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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생명 간 관계 맺기… 비로소 존재하는 인간의 정체성 [박미란의 오프 더 캔버스]
세계일보 기사제공: 2023-06-04 15:00:00
민지훈, 사물들의 우주에서 함께 숨쉬기
택배상자 여정 담은 ‘상자의 기억’ 4작품
‘기억이란 무엇인가’ 근원적 물음 풀어내
직접 제작 그림 그리는 기계 ‘페인팅 머신’
아날로그·디지털 결합 자신 정체성 투영
지하의 삶 ‘언더그라운드 랩소디’ 기획
숨쉬기 위해 환풍기 등 기계와 공존 필수
복잡한 관계망 속에서 인간은 작은 존재
동식물·사물과의 존재적 위계 평평해져


오늘의 신문을 메운 활자들, 지면을 비추는 전등불과 흐린 눈에 덧대어 둔 안경알 한 쌍. 글쓰기에 관여하는 펜과 종이, 자판과 스크린, 인쇄하는 기계들…. 이토록 사물로 가득한 세상 속에서 가만히 숨 쉬어 본다.
아마도 그들이 지니지 못한 영혼의 숨, 지구를 활보하는 생명의 숨을.

인공지능 기술의 발전에 따라 소설에나 등장하던 불온한 상상들이 실체가 되어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영국의 수학자이자 논리학자 앨런 튜링(1912∼1954)이 1948년과 1950년 논문을 통해 ‘기계는 생각할 수 있다’는 주장을 내놓았을 때 세상은 그리 고심하지 않았다.
20세기 말이면 인공지능이 보편성을 얻을 것이라던 예견보다 한발 늦은 2014년, 그가 고안한 ‘튜링 테스트’를 통과한 첫 인공지능 챗봇이 등장했다.
최근에는 챗GPT 등 인간과의 대화에 능숙한 인공지능이 다수 개발되면서 기계 지능의 윤리에 관한 문제의식이 연일 화두다.

튜링은 인간처럼 대화를 나눌 수 있다면 컴퓨터가 지능을 가졌다고 보아야 함을 주장했지만, 일각의 전문가들은 인공지능이 단순히 ‘기계적으로’ 사고한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문득 궁금해진다.
우리의 유기적인 생각과 감정은 무엇으로부터 비롯하는 것일까. 태어나 세상의 빛을 본 모두는 무척이나 오랜 시간에 걸쳐 적응하고 학습하지 않았던가. 그것은 기계가 수행하는 데이터 수집과 정말로 완벽하게 다른 일일까.

우리는 어쩌면 숨 쉬는 사물이 아닐까. 나의 몸이 생동하고 생각하는 까닭은 책상이나 의자보다 조금 더 견고한 알고리즘으로 형성된 기계라서가 아닐까. 너른 세상을 메운 수많은 존재 가운데 우리는 진정 위대한 숨을 쉬고 있을까.

‘상자의 여정’(2021) 설치 전경
◆상자는 기억할 수 있을까

작가 민지훈(39)은 사물, 기계, 그리고 인간 존재에 대한 물음을 미술의 방식으로 풀어낸다.
그가 2021년부터 2023년까지 진행한 프로젝트 ‘상자의 기억’은 택배 상자를 소재로 한 4가지 서로 다른 작품으로 구성된다.
가장 앞서 제작한 ‘상자의 여정’(2021)은 종이에 스탬프용 잉크로 채색된 총 45점의 드로잉 연작이다.
4개의 상자 안에 종이와 잉크를 묻힌 구슬을 넣은 채 타인과 택배로 주고받는 방식으로 제작됐다.
목적지와의 거리뿐만 아니라 택배사의 동선과 기사의 움직임, 그날의 물량 등 다양한 우연성이 개입한 결과물이 작품이 된다.

‘상자의 기억’(2021) 스틸 컷
이어 만든 ‘상자의 기억’(2021)은 단채널 영상과 음향으로 구성한 11분짜리 비디오 작품이다.
상자 한편에 카메라를 부착하여 이동 과정을 녹화하도록 했다.
운송 업체의 컨베이어 벨트, 트럭의 내부, 근로자의 일상을 상자의 시점에서 비추어 보여준다.
세 번째 작품 ‘부유하는 상자들’(2021)은 9개의 택배 상자와 기계 장치, 조명, 2채널 음향으로 구성한 설치다.
‘상자의 기억’에서 수집한 정보에 기반하여 배송 중의 움직임과 소리를 재연했다.
높다란 기계 장치 위에 얹힌 상자들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흔들린다.
‘부유하는 상자들’(2021)
작가는 ‘부유하는 상자들’을 해체하여 유리 진열대 안에 하나씩 재배치함으로써 프로젝트의 마지막 작품 ‘배송일지’(2023)를 완성했다.
독립 유리 진열대에 자리 잡은 개별 상자들은 택배 발송 이전과 사뭇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표면에는 불분명한 출처의 먼지가 내려앉았으며 대부분의 모서리는 닳아 구겨진 채다.
기억이란 무엇인지 질문해 본다.
저장된 과거의 경험을 꺼내어 보는 정보 처리의 행위일까, 또는 삶 속 부단한 경험이 몸에 각인하는 흔적일까. 민지훈의 상자들은 제 나름의 방식대로 기억하는 것일까.

◆아날로그 페인팅 머신 ? 기계가 되기

2018년 민지훈은 자신만의 ‘페인팅 머신’을 제작하여 선보였다.
요즈음 화제인 이미지 생성 인공지능과는 다소 다른 접근 방식으로서다.
민지훈의 그림 그리는 기계는 산업혁명 시대 기계장치처럼 매우 커다랗고 투박한 모양새를 띤다.
인간과 기계 간의 관계 맺기와 그로써 변화하는 정체성에 관해 다루고자 했다.
‘그리기’라는 아날로그적 행위의 물성(物性)을 유지하되 작업 과정에 개입하는 사람의 주관적 선택을 최소화하고, 대량생산이 가능한 방식으로 운용되는 기계 구조물을 구상하며 제작했다.

민지훈의 ‘페인팅 머신’이 흥미로운 것은 작가 자신이 이해하고 통제할 수 있는 범주의 기계를 제작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는 점이다.
아날로그와 디지털이 적당히 결합된 구조물은 마치 1980년대 생인 스스로의 정체성을 투영하는 것 같다.
기이한 발명가처럼 기계 버튼을 조작하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면 ‘미디어는 인간 신체의 확장’이라고 한 미디어 철학자 마셜 매클루언(1911∼1980)의 통찰이 떠오른다.
‘페인팅 머신’을 이용해 그림을 그려 나가는 과정 가운데서 기계는 몸의 확장이 되고, 인간은 작동 원리의 일부가 된다.
‘페인팅 머신’(2018) 설치 전경. 민지훈 제공
이듬해 제작한 ‘헬로 아이 엠 어 키보드’(2019)는 영상 설치작업이다.
전시공간의 벽면에는 허공에 타이핑하는 작가 자신을 촬영한 영상이 재생된다.
그 곁에 놓인 나무 좌대 위의 키보드는 인간 없이 자동으로 두드려지는 모습을 선보인다.
의미 없는 움직임을 행하는 사람과 스스로 자판을 작동시키는 키보드를 나란히 병치함으로써 글쓰기라는 행위의 주체에 관해 질문을 던지는 작업이다.
키보드가 타이핑하는 것은 ‘안녕 나는 키보드야’라는 문장이다.
이때 인간은 기계의 자기소개를 위해 움직임을 제공하는 도구가 된다.

단채널 영상작품 ‘파라다이스’(2020)는 기계를 이해하고자 노력하는 작가의 모습을 담는다.
야경을 바라보며 도시라는 기계의 메커니즘을 상상하고 자연의 부속물로서 자신의 존재를 돌아보며, 그림 그리는 기계에 스스로의 정체성을 투영하여 보는 것이다.

◆사물들의 우주에서 함께 숨쉬기

“지하의 삶은 지상에선 불필요한 것들과 상호의존하는 형태를 지닌다.
‘지면 아래’에 구축된 특수한 공간, 외부와 단절된 ‘지하’라는 공간은 일상의 시야에서 가려져 있지만 우리 사회의 한 부분을 차지한다.
이번 ‘언더그라운드 랩소디’ 프로젝트는 지형학적으로 아래에 있는 삶, 우리의 시야에서 가려진 삶에 대한 이야기다.


민지훈의 ‘언더그라운드 랩소디’(2023) 프로젝트는 아직 실현되지 않은 기획안이다.
볕이 들지 않고 자연적인 환기가 불가능한 지하공간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다양한 사물 및 기계와의 공존이 필수적이다.
해당 프로젝트는 ‘환풍기 호흡 훈련’이라는 제목의 두 가지 연작으로 구성된다.
각각의 작품은 공기를 순환시키는 기계장치를 방범창 등의 요소와 함께 설치하는 방식으로 제작된다.
기계가 만들어낸 비눗방울이 구조물 상단의 방범창을 통과해 나가는 모습을 지하에 사는 사람의 숨쉬기에 투영하는 시도다.
결핍과 단절의 상징인 지하실에서 어렵게 호흡하는 기계는 자본주의 사회 속 소외된 개인의 초상을 연상시킨다.

생명에게 필수적인 호흡의 행위가 환풍기라는 사물에 의존하여서만 가능한 지하의 환경을 상기해 본다.
이내 우리는 생물과 무생물이 복잡하게 얽힌 관계망 속에서 살아가는 작은 존재임을 깨닫는다.
동시대 철학자 레비 브라이언트와 그레이엄 하먼 등은 사물 또는 객체(object)의 행위성을 강조하는 ‘객체 지향 존재론’을 정교하게 구축했다.
브라이언트는 이어 자신만의 ‘기계 지향 존재론’을 전개시킨다.
후자의 철학은 기계라는 개념 자체를 새롭게 설정하기를 시도한다.
사람의 몸이나 길가의 나무처럼 유기적인 존재들 또한 복잡다단한 부속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기계의 범주에 포함시키는 것이다.

이로써 인간과 동식물, 사물의 존재적 위계는 평평해진다.
주체와 객체의 구분 자체가 안갯속으로 사라진다.
일련의 사물 중심 철학이 최근 각광받는 까닭은 환경에 대한 반성적 사유와도 긴밀히 연관된다.
인간과 세상의 관계를 새롭게 고찰하는 일은 우리로 하여금 인간중심주의적 사고로부터 탈피하도록 돕는다.
사소한 물건과 생명들, 자연 간 복잡다단한 관계 맺기에 의하여 비로소 존재하는 인간의 정체성을 되돌아보도록 함으로써다.

민지훈은 추계예술대학교 미술학과 서양화 전공 학부와 대학원을 졸업했다.
2020년 대림창고, 2021년 빈칸 을지로, 2022년 관훈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선보였다.
예술공간 의식주, 인디아트홀 공, 강북문화재단, 갤러리 이마주, 제이무브먼트 갤러리 등이 개최한 단체전에 참여했다.
2023년 홍티예술촌의 입주 작가로 선정되어 부산에서 거주 및 작업하고 있다.
박미란 큐레이터, 미술이론 및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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