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녀 마마. 저를 비롯하여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 마마께서 차기 태왕이 되길 원하옵니다. 청컨대 망설이지 마시고 죽이시옵소서.”

 “이보게 자네! 왕녀마마는 동부여 백성들 마음을 얻어야 하네. 헌데 나무꾼을 죽이라니, 어찌 그리 대책 없는 말을 하는가?”

 “뭐가 문제란 말인가? 땅에 묻어버리면 그만인 것을.”

 “땅에 묻어? 민간 백성을? 자네 그걸 말이라고 하는가?”

 “우리만 입 다물고 있으면 감히 그 누가 입을 함부로 놀리겠는가? 아니 그러한가?”

 모두가 침묵에 휩싸였다. 서로의 눈치만 살폈다. 휘의 말이 썩 그럴싸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구는 아무래도 나무꾼이 민간 백성이라는 게 마음에 걸렸고, 무엇보다도 너무 쉽게 땅에 묻어버리면 그만이라고 말하는 휘 때문에 마음이 심란할 따름이었다.

 “왕녀 마마. 대관절 무얼 그리 걱정하시나이까?”

 “휘야...”

 휘가 잠시 고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저희가 나무꾼을 죽이는 것은 비단 마마의 태왕위 때문만은 아니옵니다. 아국의 병사들을 위해서라도, 나무꾼을 죽이고 땅에 묻어야 하옵니다.”

 “어째서!”

 “마마와 소인들이 적의 봉수대를 장악하는 연유가 무엇이옵니까? 적의 눈과 귀를 멀게 한 연후에, 태왕 폐하의 본대가 급습하여 전쟁을 조기에 끝내려함이 아니옵니까?”

 “네 말이 맞다.”

 “헌데 이번 작전에서 저희가 차질을 빚어 전쟁이 조금이라도 길어지면, 그만큼 피를 흘리는 건 아국의 병사들이지 않겠사옵니까? 또 그 수가 늘어나지 않겠사옵니까?”

 물론 휘의 속내는 그것보다는...민간백성을 죽여야 한다는 죄책감에서 비롯된 고구의 망설임을 덜기 위해, 그녀가 빠져나갈 공간을 만들어 주기 위함이 더 컸지만 말이다.

 “사사로운 욕망에서부터 대의에 이르기까지 왕녀마마께서 나무꾼을 죽이지 못할 이유는 없사옵니다. 부디 망설이지 마십시오.”

 망설이는 고구지만 사실 혹할 따름이긴 하다. 아무런 후문 없이 나무꾼만 사라져준다면 그녀에게는 더할 나위 없다. 하지만 인간으로서의 마지막 양심이 고구를 붙잡고 있는 것이다.

 “택하기 편치 않으시면 구태여 말씀하지 마시고, 고개만 끄덕이시옵소서. 왕녀 마마께서 보이지 않는 곳으로 데려가 소인이 직접 죽이겠나이다.”

 공은 고구에게로 넘어갔다. 선택의 순간이고, 망설임은 생각보다 길지 않았다. 짧은 망설임마저 양심 보다는 이 일이 밝혀졌을 때 후폭풍에 대한 두려움에 가까웠으니까. 결국 고구는 휘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고, 나무꾼이...

 “살려주..읍읍...읍읍읍...”

 ...라며 비명을 지르거나 말거나, 휘는 고구가 안 보이는 곳으로 나무꾼을 끌고 갔다. 

 ...

 잠시 후. 고구는 옷에 피 한 방울 안 묻히고 홀로 나타난 휘를 보며...

 “어떻게 된 것이냐?”

 “산채로 묻어버렸습니다.”

  사람을 산채로 묻어버린 표정이라기엔, 너무도 평온해 보일 따름이다. 그러나 그런 휘의 모습이 소름 끼친다는 감정보다, 골칫거리가 사라졌다는 사실에 대한 안도감이 그녀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이제 내 앞길을 가로 막을 자는 없어. 동부여를 정복하고, 나는 위선의 얼굴로 백성들 앞에서 선행을 베풀면 그만이야. 차기 태왕은 내 자리라고.’

 고구는 휘를 보며 환희 미소를 지어보였다.

 ...

 결국 고구의 친위대는 마지막 봉수대마저 모두 장악했다. 이로써 동부여의 통신망은 모두 마비되어버렸고, 이윽고 광개토태왕의 본대가 급습하자 동부여는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 단숨에 64개의 크고 작은 성과 1400개의 마을을 빼앗거나 항복을 받아낸 고구려군은 마침내 수도에 있는 동부여 왕의 항복마저 받아내는데 성공했다.

 고구는 예정대로 동부여의 수도에서 연회를 개최했다. 동부여 백성들을 잔뜩 불러들였고, 술과 고기, 그밖에 수많은 산해진미를 제공하는데 자신의 사재를 전부 털었다. 흐릿하게나마 남아있는 죄책감을 재물로 씻어버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여 자신의 사재를 ‘전부’ 사용하는 것이고 말이었다.

 연회의 표면적인 목적은 동부여 백성들의 마음을 달래기 위함이지만, 사실상 연회의 주인공은 고구였다. 고구려 군사들의 희생을 줄이고 동부여를 정복할 수 있었던 건, 고구가 동부여의 통신망을 전부 차단해버렸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니 말이었다. 

 “왕녀 마마. 전공을 감축 드리옵니다.”

 “태왕 폐하께서 왕녀 마마의 전공 소식을 듣고 얼마나 기뻐하셨는지 아시옵니까? 왕녀마마는 실로 하늘이 내린 효녀이시옵니다.”

 대놓고 차기 태왕을 운운하지는 않았으나, 모두들 알고 있었다. 차기 태왕이 될 자는 광개토태왕을 가장 많이 빼닮은 고구라는 걸 말이다. 하여 은근한 아부가 뒤를 이었다. 고구는 그런 아부를 즐겼다. 그런 고구 곁에는 그녀와 마찬가지로 위신이 한껏 올라가 있는 휘가 있었고 말이다. 

 고구는 휘와 단둘이 시간을 보내고 싶어, 그를 데리고 연회장 안에서 비교적 인적이 드문 곳으로 향했다.

 “기분이 어떠하냐.”

 “왕녀마마께서 기쁘시니 저도 기쁘옵니다.”

 “이 모든 게 다 너의 공이다. 내 평생 너와 살면서 다 갚으마.”

 이윽고 고구가 금으로 된 반지를 휘의 약지에 끼워준다.

 “나와 혼인해 다오.”

 고구의 시야 눈가에 눈물이 살짝 맺힌 휘의 모습이 들어온다. 

 “어찌 우는 것이냐. 사내로서 정혼의 반지를 끼는 것이 부끄러워 우는 것이냐.”

 고구의 농담에 휘가 피식 웃으며, 그러나 눈물은 글썽이며...

 “아니옵니다. 무척 기쁘옵니다. 하여 눈물이 나는 것이옵니다.”

 고구와 휘가 서로를 애틋하게 바라봤다. 이때 그들 앞에 머리는 산발을 하고 허름한 부엌칼을 들고 있는 여인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엔 눈물로 지워진 분(粉)으로 범벅이 되어있다. 고구는 문득 여인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어찌 그리 우는 것이냐?”

 “지아비를...찾고 있습니다.”

 “지아비를?”

 “나무를 하는 사내입니다. 혹 보신 적 있으십니까?”

 “나무를 하는...사내?”

 “나흘 전 나무를 하러 산으로 올라갔는데...그 뒤로 깜깜 무소식입니다.”

 ‘나흘 전 나무를 하러 산으로 올라갔다고?’

 그렇다. 여인이 찾는 사내가 바로 고구의 묵인 하에, 휘에 의해 죽임을 당한 나무꾼인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애달픈 외침은 안타깝게도 연회장의 수많은 환희의 음성에 묻혔고, 그래서 이렇게 좌절한 채로 인적이 드문 곳에서 숨죽여 우는 것이었다.

 “대체 어디로 간 걸까요. 절 버리고 떠난 걸까요. 제 지아비가...그리 무책임한 사람이었던 걸까요. 제가 사람을 잘못 봤던 걸까요...”

 다시금 터져 나오는 울분을 참지 못하고 여인이 오열하자, 고구와 휘는 당혹스러울 따름이었다. 특히 사건의 총책이라 할 수 있는 고구의 심정은 더욱 답답할 따름이고. 그녀에게 다시금 선택의 순간이 찾아온 것이었다. 사실대로 말하고 용서를 구하느냐, 아니면 강자에게 짓밟힌 약자의 슬픔을 외면할 것이냐. 

 이윽고 고구는 여인에게 사실대로 말하기로 결심했다. 물론 그렇다고 약자의 슬픔을 외면하지 않거나 피해자에게 용서를 구하겠다는...뭐 그런 차원의 이유는 아니었다. 차기 태왕으로서 한 개인의 죽음에 대한 적절한 책임은 지되, 솔직히 자신이 그렇게 잘못했다고 생각하지도 않기 때문이었다. 

 ‘애당초에 힘이 없는 자는 불가피한 희생에 언제나 노출되어 있을 뿐이야. 좋은 위정자와 나쁜 위정자는 그 희생에 적절한 보상을 하느냐, 안 하느냐의 차이로 나누어질 뿐이고.’ 

 “자네의 지아비는 내가 죽였네.”

 휘가 놀라 고구를 바라보는 가운데, 충격을 받은 여인은 결국 땅에 주저앉아버렸다.

 “어쩔 수가 없었네. 자네 지아비가 마을로 내려가 우리의 정체를 노출 시키면, 고구려의 작전은 위태로워졌을 것이고, 전쟁은 길어졌을 것이며, 수많은 희생이 뒤따라왔을 것이네.”

 휘가 고구에게...

 “왕녀마마. 잠시 단둘이 긴히 드릴 말씀이 있사옵니다.”

 잠시 고구를 데리고 이동하여, 동부여 여인과 거리를 두더니...

 “어찌하여 저 여인에게 사실을 말씀하셨습니까. 저 여인이 태왕 폐하께 고자질이라도 하면 어쩌시려고요.”

 “무엇이 초조한 것이냐. 어차피 동부여의 백성들 대다수는 작금의 현실에 순응한 눈치고, 경쟁자라 할 수 있는 내 아우 거련이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는데. 고작 저 여인 하나로 여론이 뒤바뀌기라도 한단 말이냐.” 

 “그렇긴 하오나...조금은 마음에 걸리옵니다.”

 “걱정하지 말거라. 날 믿어라.”

 “마마의 의중이 그러하시다면...어...어...어!”

 무언가를 확인한 휘가 황급히 뒤돌아 몸으로 막아섰다. 

 ‘푸욱.’

 휘의 등에서부터 찌른 부엌칼이 심장을 꿰뚫고 앞으로 튀어나왔다. 고작 부엌에서나 쓰는 칼로 감히 고구를 죽이려고 했으나 결국 휘를 찌르고만 이의 정체는! 고구려의 젊은 권력자에게 나라를 잃고, 인생의 반려자를 떠나보내고, 삶을 송두리째 짓밟힌...망국(亡國) 동부여의 가련한 여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