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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림부대"의 정체..2편
이름:  간담브이


등록일: 2022-10-04 15:06
조회수: 10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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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게시글 아이콘[호림부대.!! (역사)] 시리즈 시리즈란?

2편.          

 

 

◇   최초 북파공작대 ‘호림부대’의 운명은


■   유격대 특수부대 첩보 공작




1949년 6월 말 소련군 장비 수송 막으려고 38선 넘은 대원 252명 떼죽음



『작전에 성공하면 북한의 남침이 2, 3년은 저지될 것으로 믿었다』(호림유격전우회 황** 회장)



6명의 생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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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림부대는 1949년 10월부터 지리산 공비토벌 작전에 참여했다.

 

 

 

 

한국 (전사)에 잊혀진 전설이 있다. 한국 최초의 (북파) 유격대인 「(호림)부대」. 

 


한국전쟁 이후 50여 년간 호림유격대는 베일 속에 가려져 왔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1년 전인 1949년 6월 말. 북파 임무를 띤 유격대 252명은 설악산 대청봉에 손톱과 발톱을 잘라 생무덤을 만든 뒤 38선을 넘었지만 북한 인민군에 발각, 거의 떼죽음을 당했다.


가까스로 탈출한 생존자 40여 명은 세월을 못 이긴 채 늙고 병들어 현재 6명만이 살아남았다.


이들은 왜 50여 년을 침묵 속에 살았을까? 육군 정보국 소속 부대였음에도 (전후)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한 채 숨어 살아야 했던 그들을 대한민국 정부는 왜 외면했을까?


기자는 호림부대에 얽힌 사연들을 추적, 자료를 모으고 생존자들의 기막힌 육성을 들어 보았다고 한다.


호림의 실체를 찾기 위해 1949년 당시 발행한 일간지를 뒤졌다. 그해 8월10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이북 애국청년들 의거, 인제군에서 무장궐기」라는 제하의 기사가 눈에 띄었다.

 


<…피끓는 이북의 애국청년들은 공산도배들의 날카로운 눈초리를 피하야 가면서, 은밀히 동지를 규합하여 약 육천 명에 달하는 다수의 인원으로서 (구국통일구혈단)이란 비밀 단체를 조직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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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3월 지리산 공비토벌 작전 중에.

 

 

 

이북 애국청년들의 인제군 의거?



이북 청년들이 무장봉기해 북한 내부에 격변이 일어났다는 내용이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기사 말미에 실린 북한 측 주장이다.

 


<…(북한은) 사실을 은폐하고 날조하여 그들의 기관지에 맹랑한 소리를 늘어 놓고 있다. 



「대대장 김현순이가 인솔한 호림부대 제6대대 전원을 7월6일에 인제군 서화면 부허동에서 포위 섬멸하였으며 소위 대대장 백이권이가 인솔하는 제5대대 전원을 인제군 서화면 이로리에서 포위 섬멸하였다. 이 섬멸전에서 공화국 경비대는…」>



북한 측이 밝힌 「김현순」과 「백이권」은 (김현주)와 (백의곤)의 오기다. 호림 5대 대장 백의곤과 6대 대장 김현주가 자신의 신분을 숨기기 위해 틀린 이름을 밝혔을 개연성이 높다.


이북 청년들의 「무장궐기」를 담은 기사는 같은 해 8월13일, 14일자 동아일보와 경향신문에도 각각 「애국청년들 의거, 이북(인제)서 무장궐기」, 「수천 명 이북 애국청년들, 인제서 무장궐기」란 제목으로 실렸다. 


모두 북한 애국청년이 봉기했으며, 우리 국군과 아무 관련이 없다는 것이었다.


당시 육군참모총장 채병덕 (채병덕·1916~1950) 장군은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남한이 호림부대를 보냈다는 북한의 주장에 대해 이렇게 얘기했다.



『남한에서 보낸 일은 없고, 자주적으로 정의감에 불타서 공산세력을 섬멸하기 위하여 무력항쟁운동이 암암리에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벌써부터 알고 있는 터인데, 아마 이 사건은 그것의 한 표현이 아닌가 느껴진다. 학대 속에서 신음하는 애국동포들, 특히 청년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으리라고 믿는다』

 



북의 강동정치학원에 맞서 호림 창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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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9월 강원도 고성군 통일전망대에 세워진 호림유격군 전적비.

 

 

호림부대는 이북 청년들이 결성한 무장단체가 아니었다. 남한 정부는 호림부대 북파가 북한이 주장해 온 「6·25 북침설」의 증거로 이용될까 봐 호림의 실체를 철저하게 숨겼다. 독립유공자이자 한국광복군 제2지대 전우회 회장인 *순창·77씨의 증언이다.

 


『채총장이 당시 말한 구국통일구혈단은 호림부대의 존재를 감추기 위해 내세운 가상 조직입니다. 당시 정부로서는 호림부대의 존재를 인정할 수 없었어요. 그렇게 되면 북침의 빌미가 되는 것이니까요. 하지만 호림부대는 북한 출신의 서북청년회 젊은이들로 구성된 우리 육군의 비밀유격대였습니다.


북한이 「강동정치학원」을 만들어 월북한 청년들을 교육한 뒤 태백산맥을 통해 남한으로 침투시켜 빨치산 투쟁을 일으키자 우리도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만든 것입니다』

 


1949년 당시 이승만 정부는 왜 무모하게 북파작전을 세웠을까. 정식 군인도 아닌 고작 수백 명의 유격대로 무엇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그 정도의 병력만으로도 북한체제를 위협할 수 있다고 과대망상에 빠진 것은 아닐까.


당시 북한 인민군은 10개 사단에다 소련제 탱크와 미그 전투기 및 자주포 등으로 중무장한 상태였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 국군은 경무장한 여단규모의 10개 보병사단을 보유했을 뿐 탱크나 전투기는 아예 찾아 볼 수 없었다.


게다가 북한은 「강동정치학원」을 설립, 게릴라를 양성하여 지리산 등지에 무장공비를 내려 보냈다. 당연히 국군 병력은 이들을 막기 위해 분산될 수밖에 없었다. 



      이상…      2편에서 계속~~^^^^


주한미군,북한의 선제공격~~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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