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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은 사실 6.23전쟁이며 남한의.. 18편 연재



          18편             시리즈





◇   포츠담선언 발표 이후의 상황


 

미국, 일본, 소련이 제각기 급박하게 움직이는 가운데 시간은 흘러갔고, 1945년 7월 26일 일본제국에게 무조건 항복을 촉구하는 포츠담선언이 발표되었다. 포츠담선언이 발표되자, 일본제국 최고전쟁지도회의는 긴급대책을 세워야 했다. 최고전쟁지도회의 구성원은 6명인데, 수상 스즈키 간타로, 외무상 도고 시게노리(東鄕茂德), 전쟁상 아나미 고레지까(阿南惟幾), 해군상 요나이 미쯔마사(米內光政), 육군참모총장 우메즈 요시지로(梅津美治郞), 해군참모총장 도요다 소에무(豊田副武)가 그들이었다. 


일본제국 최고전쟁지도회의 6인방은 포츠담선언을 수락하느냐 거부하느냐 하는 중대한 문제를 놓고 오랜 시간 설왕설래한 끝에 그 선언을 거부하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이른바 ‘국체호지(國體護持)’를 인정하는 내용이 포츠담선언에 들어있지 않다는 해괴한 이유를 들어 포츠담선언을 거부한 것이다. ‘국체호지’라는 것은 ‘천황제’를 유지한다는 뜻이다. 1945년 7월 28일 일본제국은 포츠담선언을 “묵살(黙殺)한다”고 발표했다. 


그런데 주목되는 것은, 일본제국이 항복하더라도 ‘천황제’는 종전대로 유지시킨다는 조항이 미국이 제출한 포츠담선언 초안에 들어있었다는 사실이다.우리 민족과 동아시아 나라들에게 침략전쟁과 식민지강점의 만행을 저지른 최고전범 히로히토를 처벌하지 않겠다는 미국의 의도는, 전범국 일본을 남북으로 분할하지 않고, 피해국 조선을 남북으로 분할하려는 간악한 흉계와 직결된 것이었다. 


포츠담회의에서 소련과 영국은 ‘천황제’를 종전대로 유지시키려는 미국의 의견에 반대했고, 그 조항은 삭제되었다. 그렇게 되어, 포츠담선언 제10항에는 “모든 전범들에게 준엄한 심판(Stern justice)을 내린다”라는 모호한 문장이 들어갔다. 미국은 모호하게 규정된 제10항을 근거로 최고전범 히로히토를 처벌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전범처벌을 최소화하는 선에서 ‘준엄한 심판’을 적당히 끝냈다. 극형을 받았어야 마땅한 일본제국의 전범들을 끼고돌았던 미국의 전범처리정책 때문에, 79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일본은 침략전쟁과 식민지강점에 대해 사죄하지 않고, 되레 자기들의 침략전쟁과 식민지강점을 합리화하는 후속범죄를 계속 저지르고 있다. <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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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 위의 사진은 미국, 소련, 영국이 포츠담회의를 진행하는 장면이다. 포츠담회의는 미국, 소련, 영국이 진행했지만, 포츠담선언에는 미국, 영국, 중국(장제스 정부)이 서명했다. 그렇게 된 까닭은, 당시 소련은 일본제국과 불가침조약을 맺은 중립국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불가침조약이 유효한 조건에서 소련은 일본제국에게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는 포츠담선언에 서명할 수 없었다. 소련은 나중에 포츠담선언에 서명했다.  


1945년 7월 30일 소련군의 전투병력, 무장장비, 군수물자를 유럽전선에서 원동전선으로 옮기는 마지막 수송열차가 원동지역에 도착했다. 그로써 소련의 대일전쟁준비는 사실상 완료되었다. 마지막 수송열차가 원동지역에 도착한 바로 그날, 모스크바 주재 일본제국 대사 사토는 일본제국 수상 스즈키에게 보낸 암호전문에서 “만일 우리가 소련의 참전을 막지 못하면, 즉각적이고 무조건적인 항복 이외에 다른 대안은 없을 것”이라고 썼다. 이런 사정은 일본제국에게 가장 두려운 세력이 미국이 아니라 소련이었음을 말해준다. 일본제국의 대소공포증은 그들의 대미적대감을 완화시켰다.   


미국은 소련의 전투병력, 무장장비, 군수물자가 유럽전선에서 원동전선으로 이동배치되어 대일전쟁준비가 완료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소련이 대일전쟁을 개시하면, 만주를 점령하고 곧바로 조선반도로 남진할 것이고, 그와 더불어 남사할린을 탈환하고 곧바로 일본 홋까이도에 상륙할 것으로 예견되었기 때문이다. 


2개월 3주 동안 미국군이 20,000여 명이나 전사하는 격전 끝에 일본 오끼나와를 간신히 점령한 미국군이 수송함을 타고 북상하여 조선반도와 일본 규슈에 상륙하려면, 작전시간이 1개월 이상 필요했지만, 소련-만주국경과 몽골-만주국경을 동시에 돌파하여 세 방면에서 총공격을 시작한 소련군은 1945년 8월 말까지 식민지조선을 해방하고 일본 홋까이도를 점령할 수 있었다. 소련군의 대일전쟁씨나리오는 일본과 조선반도를 점령하려고 벼르던 미국에게 악몽으로 다가왔다. 


미국이 그런 악몽을 떨쳐버리려면, 소련이 대일전쟁에 참전하기 전에 미국의 주도로 전쟁을 속결해야 했다. 그래서 미국은 핵시험 직후 실전배치를 앞둔 핵폭탄을 서둘러 사용하는 수밖에 없었다.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 미국군 B-29 폭격기가 일본 히로시마에 첫 번째 핵폭탄을 떨어뜨렸다. 히로시마 전체가 핵참화로 불타고 있던 시각, 기고만장해진 미국 대통령 해리 트루먼(Harry S. Truman)은 대일협박성명을 발표했다. “만일 그들이 우리의 조건을 당장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들은 이 지구상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파멸의 비가 하늘에서 내리는 것을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핵폭탄으로 히로시마를 날려버리면 일본제국이 곧바로 항복할 것이라던 트루먼의 예상은 빗나갔다. 일본제국은 히로시마가 완전히 폐허로 되는 대참화를 당했으면서도 항복하지 않고 계속 버텼다. 



    19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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