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e-book 입니다.

고구는 서둘러 여인을 발로 차서 기절시킨 후, 휘를 부축했다. 휘의 가슴에서 시뻘건 피가 흘러내렸지만 부엌칼은 함부로 뽑을 수 없었다. 피가 너무 많이 흘러나와 죽을 수 있으니 말이었다. 대신 큰 목소리로...

 “의원을 데려와! 어서! 어서 데려 오거라!”

 인적이 드문 곳이었지만...고구의 목청에 절박함이 담겨서인지 불행 중 다행히도 지나가던 숙위 병들에게 발견되었다. 숙위 병들이 황급히 의원을 찾아 달려갔다. 

 “괜찮아. 당황하지 마. 별 일 아니야.”

 “왕녀...마...마...”

 “말은 하지 말고. 의식을 잃으면 안 되니까 정신...”

 고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녀의 품 안에 안겨있던 휘가 검붉은 피를 토했다. 그 피가 고구의 얼굴에도 튀었다.

 “괜찮아...괜찮아...괜찮아...”

 “부디...차기 태왕이 되...시어...대업을 이루...소서.”

 고구에게 폭언을 들었고 손찌검을 당했고, 강제로 입 맞춰졌고, 태왕의 장녀와 교제를 한다고 공공연하게 알려졌고...그러다가 저도 모르게 세뇌되어 자신도 고구를 사랑한다는 착각 속에 빠졌던 휘. 결국 마지막 순간까지 그녀를 지키다가 목숨을 잃었다. 향년 16세. 

 “으...으...하....으아!”

 고구의 절규가 연회장의 한편을 가득 메웠다. 이윽고 숙위 병들이 의원과 함께 달려왔지만, 이미 때는 늦었을 따름이고. 땅에 주저앉아 흰색 천이 뒤덮인 들것으로 운반되는 휘의 시신을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구(舊) 동부여의 수도, 가섭원. 

 한 때는 동부여의 왕이 앉아있던 옥좌지만, 광개토태왕이 그 자리를 대신했고...그는 몹시 화가 나있는 상태였다. 자신의 장녀가 불명예스럽게도 전쟁 중에 민간 백성을 죽였고, 그걸 은폐했고, 설사 그렇다하더라도 장차 왕가의 일원이 될 휘가 동부여 백성에 의해 죽임을 당했으니 말이었다. 

 광개토태왕은 후계자 결정을 잠시 보류하겠다고 말했고, 휘를 죽인 여인을 극형에 처하라고 명했다. 다만 이에 대한 민심이반을 최소화하기 위해 한 가지 방책을 썼다. 이번 사건에 대한 책임을 동부여 지배층에게 물어, 그들 중에 조금이라도 반 고구려성향인 귀족들이 있으면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여 동부여 백성들에게 나누어주었다. 

 반 고구려성향의 동부여 귀족들은 하루아침에 알거지가 되었으나 손 쓸 도리가 없을 따름이었다. 나라는 망해버렸고, 상대는 고구려 역사상 가장 뛰어난 정복군주이니까. 친 고구려성향의 동부여 귀족들은 이 일에 관여하지 않았다. 자신들의 재산을 지킨 것만 해도 천만 다행이라고 여겼으니 말이었다. 

 한편 고구는 모든 걸 잃었다. 부왕의 분노를 사서 후계자가 되는 건 요원해보였고, 무엇보다 사랑하는 휘를 잃었다. 병석에 누워 하염없이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는데...수행 궁녀로부터 충격적인 얘기를 듣게 되었다.

 “뭐...뭐가 어째? 거련이가 그 악귀 같은 여인을 살려 달라, 폐하께 주청을 드리고 있다고?”

 “예...마마. 백성들 다 보는 성문 앞에서 흰 돗자리를 깔고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으신다 하옵니다.”

 자신의 4살 아래의 동생, 고거련. 그저 글공부에만 매진하던 순진한 녀석이라고만 생각했었다. 그리고 태왕위를 위해 아무 것도 노력하지 않았다. 하여 아무런 욕심도 없는 줄 알았다. 헌데 느닷없이 나타나 휘를 죽인 여인을 살려 달라고 부왕께 애원하고 있단다. 그것도 동부여 백성들이 다 보는 앞에서 말이었다.

 “이런...추잡한 놈. 동부여 백성들 민심을 이런 식으로 얻으려는 것인가? 태왕이 되고 싶어서?”

 고구는 극도로 분개하였고, 수행원들 모두가 만류함에도 불구하고 성문으로 향했다. 이윽고 무릎 꿇고 목청껏 소리를 지르는 고거련을 발견하였다. 고구는 고거련을 내려다보며...

 “그간 순한 양의 탈을 쓰고 지내느라 얼마나 답답했느냐.”

 “무슨 말씀이십니까, 누이.”

 “잘도 시치미를 떼는 구나.”

 고구가 자신을 노려보는 고거련을 내려다보며...

 “네 놈이 사람이냐? 누이의 연인을, 장차 너에게는 매형이 될 사람을 죽인 죄인을 살려달라는 게...진정 금수의 탈을 쓰고 할 수 있는 짓이냔 말이다.”

 “아무런 죄도 없는 나무꾼을 누이의 사리사욕을 위해 산채로 묻어버리는 건, 그건 과연 사람이 할 짓이란 말입니까?”

 “이...이놈이!”

 고구가 고거련의 멱살을 잡았다. 고거련도 이에 질세라 고구의 멱살을 잡아 자신에게 가까이 끌어당기더니, 그녀의 귀에다가 귓속말로...

 “부왕의 뒤를 잇고 싶으십니까? 허면 여인을 구명하는데 온 힘을 다하세요. 그 다음 그 여인의 용서를 구하십시오. 그것이 누이께서 부왕의 용서를 받고, 차기 태왕이 되는 유일한 방도입니다.”

 “네깟 놈이 부왕에 대해 무얼 안다고 그리 떠드는 것이냐?”

 “허면 누이는 아버지를 잘 아십니까?”

 순간 고구는 할 말을 잃었다. 사실 그녀도 광개토태왕의 의중을 확실히 안다고 자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께서 처음으로 누이를 전쟁터에 보내던 날. 그와 동시에 신하들을 시켜 절 평양으로 유람 보내셨습니다.”

 “그게 어쨌다는 것이냐.”

 고거련이 고구를 안쓰럽게 쳐다보며...

 “아버지께서는 자그마치 아홉 개의 사찰을 평양에 지으신 분이옵니다. 누이께서 태왕이라면 사찰을 아무 곳에나 지으시겠습니까?”

 고구는 모골이 송연함을 느꼈다.

 “맞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장차 평양을 고구려의 도읍으로 확정하신 겁니다.”

 “그럴...리가...그럴 리가 없다.”

 “아버지께서 중원대륙을 정복하는 데에만 혈안이 되신 분이라면, 어찌하여 나라의 남단에 위치한 평양을 장차 고구려의 도읍으로 정하셨겠습니까?”

 고구가 미심쩍은 표정을 지으며 고거련에게...

 “그 얘길 이제 와서 나에게 하는 연유가 무엇이냐. 아버지께서 차기 태왕으로 낙점한 사람은 바로 너니까, 허튼 욕심 부리지 말고 태왕위를 포기하라는 것이냐?”

 “무슨 말을 하고 싶으신 겁니까?”

 “네놈의 저의를 묻는 것이다. 너도 태왕이 되고 싶은 것이냐?”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지킨다?”

 “이제 동부여는 사라졌고, 저들은 우리 고구려의 백성입니다. 저는 고구려의 백성이 억울하게 희생당하는 걸 좌시할 수 없습니다. 반드시 아버지를 설득하여 그 여인을 지킬 것입니다.”

 “내가 그걸 좌시할 것 같으냐?”

 “누이께서 그 죄인을 살리고 마음을 얻어야 비로소! 부왕께 용서를 받고 태왕위가 누이께 돌아갈 것입니다. 태왕이 되고 싶다면 누이의 손으로 그 죄인을 살리세요.”

 고구는 여인을 살리겠다는 고거련의 행동이 못마땅하긴 했지만, 태왕위를 위해서는 그의 말이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고 느껴졌다. 결국 자리를 벗어나 형옥으로 향했다. 휘를 죽인 동부여 여인과 담판을 짓기 위해 말이었다.

가섭원의 형옥.

 불과 며칠 사이에 크나큰 시련을 겪은 두 여인이 서로를 마주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한 여인은 승전국의 왕녀의 신분으로 정혼자를 잃었고, 또 다른 여인은 망국(亡國)의 일반 백성의 신분으로 지아비를 잃었다. 각자 서로가 마주하는 상대로부터 말이었다.

 “어찌...하여 이런 곳까지 오셨습니까.”

 “내 너에게 할 말이 있어 찾아왔느니라.”

 “무엇 입니까?”

 “모두가 바라보는 앞에서 휘를 죽인 것에 대해 사죄하거라.”

 동부여 여인이 미간을 찌푸리며...

 “사죄를...하란 말씀입니까?”

 “그래. 허면 내 명예를 걸고 지난 일은 모두 잊을 것이며, 또한 목숨을 걸고 널 살려줄 것이다. 허니 내 말대로 하거라.”

 동부여 여인이 기가 차다는 듯 실소를 흘리더니, 이윽고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감히...감히 내 마지막 호의를 비웃는 것이냐?”

 “뭐? 호의? 지금 호의라고 했소?”

 “네년이 방자하기 이를 데 없구나.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이봐요, 당신! 난 말이야. 당신도 죽이지 못한 게 한이 되는 사람이야. 헌데 뭐 어쩌고 어째? 용서를 구하라고? 그러면 살려주겠다고? 마음대로 해, 이 미친년아! 누가 겁먹을 줄 알고? 죽여 봐! 죽여 봐!”

 이성을 잃은 동부여 여인이 눈물 콧물을 흘리며 고성을 지르자...

 “오냐...그리 죽고 싶다면 내 어쩌겠느냐. 소원대로 죽여주마. 또한 네년의 처형은 내가 직접 할 것이다. 내 그리 주청할 것이야.”

 마찬가지로 격분한 고구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형옥을 박차고 나갔다. 결국 형옥 안에는 살해당한 지아비를 따라 죽고 싶은...한 미망인의 절규만이 남게 되었다.

 ...

 고구는 몹시 화가 났지만 이성을 완전히 잃지는 않았다. 여전히 태왕위를 포기하지 않았고, 따라서 부왕인 광개토태왕의 눈치를 어느 정도 살펴야만 했다. 하지만 휘를 죽인 여인을 보호할 생각은 이제 추호도 없어졌고, 자신만의 방법으로 부왕의 신뢰를 얻겠다고 다짐했다. 그건 바로...

 “태왕 폐하. 신 고구, 친위대와 함께 민가 복구에 힘쓰고 싶사옵니다.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민가 복구라?”

 “아무리 아국이 피해를 최소화하고 전쟁을 끝냈다고는 하나, 전쟁은 전쟁이고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는 백성이 아니겠사옵니까?”

 “물론이다.”

 “하여 소신, 진심으로 반성하는 차원에서 민가복구에 전력을 다하고자 하옵니다.”

 물론 고구는 추호도 반성하지 않았다. 그럴 생각도 없었고. 그저 이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거짓말일 뿐이었다.

 “진정 반성한 것이냐?”

 “그렇사옵니다.”

 고구는 자신을 바라보는 부왕의 뜨거운 시선을 아무런 표정변화 없이 견뎌냈다. 1각이 1년 같은 찰나의 시간이 지나고...마침내 부왕의 재가를 받는데 성공한 그녀는 서둘러 민가로 향했다.

 장녀인 고구는 친위대와 함께 민가 복구에 힘썼고, 차남인 고거련은 동부여 여인을 살리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부왕에게 직접 부탁하기도 했고, 자신에게 우호적인 대신들의 입을 빌리기도 했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법치를 위해 동부여 여인을 처단하겠다는 부왕의 의지가 생각보다 확고했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휘를 죽인 동부여 여인의 처형식 하루 전 날. 고구는 문득 그 여인의 모습이 보고 싶어졌다. 어떠한 태도일지 궁금했다. 아니 좀 더 솔직한 심정으로, 자신에게 무릎 꿇고 사죄하길 바랐다. 저승에 간 휘에게 용서를 구하길 바랐다. 눈물 콧물 다 흘리면서 살려달라고 애원하길 바랐다. 그래서 그녀가 갇혀 있는 형옥으로 향했다.

 “아니...저 애가 어찌 여길...”

 동부여 여인을 먼저 만나러 온 사람이 있었다. 바로 고거련 말이다. 게다가 휘를 죽인 파렴치한 죄인에게 무릎 까지 꿇고 있었다. 

 ‘저놈이 왕족으로서의 위신을 다 갉아먹는구나.’ 

 고구는 굳은 얼굴로 벽 뒤에 숨은 다음...

 ‘그래. 저 둘이 무슨 말을 지껄이는지, 한 번 들어나 보자.’

 ...

 내일 있을 죽음을 기다리는...실핏줄 하나 없이 창백한 동부여의 여인. 무릎 꿇고 그녀를 애처롭게 바라보는 왕자 고거련.

 “누구...십니까.”

 “고구려의...왕자입니다.”

 “높으신 분...께서 어째...서 찾아오셨습니까...어찌 말을 높이십니까.”

 “용서를 구하고 싶었습니다.”  

 “고작...열넷에서 다섯...많아봤자 열여섯으로 보이시는데...제게 무슨 죄를 지어...용서를 구하시겠다는 겁니까.”

 “고구려의 왕자로서 용서를 구하고 싶었습니다.”

 동부여 여인이 고거련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야에 벌써부터 눈물을 글썽이는 어린 왕자의 얼굴이 들어왔다.

 “이러지 마세요...혼란스럽습니다.”

 “아무도 당신을 위로하지 않았습니다. 그 누구도 죽은 당신의 지아비에게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그 사실이 나를 미치게 만들었습니다. 하여 당신을 살리고 싶었습니다. 나 혼자만이라도 당신을 구하고 싶었습니다. 허나...”

 고거련의 두 눈에서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나는...진정 아무런 힘도 없는 허울뿐인 왕자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동부여 여인의 시야에 며칠간 식사도 제대로 못한 것 같이 핼쑥해 보이고, 피곤에 찌들어 있는 고거련의 두 눈이 들어왔다. 

 사실 고거련의 행동은 따지고 보면 승자의 위선으로 보일수도 있는 모습이었다. 이미 남의 나라를 빼앗은 뒤에, 사람을 산채로 묻은 다음에 용서를 구하면 무엇 하겠는가. 그게 진심이든 거짓이든 말이었다.

 그러나 동부여 여인은 그렇게 생각할 수가 없었다. 가해자라는 책임을 덧씌우기엔...고거련이라는 눈앞에 있는 왕자가 너무도 어렸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끝내 당신을 지키지 못할 것 같습니다. 미안합니다. 진정으로 미안합니다...”

 저렇게 말똥 같은 눈물을 쉴 새 없이 흘리고 있는데 말이었다.

 “왕자님. 그만 일어나세요. 어려 보이시는데...오래 무릎 꿇는 거...다리에 안 좋아요. 어서...일어나세요. 어서요.”

 고거련이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오랫동안 무릎을 꿇고 있어서인지 다리에 경련이 나서 땅에 주저앉아버렸다. 그런 고거련을 보며 동부여 여인이 옅은 미소를 머금고는 그에게...

 “혹...그때 제가 죽인 사내 옆에 계시던 분이...고구려의 공주님이십니까?”

 “맞습니다. 내 누이입니다.”

 동부여 여인이 잠시 망설이다가...

 “내일 제가 죽거든...그 분께 전해주시겠어요. 사랑하는 연인의...목숨을 빼앗아서...미안했다고.”

 말라버린 줄만 알았던 동부여 여인의 두 눈에서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고거련도 다시금 눈물을 흘렸고.

 ...

 고구의 입장에선 고거련의 말이 심히 불쾌할 따름이었다. 자칫하다가 광개토태왕의 정복전쟁 자체를 부정하는 식으로 해석될 수 있는 여지가 큰 발언이기 때문이었다. 그건 곧 부왕과 함께 전쟁을 누볐던 자신의 공을 폄하하는 것이기도 했고 말이다. 

 ‘고거련 네 이놈. 부왕의 자식이면서 감히 부왕의 최대치적을 부정하려 들어?’

 결국 참다못한 고구가 모습을 드러내려던 순간...

 “내일 제가 죽거든...그 분께 전해주시겠어요. 사랑하는 연인의...목숨을 빼앗아서...미안했다고.”

 순간 고구는 멈칫했다. 

 ‘휘를 죽여서 미안...하다고?’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 같은 충격이었다. 

 ‘그리 뻔뻔하게 굴 더니, 어찌 이제 와서...’

 고구의 시야에 동부여 여인과 함께 울고 있는 고거련의 모습이 들어왔다. 

 ‘내겐 눈 하나 깜짝 않던 자가 어찌 내 아우에게는 사죄를 한단 말인가. 어찌 저리...눈물을 보인단 말인가.’

 너무도 혼란스러웠다. 고구는 곧장 형옥을 나와, 자신의 침소로 향했다. 

 ‘내일 제가 죽거든...그 분께 전해주시겠어요. 사랑하는 연인의...목숨을 빼앗아서...미안했다고.’

 침소로 향하는 길이 너무도 멀게 만 느껴질 따름이었다.

 ...

 민가 복구를 위해 하루 종일 구슬땀을 흘린 고구지만 도무지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내일 제가 죽거든...그 분께 전해주시겠어요. 사랑하는 연인의...목숨을 빼앗아서...미안했다고.’

 “거련이의 사과 때문인가. 진정 그것 때문에...”

 고구는 이내 부정했다. 세상이 그리 순진할리 없었다. 세상은 양육강식이고, 사과는 약자가 강자의 빈틈을 엿보기 위해 잠시 몸을 웅크릴 때 하는 하나의 방편일 뿐이고, 강자가 약자를 다스리기 위한 위선적인 방편일 뿐이었다. 

 “고거련...이 자식이 태왕위에 욕심이 나서 위선을 부린 것뿐이야.”

 하지만 고구의 두 눈에서는 어느새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말은 이렇게 거칠고 모질게 내뱉어도, 사실 동부여 여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녀의 사과를 듣게 되자 고구 역시 비로소 죄책감이 들기 시작했으니까. 

 헌데 이를 쉽게 인정할 수가 없었다. 인정해버리면 모든 것이 자기 잘못이 되니까. 만일 나무꾼을 죽이지 않았더라면, 설사 야심을 위해 죽였더라도 일말의 죄책감은 남아있었더라면, 하여 동부여 여인을 처음 만났을 때라도 진심으로 사죄했더라면... 

 “휘는 죽지 않았을 텐데.”

 이러한 가정들이 그녀의 마음을 잔인하게 후벼 팠다. 또 다시 고구에게 선택의 순간이 찾아온 것이었다. 자신의 과오를 인정할지, 또 다시 자기합리화를 할 것인지. 밤새 잠 못 이루고 고뇌하던 고구는 결국...

 ‘아버지. 불초소생 고구. 모든 욕심을 버리고 고구려를 떠납니다. 떠나기 전 아버지께 마지막 청을 하옵니다. 간절히 바라옵건대, 소녀에게 지아비를 잃은 그 가련한 동부여의 여인을 살려주시옵소서. 부탁드리옵니다.’

 ...라는 서신을 남기고 홀연히 고구려를 떠나버렸다. 그녀가 구태여 고구려를 떠나기까지 한 이유는...자신의 그릇된 선택의 연속으로 죽음을 맞이한 휘의 영혼이 숨 쉴 고구려에서, 도무지 살아갈 면목이 없다고 스스로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이후 고구는 전국방방곳곳을 유랑하였다. 신라와 백제, 왜국, 대륙의 수많은 국가들. 그곳들 모두 전쟁이 한창인 나라들이었고, 고구는 자신이 무예에 일가견이 있어 목숨에 지장이 가는 일은 생기지 않을 거라고 자신했었다. 

 하지만 오랜 기간 유랑을 하면서, 그간 자신이 안전할 수 있었던 건 왕족이라는 울타리의 힘이 컸다는 걸 뼈저리게 깨달았다. 

 더욱이 고구는 여인.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달거리(생리)는 그녀를 주기적으로 취약하게 만들기에 충분했고, 전쟁은 그러한 약점을 극대화시켰다. 호강에 겨운 왕가의 여인이 아니라, 민가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진짜’ 여인들의 처지가 된 것이었다. 

 자연스레 여인들의 삶에 관심이 갈 수밖에 없었고, 그녀들이 크고 작은 권력자들에게 유린당하는 과정을 목격하게 됐다. 물리적인 힘에 의한 겁간도 있었고, 부와 권력의 위계차이에 의한 소위 취해지는, 팔려가는 과정도 목격하였다. 그러면서 자신이 휘에게 저지른 행동 역시, 사랑이 아닌...단지 그를 취한 것뿐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이로써 더욱 확실해졌구나. 너를 죽인 건 그 미망인이 아니라...바로 나라는 걸.” 

 고구는 그간 미련이 남아있었던 휘를 진정으로 마음속에서 보내주었다. 그가 저승에서라도 자유롭길 바라며...물론 그를 향한 죄책감은 평생 남아있겠지만 말이다.

 ...

 2년 후 가을 무렵. 고구는 부왕인 광개토태왕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간 고구려에서 자신의 행방을 수소문한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애써 외면했었다. 고구려로 돌아갈 수 있는 자격이 아직은...아니 어쩌면 영영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랬던 그녀에게 부왕의 부고(訃告)는 너무도 급작스러운 것이었다.

 “옥체 건강하시던 분이었는데...아직 불혹도 안 된 보령이시고.”

 고구는 고구려의 수도 국내성으로 향했다. 어느덧 장례가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당도한 그녀는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 4부 귀족들과 대신들은 당혹스러울 따름이었다. 고구가 떠나고 고거련이 태자가 되었는데, 그녀가 다시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다시금 나라의 혼란이 야기될 수도 있는 상황이니 말이었다. 그러나...

 “염려하지 마십시오, 태왕 폐하. 소신은 다시 고구려를 떠날 것이옵니다.”

 “떠나다니요. 또 어딜 가신단 말입니까, 누이.”

 “신하들의 염려가 일리가 있습니다. 소신이 여기에 남는다면 나라는 분명 큰 혼란에 빠질 것이옵니다. 또...소신은 아직 휘의 무덤을 마주할 면목이 없습니다.”

 “절 도와주실 순 없겠습니까?”

 “소신이 무얼 도와드릴 수 있겠습니까.”

 “선왕 폐하께서는 대륙이 혼란스러운 틈을 타, 우리에게 너무도 많은 영토를 물려주고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허나 그 땅을 다스릴 백성의 수는 턱없이 모자랍니다. 백성이 없으면 드넓은 땅이 대관절 무슨 소용 있겠습니까?

 고구는 고거련의 말에 호기심을 느꼈다.

 “대륙에서 일어난 수많은 나라가 명멸(明滅)했고, 이제 주축국은 세 나라 뿐입니다.”

 “위(북위), 유연, 송이지요.”

 “맞습니다. 누이께서도 아시다시피 우리로서는 다행이지요. 그들이 서로 대등하니, 대륙의 분열은 앞으로도 지속될 여지가 클 테니까요. 저는 그 기회를 절대로 놓치지 않고자 합니다.”

 “어찌 말이옵니까?”

 “외교로서 이들을 이용하여 고구려의 평화를 지켜내고, 내치에 집중하여 이 땅위에 수많은 아이들이 태어나게끔 만들고자 합니다. 그 아이들이 웃을 수 있는 나라를 만들고자 합니다. 하여 먼 훗날 대륙이 장차 하나가 되었을 때, 감히 우리 고구려를 넘보지 못하게 만들 것입니다.” 

 “폐하께서는 소신께 도움을 청하셨습니다. 허면 제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도 말씀해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외교는 위정자의 세치 혀도 중요하나, 힘이 뒷받침 되었을 때 비로소 날개를 달고 하늘 위로 자유로이 비상하는 법입니다. 누이께서 이 고구려의 힘이 되어주십시오. 날개가 되어주십시오. 이 나라를 지키는데 힘을 보태주십시오. 부탁합니다.”

 마냥 어린 아이인줄만 알았고, 글공부에 몰두하는 샌님인줄만 알았고, 한 개인의 죽음에 절실히 슬퍼할 줄 아는 가슴 따뜻한 사내로만 여겼다. 그리고 고구려를 떠난 지 2년 만에 다시 만나게 되었으니, 그때의 고거련에 대한 인식이 조금도 변하지 않고 그대로 멈춰있을 따름이었다. 

 헌데 작금의 고거련은 전혀 그런 모습이 아니었다. 차기 태왕으로서 손색이 없을 안목을 지니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자신이 부왕의 총애를 얻고자 전쟁에만 몰두할 때, 고거련은 더 깊고 넓고 멀리 세상을 바라봤을 거라고 생각하니, 내심 샘나기도 했다.

 ‘내가 사내로 태어나고 거련이가 여인으로 태어났더라면, 지금 우리의 모습은 서로 반대일까?’

 고구는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어쩌면 거련이는 여인이라는 이유로 저런 웅대한 포부를 제대로 꺼내보지도 못하고 죽었을 거야. 나는 무난하게 태왕이 되어 땅덩이에만 혈안이 된 패왕이 되었을 테고.’

 생각을 어느 정도 정리한 고구가 고거련에게 말했다.

 “한 가지 청이 있사옵니다. 제 청을 받아주신다면, 소신 역시 폐하의 명을 받들 것이옵니다.”

 “말씀하십시오, 누이. 무엇입니까?”

 “여인들에게도...출세의 기회를 주시겠습니까?”

 “여인...에게 출세의 기회라면...관직에 오를 수 있게 하란 말씀입니까?”

 “그렇습니다.”

 고거련에게 고구의 말은 적지 않은 충격이고 혼란이었다. 고구려와 대륙의 역사를 통틀어, 단 한 번도 실행에 옮겨본 적 없는 것을 해달라고 요청을 받으니 말이었다. 

 그러나 그런 말을 꺼낸 고구의 심정을 이해 못하진 않았다. 그 역시 그녀가 여인이라는 이유로 부왕의 눈에 들기 위해 안간힘을 썼고, 그것이 지나쳐 산 사람을 생매장하는 지경이 이르렀다는 걸 잘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는 엄청난 실험이었다. 이는 두 가지 문제에 직면하는 것이었다. 효과와 반발. 둘 중에 하나라도 잡아야했다. ‘효과’의 경우 미래는 불투명하기에 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장담할 수 없고, 그나마 통제 가능한 건 ‘반발’이었다. 

 반발을 통제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수단이 있었는데, 하나는 강제가 아닌 4부의 자율에 맡길 것. 다른 하나는 왕족인 동시에 여인인 고구의 권위를 크게 드높이는 것. 하여 4부의 귀족들과 대신들이 감히 반발할 엄두를 내지 못하게 하는 것. 

 4부의 재량에 맡기는 건 좋은 생각이었다. 허나 고구의 권위를 과도하게 높이는 건 자칫하다가는 나라가 일원화되지 못하고...좀 더 솔직한 심정으로 누이가 자신의 정책노선에 혹시라도 관여하려 들까봐 염려되었다. 그러한 조바심이 고스란히 고거련의 얼굴에 드러났고, 아니나 다를까 그의 마음이 고구에게도 읽혔는지...

 “태왕 폐하.”

 “예...누이.”

 “혹...소신이 폐하의 정책에 관여하려 들까 염려되시옵니까?”

 마음을 읽혀 부끄러운 고거련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소신, 폐하께서 여인의 출사만 보장해주신다면 일절 정사에 관여하지 않겠나이다. 약조하겠사옵니다. 또한...”

 고거련이 고구를 바라보았다.

 “소신이 얼핏 듣기로 서부의 명문가인 아불가문의 장녀, 아불보구가 실로 영특하다 하옵니다. 또한 아비를 전쟁터에서 잃어 전쟁을 몹시 꺼린다 하옵니다. 이는 폐하의 정책과도 상통하는 바이니, 그자에게 힘을 실어주신다면...구태여 소신에게 과도한 힘을 실어주지 않으셔도, 다른 귀족과 대신들의 반발을 통제하는데 용이할 것이옵니다.”

 “누이께 제 속내를 들켰나봅니다. 부끄럽습니다.”

 고구가 고거련을 향해 옅은 미소를 지으며...

 “권력을 나눌 수 있다 함부로 떠드는 자는 오직 두 종류의 인간일 뿐입니다. 아무런 생각이 없는 자이거나. 정책은 핑계일 뿐 마음속엔 탐욕만이 가득하여, 언제든지 자신의 초심을 배반하고 상대와의 타협을 쉽사리 운운하는 자이거나.”

 “누이...”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질 법한 자연스런 감정일 뿐입니다. 허니 너무 부끄러워하지 마세요.”

  고거련이 고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내 결심을 했는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누이의 제안을 받아들이겠다고. 바야흐로 새로운 고구려의 탄생을 알리는 순간이었다.

다시 현실로...

숙군성.

 고구가 유라는 병사에게...

 “모두를 지켜주겠다고 했느냐?”

 “예! 서...성주님!”

 “허면 너는 누가 지킨단 말이냐.”

 “그...그건...”

 고구가 당황해하는 유의 모습이 귀여워 웃음을 터뜨린다. 그녀의 웃음을 본적이 없는 보좌관들은 당황스러울 따름인데...

 “지키긴 누가 지키겠느냐. 너 스스로가 지켜야지.”

 “성주님...”

 “남들을 지키기 위해서도 싸우지만, 너 스스로를 위해도 싸우라는 것이다. 너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라는 뜻이다. 그래야 싸울 의지도 더욱 굳건해질 것이다.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겠느냐?”

 유가 잠시 생각을 골몰하지만 이내 잘 모르겠는지...

 “너...너무 어려운 말씀이십니다.”

 고구가 옅은 미소를 머금는다. 그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사열(査閱)을 재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