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의 글은 무겁다.
그리고 비장하다.
직언(直言) 한마디에 목이 날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경서와 선현의 말을 인용해 기름을 잔뜩 먹인 후에 슬며시 할 말을 꺼내 든다.
“난 지금 목숨 내놓고 하는 소리야, 그러니 새겨들어”라는 장렬함은 덤이다.
읽기 영 부담스럽다.
우리 정서에는 ‘선비의 글’이 잔상처럼 남아 있다.
쉬운 말은 어렵게, 어려운 말은 더 어렵게 한다.
명언과 고사에도 목을 맨다.
덕적덕적 사족을 붙여 놓고 “글답게 썼다”며 자족한다.
간결하고 쉽게 쓰면 교양이 없다고 여긴다.
그래서 그런지 뻔한 유의어를 반복 나열하는 글이 유난히 많다.
사(士)의 자취가 가장 깊게 서린 곳은 법조계다.
정서도 그렇고, 문장도 그렇다.
법률 문장은 장황한 비문(非文)으로 가득하다.
어법에 안 맞는 일본식 조어와 주술 호응을 방해하는 만연체가 일반이다.
법조계가 국어 파괴에 앞장서고 있는 건 아닌지 우려될 정도다.
미국에서는 연방대법원 판결이 최고 명문으로 꼽힌다.
학교에서는 판결서로 논리와 문법을 가르친다.
법조가 일상과 유리되지 않고 함께 호흡하는 모양새다.
부러운 현실이다.
지난달 서울행정법원에서 이색 판결문이 나왔다.
재판부가 중학생인 당사자를 배려해 눈높이에 맞는 해설문을 제공하고, 당부의 말을 덧붙였다.
판결서를 구해 읽어 봤다.
좀처럼 볼 수 없는 경어체가 눈에 들어왔다.
문장마다 고심한 흔적이 역력했다.
어린 학생을 향한 재판부의 진심 어린 염려가 전해졌다.
아직도 원님 재판을 하는 하위 법관들이 남아 있는 현실을 고려할 때, 이 정도면 국민에게 감동을 주기 충분했다.
아쉬운 점도 있다.
부연·수식 어구를 반복하는 문장이 대표적이다.
“최근 학교라는 공간에서 학생들의 인간관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종류의 갈등이 교육적 해결과 공동체적 조정과 자치적 화해와 회복의 과정을 통해 제대로 해결되지 못하고”와 같은 문장이 여기 해당한다.
에서, 에서, 과, 과, 과. 보기만 해도 답답하다.
일본어 데키(てき)에서 유래한 접미사 적(的)도 남용된다.
공동체적, 자치적, 법률적, 교육적 등 불필요하게 많다.
이렇게 ‘-적’으로 둘러치면 문장이 게을러진다.
쓰는 사람이 알맞은 접미사를 찾는 수고로움을 덜한 까닭에, 독자는 능력껏 알아들어야 한다.
가뜩이나 법률 용어는 왜색(倭色)이 짙다.
문장까지 장황하면 읽는 사람이나 쓰는 사람 모두 고역이다.
어쩌면 판례 평석 범위를 문장 비평까지 넓혀야 할지 모른다.
재판 승복률을 높이려면 당사자 수긍이 필수다.
판결문은 평이하고 간결할수록 좋다.
그러면 법리가 까다로워도 이해할 수 있다.
단문으로 나누고, 문법만 잘 지켜도 읽기 훨씬 수월하다.
형식의 변화가 전달력을 좌우한다.
작지만 섬세한 개선이 필요한 영역이다.
그럼에도 법원이 스스로 문턱을 낮춘 점은 고무적이다.
첫술에 배부를 순 없다.
이런 판결이 자주 나와야 한다.
그리고 더 많이 가다듬어져야 한다.
법관은 주로 판단을 하는 사람이다.
판단받는 데 익숙지 않다.
문장을 비평하면 “판결의 본질은 그게 아니다”, “용어가 원래 그러니 어쩔 수 없다”는 반박이 대번 나온다.
속내에는 “네가 감히?”라는 뒤틀린 엘리트 의식이 있을지도 모른다.
자성 없이는 발전도 없다.
사법부 권위는 단번에 회복할 수 없다.
가랑비에 옷 젖듯 작은 혁신이 쌓여야 개혁이 완수된다.
물론 사법 행정을 개선하고, 법관 증원도 해야 한다.
하지만 거대 담론에만 몰두해선 안 된다.
그동안 사소하게 여긴 문제부터 점검해야 한다.
쉬운 판결문 작성처럼, 자그마한 실천이 쌓여 큰 변화를 이끌지 누가 알겠는가.
신성민 작가 겸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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