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사태’ 때 정말로 그렇게 사람이 많이 죽었나?” 1년 반쯤이 지난 어느 봄날, 어떤 교수의 연구실에 들렀을 때 교수는 그에게 호기심과 반신반의하는 눈길로 물었다.
“자네도 직접 봤어?”
차마 대답할 기력마저 없었다.
광주를 떠난 지 두어 달 만인 그 즈음, 그는 이미 당혹감에 빠져 허둥거리고 있었다.
믿어지지 않았다.
그 엄청난 참상과 비극이 서울에선 고작 과장된 유언비어 혹은 소문으로만 존재하고 있다니. 신군부의 비상계엄 확대에 맞서 싸웠던 광주 사람들에겐 피눈물이 쏟아지는 ‘현실’이 서울에선 그저 한낱 믿기 어려운 흉흉한 ‘소문’일 뿐이라니.
신촌에 위치한 대학원에 진학한 소설가 임철우는, 1982년 처음으로 서울 생활을 시작했다.
마포구 신수동의 작은 시장통 골목 끄트머리에 붙어있는 게딱지만한 집에서 혼자 자취를 했다.
한 해 전 신춘문예로 등단한 그였다.
서울 생활을 시작하자마자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게 아니라고, 당신들은 아예 모르고 있다고. 흥분해 입에 게거품을 물고 그날의 일을 얘기해 주다가 문득 주위를 돌아다보면 모두들 잠자코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호기심과 반신반의, 혹은 냉소와 거부감을 감춘 냉랭한 눈빛들. 그 차분하고 이성적인 시선 앞에서 숨이 컥컥 막히고 가슴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공감하다가도 어느 부분에선 믿지 못하겠다는 눈치였다.
언젠가부터 술에 취하면 목소리가 높아지고 말과 몸짓도 위태롭게 사나워졌다.
그 냉정하고 영리한 눈빛들을 빛내며 마주 앉아 있는 이들의 모습에 끝없이 절망하고, 분노하고, 난폭해졌다.
그때부터 눈물도 부쩍 흔해졌다.
길을 걷다가도 오월 광주 생각만 하면 눈물이 쏟아지고, 남쪽 사람들만 생각하면 울음이 북받쳤다.
혈육과 이웃을 학살한 악당이 정의로운 통치자로 변신해 군림하는 불의한 세상. 신문도 방송도 하나같이 양순한 벙어리처럼 입을 막고 있는 부조리한 세상. 피눈물 흘리는 시민들을 부둥켜안고 위로하고 손잡아 일으켜주기는커녕 ‘폭동, 폭도, 불순분자’라며 손가락질하며 차갑게 등을 돌리고 있는 비열한 세상.
잠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보름 가까이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니 두 다리가 구름 속을 떠도는 것 같았다.
어느 날 밤, 가슴이 터지고 머리가 빠개질 듯한 압박감에 방바닥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러다간 진짜로 미치고 말겠구나. 방바닥에 다시 엎어지자 목구멍에서 울음이 폭포처럼 터져 나왔다.
마치 팽창한 공기가 고무 튜브를 찢어내며 격렬하게 터져 나오듯. 이불을 뒤집어쓴 채 한바탕 통곡을 토해내자 조금씩 숨이 쉬어졌다.
이때 자신도 모르게 어떤 기도가 터져 나왔다.
“하느님, 제가 그날을 소설로 쓰겠습니다.
목숨을 바치라면 기꺼이 바치겠습니다.
저를 도와주십시오!”
1982년 봄, 소설가 임철우는 자신과 약속을 했다.
그것은 자신의 전 존재를 건 약속이고 기도였다.
그날 이전까지 광주 이야기를 단편으로 써 왔지만, 오월 광주를 장편소설을 통해서 총체적으로 담으려는 시도를 해보지 못했다.
그건 말 그대로 엄청난 작업일 터였다.
송기숙, 황석영, 문순태 같은 기라성 같은 선배 작가들이라면 모를까, 고작 이십 대를 갓 벗어난 자신 같은 풋내기 작가에겐 가당치도 않은 욕심이라 여겼다.
그런 어떤 마음의 한계를 넘어서, 장편소설 『봄날』을 위한 여정이 시작된 것이다.
세세한 상황일지나 전개 과정, 사건의 실상, 책임자 규명 같은 객관적 사실에만 국한되는 게 아니라, 오월 광주의 열흘과, 사람들과, 그들의 마음을 온전히 복원하고 호출해내고 싶었다.
수십 만 시민이 열흘간 겪어낸 공포와 분노, 고통과 슬픔, 절망과 감격, 집단과 개개인의 체험의 총체를.
닥치는 대로 자료를 모았다.
틈틈이 사람들의 얘기를 모으고, 메모하고, 신문과 잡지, 유인물 등 오월 광주에 관한 것이라면 걸신들린 사람처럼 그러모았다.
그럼에도 진상이 철저히 왜곡, 은폐되는 시대여서 자료와 정보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특히 계엄군 자료가 전무했다.
1988년 국회의 광주청문회를 기점으로 여러 해에 걸쳐 수사 자료집, 군 보고서, 군 작전일지 등이 나오기 시작했다.
“처음 7년은 다만 맹랑한 유언비어 혹은 과장된 전설이었고, 다음 3, 4년은 텔레비전 속의 제법 요란한 국회 청문회 연속극 같은 것이 되더니, 이제는 너나없이 이쯤해서 역사 속의 해묵은 일지 정도로 정리되어지기를 바라고 있는 듯하다.
”(『봄날』, 제1권, 9쪽)
시간이 흘러갔지만 오월 광주를 본격적으로 다룬 작품은 나오지 않았고, 정치적으로 대충 청산해버리자는 분위기로 흘러갔다.
더 이상 지켜보고 있을 수 없었다.
방대한 자료집 『광주민중항쟁 사료전집』 속에 담긴 500여 명의 증언과 그 외 자료에서 찾아낸 증언들을 포함해 700여 명의 증언록부터 꼼꼼히 읽어가면서 카드분류 작업을 해 나갔다.
날짜/ 시간/ 장소/ 사건 유형/ 증언자 고유번호/ 자료 출처 등으로 따로 분류하고, 인물 군은 시민군/ 시민/ 계엄군/ 청소년/ 여성 등으로 세분해 기입해 정리했다.
증언록 분류 작업이 1년 만에 끝났을 때 항쟁 기간의 전반적 상황을 구체적으로 그려낼 수 있게 되었다.
무엇보다 초반 사나흘 벌어진 상황들이 일목요연해졌다.
이를 기초로 다른 자료, 특히 ‘군 작전일지’ 등 여러 관련 자료들과 비교 대조를 통해 최대한 객관적 사실을 재구성, 재현하고자 시도했다.
도시 전역에서 소용돌이치는 시민들의 의식과 정서와 충동. 그들이 폭포처럼 뿜어내는 공포와 분노, 증오, 절망, 슬픔. 군중과 계엄군 사이에 다급하게 돌아가는 매 순간의 상황과 개별적 정황들. 대규모 군중이 서로 다른 공간에서 엮어내는 숨 가쁜 호흡, 열기, 몸짓, 심장의 박동 소리......
소설가 임철우는 1980년 오월 광주의 열흘 낮과 밤의 진실을 핍진하게 그린 7500매 분량의 다섯 권짜리 대하소설 『봄날』(문학과지성사)을 1997년 발표했다.
광주민주화운동 발발 17년만이었고, 전편 격인 『붉은 달, 불의 얼굴』의 연재 10년 만이었다.
광주에서 전당포 일을 했지만 현재는 그만둔 무석과 명치, 명기, 명옥의 아버지 원구의 고민으로 시작하는 소설은 5월18일부터 5월27일까지 오월 광주의 열흘 낮과 밤을 날짜별 시간대별로 따라간 다큐멘터리 형식을 취하면서 인물들과, 그 인물의 마음을 따라간다.
시민아파트에서 미순과 함께 살고 있는 은숙, 집안의 실질적인 가장으로 병원 간호사로 일하는 수희와 가족, 함평목공소를 운영하는 서씨, 윤상원을 모티브로 한 들불야학의 윤상현과 시민군, 경찰과 추 상사를 비롯한 계엄군.... 시민들은 계엄군의 압도적인 폭력 앞에 분노하고 절망하지만, 두려움과 불안 속에서도 서로가 서로의 희망이자 빛이 되면서 마침내 항쟁의 불씨를 피어 올린다.
“이젠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 그 엄청난 공포와 슬픔, 그러나 차마 대적하기엔 너무나 압도적이고 위압적인 상대 앞에서 어쩔 수 없이 억누르고 있어야만 했던 간절한 분노와 복수에의 소망―그것이 이젠 결코 몇 사람 소수의 것만은 아님을 확인했다는 사실. 바로 그것이 이 순간 그들 모두를 숙연하게 하고 감동하게 만들고 있었다.
아주 짧은 동안, 알 수 없는 침묵이 주위를 감돌고 있었다.
잔잔하면서도 소리 없이 끓어오르는 어떤 엄청난 힘을 아슬아슬하게 감추고 있는 듯한 그 침묵 속에서, 그들은 불현 듯 저마다 이상한 감동을 경험하고 있었다.
불씨.”(『봄날』, 제2권, 177쪽)
시민들은 일시적으로 계엄군을 시 외곽으로 밀어내는 데 성공하지만, 결국 계엄군에 포위돼 고립된다.
연일 궐기대회를 열어서 결의를 다지지만 계엄군이 진압은 점점 임박해온다.
계엄군이 몰려오던 5월27일 새벽 전남도청에서 시민군 지도자 윤상현은 스스로에게 묻고 답한다.
“이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 설사 이 순간엔 우리의 싸움이 패배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결코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일 뿐이야. 훗날 다른 누군가가 이 싸움을 다시 시작하겠지. 그래, 아무것도 헛된 것은 없어. 우리가 꿈꾸었던 것, 사랑하고 소망하고 투쟁했던 것, 진정 그 어떤 것도 헛된 것은 없어....”(『봄날』, 제5권, 401쪽)
총체적이고 정확한 『봄날』은 오월 광주를 대표하는 증언 문학으로 자리매김해 왔다.
한국 작가로 처음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한강 작가도 대표작 『소년이 온다』를 집필하기 위해 증언록과 사진첩 등을 읽은 뒤 『봄날』을 읽었다고 밝힐 정도였다.
소설가 임철우는 왜 비상계엄에 맞섰던 오월 광주를 그려야만 했을까. 44년 만에 다시 비상계엄이 선포된 오늘의 한국 사회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그의 작가적 여로는 어디로 향하고 있을까. 임 작가를 지난 13일 제주 한라병원 옆 커피숍에서 만났다.
―전편 격인 『붉은 산, 흰 새』를 1988년 연재하면서 작품을 쓰기 시작했다고 했는데.
“신군부가 5.18을 일으켰지만 큰 흐름에서 보면 분단구조에서 발생한 것이라고 봤다.
1976년 고향에서 있었던 간첩 사건부터 시작한 분단 문제를 이야기하려 했다.
오월 광주에서 상상도 못한 지옥도가 펼쳐지는 것을 보고도 시민들이 미 제7함대가 한국으로 오고 있다며 미군을 구원자로 생각하거나, 신군부가 북한이나 간첩이 사주해 폭동을 일으켰다는 식으로 프레임을 씌워 국민들을 광주에서 등 돌리도록 유도했다.
나중에 지만원 같은 사람도 북한군이 광주에서 소요를 일으켰다고 주장했고. 신군부나 정권은 반대세력이나 저항세력을 빨간색으로 칠해버리는 식으로 분단 이데올로기를 철저히 이용했다.
저는 분단 구조의 모순을 빼놓고 오월 광주를 이야기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
―대작이고 사안의 성격상 어려움이 적지 않았을 텐데. 무엇이 가장 어려웠는지.
“5월18일부터 21일까지 항쟁의 초반 사흘을 그려내는 일이 가장 어려웠다.
계엄군이 도청을 버리고 시 외곽으로 철수한 뒤부터 진압이 완료되는 27일 새벽까진 비교적 상세히 자료가 나와 있다.
공수부대 출현을 기점으로 광주 전역이 순식간에 엄청난 소용돌이에 휩쓸리게 되는 사흘은 시민과 계엄군 간의 동시다발적 충돌로 아수라장이 된 상황이었다.
자료는 절대적으로 부족하고, 그나마 단편적이다.
항쟁의 진정한 의미와 가치, 위대함의 탄생하는 지점이기도 하고, 반대로 의심과 불신에 찬 시선을 보내는 사람들이 사실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지점이기도 했다.
...에이, 설마 어떻게 공수부대가 침략군도 아니고 같은 사람인데 그렇게 끔찍하게 죽일 수 있어? 평범한 사람들이 어떻게 그렇게 맨손으로 저항을 한다고? 아니, 비무장 시민들만의 자발적인 저항이었다고? 이렇다 할 지도부도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평범한 시민들이 일시에 거대한 군중으로 변해 싸울 수 있다고? 그 무서운 공수부대에 맞서 맨 주먹으로? 제가, 소설이 궁극적으로 맞서 싸워야 할 대상은 불신과 의심에 찬 시선들이었기에, 약점을 보여선 절대 안 된다고 생각했다.
정확해야 했다.
사소한 실수나 잘못이 있다면 여기에서 모든 것을 허위, 과장, 왜곡이라고 역습해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
―마지막 5권에서도 벽에 부딪쳤다고 들었다.
“윤상원 선배가 전남도청에서 마지막 저항하는 장면을 써야 하는데 못쓰겠더라. 그는 마지막 순간 무슨 생각을 하고, 동지들과 무슨 이야기를 나눴으며, 어떤 마음으로 죽음을 준비했을까. 눈을 감기 전 마지막 순간 무엇이 보였을까. 계엄군이 들어오고, 시민들은 집 안에 있는,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절박한 외로움의 순간, 그는 무엇을 떠올리고 어떤 감정이었을까. 그것은 영원히 간직해야 할 인간의 어떤 빛 같은 것, 허약한 육신 안에 갖고 있는 어떤 빛 같은 것이었을 것이다.
5.18 정신의 핵심이 여기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의 몸 안으로 들어가서 그의 마음을 느껴야 했다.
너무 힘들고 고통스러웠다.
”
도저히 버티기 힘들어 혼자 고속버스를 타고 광주 망월동 묘지를 찾았다.
이미 저녁이 다 돼 있었다.
전에 수없이 찾아갔던 묘지인데도 윤상원의 비석을 찾을 수 없었다.
어둠 속에서 눈을 부릅뜨고 묘비를 하나하나 손으로 짚어가며 찾았다.
거의 반시간 넘게 묘지를 빙빙 돌아다녔지만 찾을 수 없었다.
귀신에 홀린 것 같았다.
그래서 생각했다.
나를 거부하는 거라고. 우리가 못 다한 말을 대신 전해 줄 자격이 너한테는 없다고, 그러니 그냥 돌아가라고. 그는 엉엉 통곡하면서 말했다.
...당신들, 제발 나한테 들어오라고. 내 몸 안으로 들어오시라고. 내가 당신들을 대신해 당신들의 입이 되고 목소리도 되어 소설로 쓸 테니까 제발 나 좀 도와주시라고. 나를 받아주시라고.
어느 순간 윤상원의 비석이 보이기 시작했다.
바로 조금 전까지 몇 번이나 확인하고 또 확인했던 그 비석인데도 안 보였던 것이다.
그는 집필실로 돌아와서 울면서 썼다.
글은 나는 듯이 나아갔다.
“...서울이여! 부산, 대전, 인천, 대구여! 당신들이 달려와 주기를 우리는 기다렸다.
저들의 총칼에 쓰러져가면서도, 맨주먹만으로 수백 수천의 총구를 향해 미친 듯 달려 나아가면서도, 참혹하게 죽어간 자식의 시신을 껴안고 가슴이 찢어지도록 몸부림치고 통곡하면서도, 그래도, 그래도 그 기다림이 있었기에 우리는 아직 절망하지 않을 수 있었다.
”(『봄날』, 제5권, 398쪽)
―왜 다큐멘터리가 아닌 소설이었는가.
“역사 서술이나 언론 보도는 사실만 전달한다.
아무리 명확하고 세밀하고 풍부한 것을 전달해도 사실을 정리하는 것에 불과하다.
정작 중요한 사람과 사람의 내면이 빠져 있다.
역사가 어떤 상황의 외부를 그린다면, 문학은 사람을 중심으로 인간의 내면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때 그 자리에 누가 있었고 무엇을 했고 무엇을 느꼈지 말할 수 있다.
문학의 상상력에서 총체성이 나온다.
소설의 힘은 존재하지 않았던 그 시간 그 장소 그 현장에 있는 것처럼 체험하고 공감하게 만드는 것이다.
문학의 존재 이유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쓴 것이 『봄날』이었다.
”
―하인리히 뵐(Heinrich Boll)의 방법에서 도움을 받았다고 했는데.
“오월 광주의 수천수만 상황들을 어떻게 총체적이면서도 일관성 있게 한 편의 소설로 담아낼 것인가를 고민하다가 하인리히 뵐의 소설이 문득 떠올랐다.
뵐은 제2차 대전 막바지 며칠간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에서 장 별로 나눠 다수의 인물을 화자로 등장시키는 다중시점 방법으로 전장의 현실을 총체적으로 다룬다.
오월 광주의 열흘간을 최대한 진실에 입각해 입체적이고 총체적으로 담아내기 위해서 다큐멘터리 형식을 사용하면서 다중시점 방법을 적용했다.
”
―발표한 뒤 반응은 어떠했는지.
“『봄날』 5권이 완간된 직후 어느 저녁,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 어야, 나 송기숙이네.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때까지 송 선생이 직접 저에게 전화를 해오신 건 처음이었다.
오래 뵙지도 못했는데 저녁 시간에 무슨 일인가 싶었다.
... 어야, 철우. 자네가 참으로 큰일을 해냈네. 다른 무엇보다도 5월18일부터 20일까지 초반 사흘을 어떻게 이리 완벽하게 재현해 놓았는가. 실은 그동안 우리 연구소에서도 바로 그 부분을 제대로 정리해내려고 무진장 애를 써보다가 이제는 거의 포기하다시피 한 참인데, 그걸 자네가 혼자서 해냈구만 그래.... 감격했다.
『봄날』을 쓰고 나서 받아본 것 중에서 최고의 칭찬이었다.
그 말씀을 듣는 순간, 그간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구나 생각했다.
”
―『봄날』은 작가의 작품 세계에선 어떤 의미가 있을지.
“거의 전부나 마찬가지인 중심이다.
제가 쓴 게 아니라 뭔가 대신해 쓴 것 같은 느낌이다.
그 봄날 열흘 동안 광주 사람들의 에너지나 혼이 저에게 쓰게 했다고 생각한다.
그 뒤로 단 한 번도 그 작품을 읽어본 적이 없었다.
무서워서 못 읽겠더라.”
―최근 다시 비상계엄 사태로 큰 파문이 일고 있는데.
“이번 계엄령 사태를 뒤늦게야 알았다.
그날 몸살이 나서 약을 먹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가 아침에 뉴스를 확인했다.
계엄령이란 글자가 눈에 들어온 순간, 1980년 5월 그날이 뇌리에 겹쳐졌다.
무장한 군인들 앞을 막아선 시민들 모습이 화면에 비쳤을 땐, 울컥 눈물이 솟구쳤다.
부패한 권력의 총칼에 맨 앞장서서 맞서는 건 언제나 평범한 시민들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떠올린 까닭이다.
최근의 모습과 1980년 광주와 다른 점 하나를 들어보라면 무엇보다 스마트폰이 아닐까. 1980년 그날 계엄군에 포위된 광주는 언론도 기자도 카메라도 존재하지 않는, 그래서 아예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도시였다.
장벽 저편에서 벌어지는 참상을 눈과 귀를 빼앗긴 국민들은 전혀 알 수 없었고, 그 이후로도 광주의 진실은 오랫동안 유언비어 취급을 받아야 했다.
그런데 44년 뒤 국회 앞으로 달려온 시민들의 손에는 휴대폰이 존재했다.
이 현장의 시민들은 곧 수백 개의 언론사이자 수 천 명의 기자들이었고 카메라였다.
생생한 진실이 전 국민에게 실시간으로 중계되고 공유되었다.
전두환의 정치를 찬양하던 현직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하고 그것을 국회가 해제하기까지의 과정은 실로 기적 같은 일이었다.
하지만 이것만은 잊어선 안된다.
기적을 불러온 진짜 주인공은 휴대폰의 위력이 아니라, 목숨 걸고 그곳까지 달려 나와준 시민들의 정의로운 용기와 행동이었음을.”
1973년 시작된 대학 생활은 혼란스럽던 그의 삶을 바꿔놓았다.
학교생활은 물론 가족과의 관계도 많이 안정되었다.
가까운 친구들도 생기고, 무엇보다 다양한 문학 수업을 듣고 책을 마음껏 읽을 수 있었다.
영미권의 고전과 현대 작품들을 접하게 되면서 시야도 넓어지고 다양한 소설 형식 기법도 알게 되었다.
따로 소설 지도를 받진 않았다.
혼자 간간이 습작해 단과대학 교지에 짧은 소설을 발표하기도 했다.
작가가 되겠다는 뜻을 가져본 것은 없다.
부연한다면, 재능에 어떤 확신을 가질 계기가 없었다.
사춘기까지 꿈은 초등학교나 시골 중고등학교 교사였다.
한적한 시골에서 문예반 교사를 하면서 좋아하는 책을 읽고 가끔 작품을 써서 신춘문예에 내보는 삶을 꿈꿨다.
그러니까, 그는 세 살 때부터 공무원이던 부모와 떨어져 할아버지 할머니 밑에서 자랐다.
남해안의 작은 섬 평일도. 전기도 없어 호롱불을 켜놓고 저녁밥을 먹고, 자동차는커녕 손수레 한 대 구경할 수 없는 가난한 섬이었다.
마당 구석에서 혼자 땅 강아지하고 놀거나 풀을 뜯어 혼자 놀거나 마루에 혼자 앉아 있곤 했다.
외로움이 몸에 배어 있었다.
또 하나의 원체험은 공포였다.
그가 자란 평일도를 비롯해 인근 섬 지역은 전쟁의 피해가 극심했다.
조부모를 비롯해 어른들의 입을 통해서 보도연맹 사건을 비롯해 현대사의 비극을 숱하게 들었다.
탁월한 이야기꾼이었던 조부의 무릎을 베고 누워 어른들이 주고받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곤 했다.
아홉 살 무렵, 조부모와 함께 광주로 올라와 가족과 한데 모여 살았다.
아버지와 형제들까지 낯설었다.
급격한 문화충격으로 도시 생활에도 적응하지 못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장롱에서 300원을 훔쳐 2박3일 동안 기차타고 목포까지 가서 돌아다니다가 돈이 떨어지자 집에 돌아왔다.
빈번히 반복되는 가출과 결석, 전학과 퇴학 처분.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내놓다시피 한 문제아가 되었다.
가출벽은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 계속됐다.
공부는 제대로 하지 않았지만 어릴 때부터 책 읽는 재미에는 푹 빠져 있었다.
대학을 졸업한 아버지 덕에 집에는 문학 책들이 많았다.
수십 권의 정음사판 『세계문학전집』을 비롯해 초등학교 때부터 소설을 닥치는 대로 읽고 혼자 공상에 빠지곤 했다.
고등학교 때에는 책을 보다가 뺏기고 교무실로 불려가기도 했다.
그렇다고 작가가 되겠다는 생각까진 해보지 못했다.
대학 2학년 봄, 민청학련 사건이 터지면서 독서모임을 함께 해왔던 선배와 동료가 구속되자, 여러 날을 아파 누운 끝에 휴학계를 제출하고 나주의 작은 산사로 들어가 1년을 틀어박혀 지내기도 했다.
1978년 8월 군 제대 뒤 복학해 4학년부터 문화운동에 뛰어들었다.
친구 고 박효선이 이끌던 마당극 단체 『광대』에 참여했다.
마당극 「돼지풀이」에서 단역을 맡아 피켓을 흔들거나 몇 마디 구호를 외치기도 했다.
친구가 몸담고 있던 ‘들불야학’에도 자연스레 들락거렸다.
하지만 1980년 오월 광주는 그의 운명을 송두리째 바꿔버렸다.
오월 광주가 끝난 뒤, 두어 달 동안 남해안의 작은 섬에 숨어 지내다가 9월에 돌아와 4학년으로 복학했다.
그는 이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아무 일도 하지 못한 채 살아남았다는 죄 의식과 부끄러움을 견딜 수 없었다.
오월 광주 이틀 전인 5월16일 점심 무렵 노동청 가까운 청산학원 앞 포장마차에서 윤상원 선배와 박용준 형, 친구 박효선과 함께 쭈꾸미 안주에 막걸리를 마셨는데. 세 사람은 망월동 묘지에 묻혀있는데. 그날 술자리에서 나눈 이야기는 세세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그들의 음성, 표정, 모습만 뚜렷하게 남아 있는데....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글쓰기밖에 없었다.
오월 광주를 떠올리며 소설가를 생각했다.
먼저 떠난 세 분이 혼자 살아남은 나에게 중요한 임무를 주고 가신 게 아닐까. 소설을 통해서 오월 광주를 전하겠다고 생각했다.
1954년 완도 평일도에서 태어난 임철우는 1981년 단편소설 「개 도둑」이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등단했다.
등단 이후 장편소설 『붉은 산, 흰 새』, 『그 섬에 가고 싶다』, 『등대』, 『봄날』(5권), 『백년여관』, 『이별하는 골짜기』, 『돌담에 속삭이는』 등을, 소설집 『아버지의 땅』, 『그리운 남쪽』, 『달빛 밟기』, 『황천기담』, 『연대기, 괴물』 등을 발표했다.
이상문학상, 대산문학상, 요산문학상, 단재상 등을 수상했다.
―첫 소설집 『아버지의 땅』에 실린 단편 「사평역」은 곽재구의 시 「사평역에서」가 모티브로 알려져 있는데.
“철거되기 전 서울 마포 와우아파트에 자취할 무렵이었다.
어느 가을날 저녁, 옥상에서 마포를 내려다보았다.
불빛이 아름다웠는데, 갑자기 눈물이 터졌다.
그 즈음에는 날마다 울며 시를 외우곤 했다.
김지하, 신경림, 강은교의 시와 오월시를 읽었고, 곽재구의 시 「사평역에서」를 좋아했다.
시를 외우다가 어떤 그림이 그려지고 풍경이 보였다.
허름한 시골 간이역의 풍경에서 소설이 나왔다.
그냥 줄줄 나와서 일주일 만에 써버렸다.
마치 이미 알고 있는 노래를 그냥 옮겨 적는 것처럼 써내려갔다.
일부러 소설 중간에 시의 문장을 넣기도 했다.
제일 아끼는 작품 가운데 하나다.
”
―특히 한강 작가가 중학교 3학년 때 「사평역」을 읽고 비로소 소설을 쓰고 싶다고 마음먹었다고 밝혀 화제가 됐는데.
“독자 누군가에게 제 작품이 감동을 주었다면 작가로서야 반갑고 행복한 일이다.
예술가는 누구나 다른 예술가의 수많은 작품으로부터 자양분을 얻어 성장하고 또 서로 영감을 주고받는다.
저 또한 작가 한강의 여러 작품들을 아끼고 사랑하는 독자이다.
(그런 한강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한 작가의 수상은 역시 같은 길을 가는 사람으로서 무척 반갑고 자랑스럽다.
이를 계기로 한국문학에 대한 관심이 더 높아지고 많은 훌륭한 작품들이 세계 독자들과 만나게 되리라 기대한다.
최근 인터뷰에서 한 작가가 남긴 말이 기억에 남는다.
시상식을 앞두고 엄청난 부담감에 시달리다가 문득 ‘이 상은 내게 주는 게 아니라 문학에 주는 상’이라고 생각하자 마음이 훨씬 가벼워졌다는 얘기. 과연 철저한 장인정신을 지닌 작가답구나 싶어서 새삼 감탄했다.
더러 노벨상의 중압감을 얘기하지만, 적어도 우리가 아는 작가 한강은 앞으로도 더욱 깊이 있고 아름다운 작품을 독자에게 선물해 줄 것임을 저는 믿는다.
”
―소설쓰기의 원칙이나 방법은.
“단편이 됐든, 장편이 됐든, 짧은 산문이 됐든, 제가 글 안에 완전히 녹아들어야 쓸 수 있다.
억지로 만들고 있다는 느낌이 들면 쓰기가 힘들어지고 좋은 글도 아니다.
제 안에서 체화돼야 작품이 된다.
하나의 작품을 쓰려면 오래 삭이고 녹인다.
그런 시간이 꼭 필요하다.
절에 가거나 골방에 처박혀 작품에 완전히 몰입해야 한다.
온종일 작품 안에서 공간과 인물, 상황에 빠지도록 의식적으로 노력한다.
자연스럽게 저에게서 우러나와서 쓴 작품은 저도 마음에 들고 독자들도 좋아하는 것 같더라.”
‘오월 광주에 관한 한, 시간 개념이 없다’는 그는, 인터뷰 도중 병이라고 스스로 자책하면서도 한두 번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무연한 듯 기다릴 뿐 대안이 없던 기자에게, 그 순간은 흑백필름 같은 어떤 순수나 본질로 돌아가는 시간이었다.
학교에서 퇴직한 임철우는 8년째 아내와 제주도에서 생활하고 있다.
일상은 되도록 얽매임 없이 느슨하고 느린 시간의 흐름에 몸을 맡긴 채 지내려고 한다.
오전 8시쯤 일어나 아침을 먹고 마을 도서관이나 단골 카페에 가서 두어 시간 정도 책을 읽거나, 아내와 함께 차를 타고 서귀포 시내로 나가서 장을 보거나 병원에 들렀다가 돌아온다.
점심 후엔 집에서 책을 읽고 텃밭과 마당의 풀을 뽑다가 오후 3시가 되면 개를 데리고 산책을 나간다.
글쓰기는 주로 저녁 시간에. 자정을 넘기기 일쑤지만, 오래 몸에 밴 습관이라 어쩔 수 없다.
대신 늦잠으로 부족한 수면을 보충한다.
세상은 자주 폭력과 증오를 가르치려 하겠지만, 단순하고 명료한 일상 속을 살아가려는 소설가 임철우는 포기하지 않고 삶과 글로써 희망과 소망, 그리움을 오래 희망해 갈 것이다.
흰 갈매기의 날갯짓을 보고 희망을 품는 명기처럼.
“그래, 절망하지 말자. 두려워하거나 증오하지도 말자. 이 추한 세상과 악과 폭력이 오직 절망과 증오만을 가르치려 할지라도, 나는 이제부터 희망을 배워 가리라. 인간과 삶을 향한, 가슴 벅찬 소망과 그리움의 노래를....”(『봄날』, 제5권, 437쪽)
제주=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사진=임철우 작가 제공, ⓒ성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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