간 경우가 많았다.

 고향과 성장 배경을 소환하지 않는 작가는 없다.

그것들은 작가의 정체성 기저에 단단하게 응고돼 있는데,소가 되새김질을 하듯 틈틈이 작품에 녹여 내놓는다.

작가의 자양분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차남들의 세계사>는 작가가 10살 무렵,고향인 원주에서 실재했던 시국사건을 기둥삼아 창작한 희비극이다.

희비극이라면 때로 웃기도 해야 되는데 당최 웃을 수가 없다.그러므로 이 소설의 메세지는 바로 그 지점에 있다.

 1982년 일군의 부산 지역 대학생들이 부산 미국 문화원을 방화한다.

이른바 '부미방 사건'이다.

광주학살과 전두환 정권에 대한 미국의 승인과 지지를 규탄한 것이다.

부미방 사건은 '미국은 혈맹'이라는 우리 국민의 인식에 충격적인 균열을 일으켰다.

80년대 반미운동의 시발점이었다.

 사건의 주모자들은 천주교 원주 교구청으로 피신했다.

당국은 대대적인 검거작전을 벌인다.

범인들을 3일간 숨겨줬다가 자수시킨 신부도 예외는 아니었다.

당연한 수순으로 권력을 떠받히는 직할조직 안기부(현,국정원)이 참전하면서 이 사건은 희비극이 됐다.

 그들의 무기는 딱 하나,고문이었다.

그거면 충분했다.

그들은 성당의 보일러 수리공도 북한의 지령을 받은 빨갱이로 만들어 구속하는 신공을 선보였다.

그 시절은 그랬다.안기부가 찍으면 보통사람 누구도 빨갱이를 면할 수가 없었다.

 이기호는 그 시절을 풍자할 대표선수로 '나복만'을 투입한다.

나복만은 택시운전사다.

'택시 운전사'는 세상을 읽는 표상이다.

광주항쟁을 증거하는 영화 '택시 운전사'는 1200만명 넘게 봤다.

 그러나 우리의 주인공 나복만은 그 정도는 아니다.

도로 교통법을 너무 잘 지켜 기름은 많이 쓰지만 사납금은 못채우는 무능하고 순진한 사람이다.

글을 읽을 줄도 쓸 줄도 모른다.

이런 그가 안기부 원주지부 지하실에 끌려 들어갔다.

 고문 기술자들은 놀랍게도 그를 평양에 잠입,노동당 입당을 한 입지전적인 인물로 재구성한다.

속절없이 당하던 나복만은 자신이 세상을 보는 시선,그 가치의 진실성을 깨닫는다.

다르게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렇게 이해했다.

 그는 자신이 생각해 낼 수 있는 최대치의 방법으로 저항한다.

 이기호는 천상 이야기꾼이다.

재기발랄한 그의 필체는 때로 너무 현란해 어지러울 정도지만 그 즈음이면 또 어김없이 중심을 잡아낸다.

귀한 작가다.

 <차남들의 세계사>의 차남 개념은 성경에서 차용했다.

'카인과 아벨'. 인류 최초의 살인자인 장남 카인,그리고 그에게 죽임을 당한 차남 아벨.

그러니까 <차남들의 세계사>는 <아벨들의 세계사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