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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도성, 도평의사사(도당).
원나라, 여진족, 홍건적, 왜구의 침입으로부터 전조 고려를 지켜냈던 신장(神將). 하지만 자신이 지켜낸 나라를 무너뜨린 역적(逆賊). 그리고 군왕(君王). 이제는 어느덧 예순을 훌쩍 넘어버린 나이 탓인지, 본인이 권력을 잡으려했던 초심보다 권력 그 자체를 사랑하게 된 욕망의 화신(禍神). 여러 정체성이 혼합된 그의 정체는 태조 이성계이다. 그를 중심으로 방원과 도전, 남현과 하륜, 심씨 일가 그밖에 모든 재상들이 탁상에 둘러앉아 있다.
탁자 위엔 커다란 지도가 펼쳐져 있는데...대륙의 통일왕국 명(明)과 조선(朝鮮), 요동에 부족단위로 퍼져있는 여진(女眞)이 그려져 있다.
요하(랴오허 강)를 기준으로 요서와 요동이 분리되어 있는데, 요서의 중심에는 ‘연왕 주체’, 요동의 중심에는 ‘요동 총병관 양문’이라고 적혀있다. 도전의 최측근이자 조선의 3인자 남현이 전황을 설명한다.
“(요서를 가리키며) 연왕 주체. 명의 초대 황제 주원장의 넷째 아들로서, 세작들의 정보에 의하면 앞으로 보름 후에...
(명의 수도를 가리키며) 명의 수도 남경을 칠 것입니다.”
보수파 하륜이 남현의 확신에 의문을 제기한다.
“어찌 그리 확신하십니까?”
“개국의 공이 황자들 중 단연 으뜸이나, 첫째 형에게 치이고 이제는 황위에 오른 조카의 눈치를 보는 신세가 되었으니...그 심정이...그 울화가...오죽하겠나이까.”
남현이 한 말이 아니다. 자신의 처지가 공교롭게도 연왕 주체와 놀랍도록 흡사한 방원이 한 말이다. 그의 진심어린 한마디에 도당의 분위기가 냉각되는데, 남현이 침묵을 깨고 말을 이어나간다.
“해서 우리의 요동정벌 출정일이 연왕의 남경정벌 출정일이 되는 것이오.”
“허나 요동엔 명의 10만 대군이 상비 중이질 않소이까? 더욱이 그자들은 연왕의 소속이 아니올시다.”
“요동 인근에 넓게 퍼져있는 여진과 힘을 합칠 것이오.”
“어째서?”
“그들은 주상전하를 하늘이 내린 장수라고 여기는 자들이니까.”
도전이 남현의 말을 거들며 말을 이어나간다.
“이미 대다수가 우리와 협조하기로 약조하였소. 가능성은 2할과 3할의 가운데 즈음.”
‘2할과 3할의 가운데 즈음이라...’
너무나도 애매한 가능성 때문에 도당에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성계가 넌지시 방원을 떠본다.
“정안군. 네가 가장 먼저 요동에 깃발을 꽂는다면, 혹여 세자자리가 바뀔 수도 있질 않겠느냐?”
방원의 마음이 요동친다. 도전이 굳은 얼굴로 성계를 바라본다.
“어찌 과인의 말에 답이 없느냐.”
“...”
“왜, 자신 없느냐?”
방원의 시선이 흔들린다. 성계가 비웃음을 흘린다.
“자신 없는 게로구나.”
‘마음에 들지 않아. 저 목소리. 저 표정.’
방원
“요동에 다녀와야겠습니다. 나흘만 말미를 주시옵소서.”
도전
“그럴 시간이 없습니다!”
“밤을 새워 달리겠소이다!”
정적이 흐르는 가운데, 성계가 방원과 도전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이윽고 미소를 머금으며 윤허한다. 방원과 도전 모두 서로에게 속마음을 숨긴 채, 서로를 바라본다.
도전의 사가. 앞마당.
사대부의 기품이 서린 삼봉 정도전의 청색빛깔의 아담한 기와집. 대청마루에 걸터앉은 도전은 각기병 때문에 저린 손과 팔뚝, 발과 다리를 주무르며 밤하늘의 달을 바라본다. 주간에 방원이 했던 말들이 그의 머릿속을 맴돌며 사라지지 않아, 심란해진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서다.
‘스승님...이 고철덩어리가 뭔지 아십니까? 임신년(1392년) 4월(巳月). 당신을 천민의 자식이라 모함하고, 옥에 가두고 죽이려했던 포은 정몽주를...백주에 저잣거리에서 때려죽인 철퇴입니다. 당신을...지키기 위해.’
도전의 얼굴표정이 미묘하게 뒤틀린다.
‘나라를 위태롭게 하는 권신에게, 그리 하면 아니 되는 것입니까?’
이윽고 도전의 표정이 서서히 의미심장하게 바뀐다.
“네 곁에 기생하는 골칫거리를 제거해주마. 일단...그 거머리 같은 하륜부터.”
요동으로 가는 여정...
방원은 초복과 말복에게 안 사람과 자식을 맡기고, 무령과 함께 말을 달려 전속력으로 질주한다. 아무리 세자 위가 욕심이 난다해도, 나라와 백성들의 안위가 걸린 문제를 안일하게 결정할 수는 없는 노릇. 직접 보고 와야 직성이라도 풀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밤낮으로 말을 달리고, 역참에서 말을 갈아타고, 그러면서 농터에서 사내들 없이 고생하는 여인들의 피땀과 한탄 섞인 욕지거리도 듣고, 사공의 힘을 빌려 압록수를 건너 어느 덧 요동 인근에 도달한다. 그러다 피곤에 절어 저도 모르게 말 위에서 잠에 빠진 방원의 꿈속에는...
드넓은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그의 옆에는 도전이 있고 말이다. 근데 이게 웬일인지, 도전이 방원에게 악수를 건네는 것이 아닌가.
“함께 합시다. 정안군의 정의를 위해.”
‘함께...하자고? 갑자기 무슨 수작이지?’ 도당에서 살벌하게 설전을 벌이고 난 터라 작금의 상황이 너무나도 말도 안 되었지만, 허나...방원은 매몰차게 내칠 수 없었다. 새파란 바다의 상쾌한 파도 소리, 오감을 강하게 일깨우는 짜릿한 바다내음, 무엇보다도 자신을 반기는 옛 스승의 진심어린 표정이 그의 가슴을 격정이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는데...잡고 싶어. 저 손.’
방원이 도전의 손을 잡으려는 순간...
“도련님!”
방원은 기묘한 꿈속에서 깨어난다.
“잠시...기청하셔야겠습니다.”
무령이 말 위에서 내려 엎드린 채 산 밑을 바라본다. 방원도 정신을 차린 후 말에서 내려 무령의 옆으로 향한다.
“저...저게 뭐야.”
“명의 정예군인 듯싶습니다.”
산 밑 분지에 명의 10만 대군이 ‘대명(大明)’, ‘요동도 지휘사사(遼東都 指揮使司)’, ‘요동 총병관 양문(遼東總兵官 楊文)’이 적힌 군기(軍旗)와 함께 행군 중이다. 개마기병, 경기병, 장창병, 도수부, 궁수, 기타 등등. 다양한 병과를 지닌 명의 대군에 방원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이건...”
이때 갑자기...
“쾅! 콰쾅! 콰콰쾅! 콰콰콰쾅! 콰콰콰콰쾅!”
천지를 뒤흔드는 굉음. 수십여 발의 발포 소리가 들려온다. 방원이 황급히 몸을 웅크린다. 무령이 본능적으로 방원을 보호하기 위해 감싸 안는다. 화포(火砲)의 굉음이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는 가운데, 방원의 귓가에 이명소리가 들려온다. 이명소리 외에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다. 근데 오히려 정신은 점점 더 선명해진다. 그리고 결심한다. 이 무모한 전쟁, 부하들을 죽음으로 몰아갈 재앙. 기필코 막아내겠다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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