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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임라이트]용의자 된 늙은 형사, 낡은 신념을 버려라
아시아경제 기사제공: 2022-11-23 16:42:21

디즈니+ ‘형사록’은 은퇴를 앞둔 강력팀 형사 김택록(이성민)의 회고록과 같다.
범인을 잡으며 남긴 발자취를 곰곰 반추한다.
자기 주도적 행위는 아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친구’라는 자의 조작에 살해 용의자로 몰리고 협박받는다.
"내가 죽였지만 결국 네가 죽인 거야. 앞으로 내 말을 안 듣거나 내 존재에 대해 발설하면 또 누군가 죽겠지. 넌 계속 누명을 쓸 거고, 지금처럼."


김택록은 친구의 요구대로 30년 형사 세월의 과오를 하나씩 바로잡는다.
친구의 정체를 파악하는 수사도 병행한다.
역설적이게도 고독과 피로, 무력감에 찌들었던 얼굴과 육체는 활기가 돌기 시작한다.
노련하고 익숙한 솜씨를 더해 사건의 실마리를 찾아간다.


배우 이성민은 단순히 의기충천한 모습으로 그리지 않았다.
과거의 자신을 자각하고 깨닫는 과정에 한껏 공을 들였다.
김택록의 수사가 인생 전체를 관통한다는 점에 착안해 다층적 감정의 혼재로 풀어냈다.
아울러 흉금을 터놓고 자기 생애를 송두리째 고백하는 듯한 인상을 각인해 특수한 상황을 일반적으로 수용하게끔 유도했다.



김택록은 검거했던 범인들이 가족을 협박해 이혼을 자처한 중년이다.
고시원에서 혼자 지내면서 외고집만 늘었다.
선입견이라는 색안경을 끼고 자기만의 수사 방식에 매달린다.
그러다 보니 객관적 사실에 접근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자기의 과오는 말할 나위 없다.
"내가 알지 못하는 나의 잘못들이 두렵다.
"


이성민은 비관적인 얼굴로 일관했다.
설득력이 가미된 근사한 표현이다.
누구에게나 신념은 있다.
비관적으로 흐르면 일상에서 필요 이상으로 상처받아 침울해진다.
살아가는 자체가 괴롭다고 호소하기도 한다.
김택록이 그렇다.
매사 남모를 불안에 사로잡혀 안절부절못한다.
사건 현장에서도 ‘그게 사실이라면 어떻게 될까?’라는 질문을 몇 번이고 되뇐다.
경찰이라는 직업에는 알맞겠지만 일상에서는 쓸데없는 버릇이다.


이성민은 소가 여물 씹듯 무한히 되새김질하는 기억 때문에 김택록을 연기했다.
"주변 인물 하나하나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고 전했다.
"이전부터 일기를 써온 인물이다.
수첩에 연도별로 기록했을 만큼 결벽 성향이 강하다.
대본을 읽으면서 형사라는 직업과는 잘 어울리나 자신과는 그렇지 못하다고 여기는 지점이 있었다.
어쩌면 친구가 파놓은 함정에 빠지는 이유일 수 있겠다 싶었다.
사실상 완벽을 추구하는 성격 때문에 딜레마에 빠지는 이야기니까."



강한 신념은 때때로 특정 사건을 과거의 비슷한 사건처럼 보게 한다.
평온한 상태에서는 손쉽게 바로잡을 수 있다.
반면 심신이 지쳐 있거나 짜증 나는 일이 반복되면 한동안 매달려 질질 끌려가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친구는 그런 위험에서 김택록을 건져내는 인물이다.
협박적 메시지를 보내면서 과거의 사건 조작과 방관을 매섭게 꼬집는다.


인간은 자각만으로도 신념을 바꿀 필요성을 느낄 수 있다.
‘내가 이런 생각이 있어 지금껏 이렇게 받아들였구나’라고 인지하는 순간 세상이 다르게 보여서다.
이성민은 이 과정을 여러 장면에 걸쳐 점진적으로 보여준다.
때로는 중의적 표현으로 다양한 해석의 여지도 남긴다.
낚싯배에서 국진한(진구) 신임 과장과 나누는 대화가 대표적인 예다.
친구가 아닐까 의심하면서도 비슷한 처지에서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본다.


"너 여기 왜 왔냐?" "무슨 말씀이세요?" "아니, 너 같은 엘리트가 이 촌구석에 왜 왔냐고. 뭐 먹을 게 있다고." "웬 급 관심?" "발령이 아니라 자원이라며?" "아니, 거기까지 아셨으면 내가 뭣 모를 때 청장 모가지 날린 것도 아시겠네. 회사에서 역적이라는 것도. 본청에 있을 때 계속 압박받았어요, 옷 벗으라고." "그러니까 왜 여기냐고." "제가 사실 금오초등학교 후배예요. 집안일 때문에 어렸을 때 한 2년 정도 여기 내려와서 살았어요. 지금은 와이프랑 관계도 안 좋고, 좀 쉴 겸 해서 내려왔는데 덕분에 쉬지도 못하네요."



이어지는 장면에서 김택록은 처음으로 속사정을 털어놓는다.
이성민은 "또 다른 나를 바라보는 느낌으로 연기했다"고 말했다.
"인생 전체가 무너지는 와중이라 공통된 성질이 눈에 잘 들어올 수 있겠다 싶었다.
가족을 향한 미안함과 자기만의 원칙, 고독, 트라우마…. 그 공유가 시청자에게는 암시나 복선으로 전달되겠지만 김택록에게는 새롭게 눈을 뜨는 계기였을 수 있다.
"


국진한은 김택록의 인지와 행동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누구보다 잘 안다.
김택록도 국진한이 어떤 길을 걸어야 더 나은 미래를 맞이할지 꿰뚫고 있다.
트라우마나 성장 내력을 거스른 추정이 아니다.
인지의 객관화로 내린 결론이다.
‘형사록’은 이 단계를 넘어 두 사람을 서로의 거울로 조명한다.
각자 눈앞의 문제를 정확히 볼 수 있는 환경을 제시한다.


평소와 다른 방식으로 해결책을 찾는 행위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김택록에게는 신념을 바꾸는 일이기까지 하다.
신념은 나름의 의미가 쌓여 생긴다.
어릴 때는 자기를 지키는 방법이었을 수 있다.
지금도 그대로 통용되기에는 무리가 있다.
당시의 나와 현재의 내가 처한 상황은 다르다.
이성민은 뒤늦게 깨닫는 김택록을 거울로 삼고자 한다.
여전히 빗속에서 내뱉은 대사를 잊지 못한다.
"후회하고 상처뿐인 늙은 경찰만 남았다.
넌 돌아갈 수 있어. 아직 기회 있어."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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