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장·최대 선거, 인도를 가다
6월 1일 6주간 총선대장정 마무리
선거인 명부에 이름 올려야 투표 가능
청년층 등록 비율 낮지만 갈수록 증가
“등록기한 이미 끝나” 아쉬움 표하기도
AI로 만든 딥페이크 영상 확산에 촉각
언론정보국서 ‘실시간 팩트체크’ 눈길
“일단 의심하고 봐… 쉽게 속지 않는다”
“국가 리더 안 바뀌면 부정부패 심해져”
“인디라 간디 독재에 선거로 맞서 승리”
각자 의견 적극 피력 토론문화 인상적
“인도의 민주주의는 실패한 적이 없습니다.
제가 정말 자랑스러워하는 점이죠.”
20일 인도 최대 경제도시 뭄바이의 한 투표소에서 만난 아난드 마힌드라(69) 마힌드라그룹 회장은 한 달 넘게 치러지고 있는 총선 결과와 그에 따른 경제 전망을 묻자 이렇게 답했다.
그는 “인도의 유권자들이 더 나은 경제, 더 나은 삶을 위해 투표하기 때문”이라며 “우리는 민주주의라는 축복(blessing)을 항상 잘 활용해 왔다”고 자신 있는 어조로 말했다.
마힌드라그룹은 2010년 한국 쌍용자동차 인수로 국내에도 잘 알려진 인도의 대기업으로, 마힌드라 회장 역시 인도의 대표 억만장자 중 한 명이다.
오후 2시쯤 투표소에 도착해 30분가량 머물다 떠난 그는 곧이어 자신의 엑스(X·옛 트위터)에도 투표 ‘인증샷’을 올린 뒤 “누가 우리를 다스릴지 결정하는 것은 특권”이라며 “이 축복에 결코 등 돌리지 말라”는 투표 격려글을 남겼다.
같은 날 아시아 최대 빈민촌으로 꼽히는 뭄바이 다라비의 한 투표소 인근에서 만난 라비 굽타(32)는 투표를 하는 이유에 대해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라고 외쳤다.
다라비에서 소규모 플라스틱 재활용 업체를 운영하는 그는 뭄바이 부촌의 유권자들처럼 영어가 유창하지 않아 지역 언어인 마라티를 섞어 말하면서도 “데모크라시(Democracy·민주주의)”라는 단어만큼은 또렷한 발음으로 수차례 강조했다.
 | 아난드 마힌드라(69) 마힌드라그룹 회장이 20일 인도 뭄바이의 투표소에서 세계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같은 날 무장 군인이 지키는 투표소 입구에서 선거관리위원이 유권자의 신분증을 확인하고 있다.
선거인 명부를 확인해 유권자의 정확한 투표소 위치를 찾기 위해 투표소 인근이 선관위원과 유권자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다.
(왼쪽부터) |
유권자가 9억7000만명에 달해 ‘세계 최대 민주주의 행사’로 꼽히는 인도 총선이 다음달 1일 치러지는 일곱 번째 투표를 끝으로 6주간의 대장정을 마친다.
인도 총선은 세계에서 가장 ‘길고(선거 기간), 크며(유권자 수), 비싼(선거비용)’ 선거로 불린다.
기자가 이날 찾은 뭄바이에도 1만개에 이르는 투표소가 설치돼 입구마다 선거관리위원들에게 자신이 어느 투표소로 가야 하는지를 묻는 유권자들이 장사진을 이뤘다.
선거 관리를 위해 뭄바이 전역에 배치된 공무원은 7만명이 넘는다.
직접 현장을 취재한 인도 총선은 ‘세계에서 가장 뜨거운’ 선거라는 말이 와닿았다.
섭씨 35도가 넘는 온도에 80%에 육박하는 습도로 옷이 땀에 흠뻑 젖는 날씨 때문만은 아니었다.
“폭염이 투표랑 무슨 상관이냐”며 꿋꿋이 야외의 긴 대기 줄에서 자기 차례를 기다리고, 기투표자를 표시하는 보라색 잉크가 칠해진 손가락과 함께 환한 미소로 인증샷을 찍으며 선거를 축제처럼 즐기고, ‘어느 당을 뽑았고, 왜 뽑았는지 이유를 알려줄 수 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거리낌 없이 논리정연하게 의견을 공유하는 인도 유권자들의 민주주의를 향한 강렬한 열망과 자부심이 느껴졌다.
◆인도의 ‘젊은’ 유권자들
인도 총선의 열기를 키우는 요인 중 하나는 청년 유권자들이다.
인도 선거관리위원회에 따르면 올해 총선에 등록한 9억7000만명의 유권자 중 2억1500만명(22%)이 18∼29세의 청년들이다.
현재 인도의 평균 연령이 28.4세인 점을 감안하면 청년 유권자의 비중은 갈수록 늘어날 전망이다.
아직 청년들의 유권자 등록 비율이 낮기 때문이다.
인도는 유권자가 선관위에 선거인 명부 등록을 하고 유권자 카드를 받아야 투표를 할 수 있다.
뭄바이에서 택시기사로 일하는 파만(20)은 “이번 달 8일에 유권자 등록을 하려고 하니 이미 등록기한이 끝나서 투표할 수 없게 됐다”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뭄바이에서 만난 청년 유권자들은 선거를 통해 정치적 효능감을 느끼고 있었다.
투표를 위해 유학 중인 미국 보스턴에서 귀국했다는 자쉬 샤(25)는 “집권당인 인도국민당(BJP)을 뽑기 위해 가족과 함께 투표하러 왔다”며 “BJP는 뽑아주면 그 지역구를 위해 확실히 일한다.
야당을 뽑은 옆 지역구와 이 동네의 개발 수준이 얼마나 차이 나는지 직접 둘러보라”고 말했다.
보스턴대에서 데이터 분석을 전공하는 그는 “졸업하면 미국이 아닌 인도로 돌아와 일자리를 찾을 것”이라며 “인도의 경제성장 가능성이 엄청나다고 생각하고, 현 정부가 발전속도를 더 앞당길 수 있다고 생각해 투표에 참여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현 정부에 반대하는 청년 유권자들도 적극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개진했다.
뭄바이대에서 경영학을 전공하는 라자 발라지(24)는 “무슬림과 힌두교도를 분열시키려는 모디 총리의 행보에 반대한다”며 “식민지배를 받던 시절 무슬림과 힌두교도가 힘을 합쳐 영국에 대항해 인도의 독립을 이뤘다.
우리는 형제와 같고, 서로 싸우도록 만들어서는 안 된다”고 비판했다.
청년뿐 아니라 여성 유권자들의 적극적인 투표 참여도 눈에 띄었다.
인도의 투표소는 대기 줄을 성별로 구분해 세워두는데, 기자가 찾은 투표소들에서는 여성 유권자의 줄이 남성과 전부 비등했다.
인도 여성 유권자의 투표율은 2019년 총선에서 67.18%를 기록, 남성(67.01%)을 처음으로 앞질렀다.
인도는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후 치른 첫 총선(1951∼1952년) 때부터 여성 유권자의 투표권을 보장했다.
 | 20일 총선을 치른 인도 뭄바이의 유권자들이 ‘기투표자’를 의미하는 보랏빛 잉크가 칠해진 검지손가락을 들어보이며 세계일보에 투표를 인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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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의 ‘똑똑한’ 유권자들
인도 총선의 화두 중 하나는 인공지능(AI)으로 만든 딥페이크(조작 콘텐츠) 영상이다.
유튜브, 틱톡 등 영상 플랫폼과 인스타그램 등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활발히 이용하는 젊은층을 겨냥해 선거 관련 딥페이크 영상이 퍼지고 있다.
지난달 말 인도 발리우드의 인기 스타 아미르 칸과 란비르 카푸르가 모디 총리를 비판하는 딥페이크 영상이 SNS에서 확산하며 50만회가 넘는 조회수를 기록한 예가 대표적이다.
두 배우 모두 법적 대응에 나섰고 현지 경찰은 즉각 수사에 나섰다.
인도 유권자들은 대체로 딥페이크 영상에 높은 경각심을 갖고 있었다.
뭄바이 한 대형 쇼핑몰의 스타벅스에서 일하는 아누팜(22)은 “어느 정치인이나 한쪽 정당에 불리한 딥페이크 영상은 보통 반대 정치세력이 지원하는 단체나 개인이 만든 것이 대부분”이라며 “사람들도 이를 잘 알기 때문에 쉽게 딥페이크에 속지 않는다.
AI뿐 아니라 사람도 갈수록 똑똑해진다”고 말했다.
그는 “발리우드 배우와 크리켓 선수, 인플루언서들이 나오는 영상은 일단 의심하고 본다”고 덧붙였다.
크리켓은 인도의 국민 스포츠로 그 인기가 축구·야구 등 여타 모든 종목을 초월해 선수들의 인지도와 명성도 어마어마하다.
길거리에 걸린 인도 선관위의 투표 격려 홍보 포스터에도 어김없이 크리켓 선수가 모델로 등장하고 있었다.
뉴델리에서 변호사로 일하는 안킷(32) 역시 “딥페이크는 거의 실시간에 가깝게 팩트체크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이 참고하는 팩트체크 사이트로 인도 정부의 언론정보국(PIB) 계정을 알려줬다.
‘@PIBFactCheck’라는 엑스 계정은 모디 총리와 관련된 허위 사실을 유포한 SNS 게시물들에 ‘가짜(Fake)’라는 도장을 찍은 캡처본을 올린 뒤 이를 경고하고 있었다.
정치인과 관련된 내용뿐 아니라 ‘인도 교육부의 온라인 대학 과정이 5월부터 무료로 제공된다’는 허위사실을 검증하는 게시물도 있었다.
◆인도의 ‘견고한’ 민주주의
AI의 습격과 역대급 폭염, 모디 총리의 장기집권이 확실시되는 상황에서도 인도의 민주주의는 견고한 모습이었다.
기자가 만난 수십명의 유권자 대다수가 적극적으로 인터뷰에 응하며 선거의 중요성과 정부 정책, 자국의 발전 전망 등에 대한 자기 생각을 허심탄회하게 털어놓는 데서 건강한 민주주의의 근간인 인도의 토론문화를 엿볼 수 있었다.
24일 뉴델리의 사택에서 만난 자와할랄 네루대학교의 매니쉬 다바데 교수(국제정치학)는 “인도는 독재정권이 들어설 수 없는 나라”라고 단언했다.
인도에서는 모디 총리가 3연임에 성공하면 개헌을 통해 독재를 시도할 것이라는 우려가 적잖은 힘을 얻고 있다.
BJP에 대항하는 야당 연합에 속하는 지역정당 UBT의 뭄바이 포트 지역구 대표 산데시 셰티(48)도 투표소에서 “모디의 리더십을 나 또한 인정하고 좋아하지만, 국가의 리더가 정기적으로 바뀌지 않으면 부정부패가 심해질 수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다바데 교수는 “인도인의 피에는 민주주의가 흐른다”며 세간의 우려를 일축했다.
그는 “인도 고대 신화인 ‘마하바르트’에서조차 끊임없이 질문하고, 논리적으로 생각하려는 인도인의 정체성이 나타난다”며 “끝없이 옳은 방향을 되묻는 인도인은 1977년 인디라 간디의 독재정치에도 선거로 맞서 이겼다”고 짚었다.
인도 초대 총리 자와할랄 네루의 딸인 인디라 간디는 인도 헌정사상 처음이자 마지막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언론·야당 탄압을 자행한 끝에 1977년 총선에서 BJP에 패해 실각한 인물이다.
인도에서 분리된 파키스탄에서는 군부세력이 80년 가까이 정치적 실권을 잡고 있는 것과 대조적으로 독립 이후 인도는 오직 선거를 통한 평화로운 권력 이양이 이뤄져 왔다.
민주주의를 체화한 인도인들에게 선거는 절대 외면할 수 없는 소중한 권리라고 다바데 교수는 말했다.
“아직도 기초적인 인프라가 갖춰지지 않은 시골에 사는 많은 인도인에게는 선거가 나의 욕구를 표현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기회입니다.
그들은 이 기회를 자신에게 가장 나은 방향으로 쓰기 위해 가장 현명한 선택을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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뭄바이·뉴델리=글·사진 이지안 기자 eas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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