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에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믿을 수가 없었어요. 한밤중이었지만 바로 택시를 타고 왔습니다. ” 4일 오전 2시. 서울 여의도 국회 정문 앞에서 만난 김찬우·김래명(18)군은 흰 입김을 내뿜으며 들뜬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남양주 와부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두 학생은 사상 초유의 '계엄령 비상 선포' 소식을 듣고 한 걸음에 서울로 향했다. | 경기 남양주시 와부고등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인 김찬우·김래명(18)군. 이예림 기자 | 이날 밤 국회 앞은 잠들 수 없었다. 10대부터 60대까지, 학생부터 직장인까지, 도시의 밤거리를 가득 메운 시민들의 얼굴에는 놀란 기색과 분노, 그리고 결연한 의지가 뒤섞여 있었다. ◆한순간에 뒤바뀐 서울의 밤 전날인 3일 오후 10시25분,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와 함께 서울의 평화로운 겨울밤은 순식간에 뒤바뀌었다. 한 시간 뒤, 계엄사령관으로 임명된 박안수 육군참모총장은 모든 정치활동과 집회를 금지하는 계엄사령부 포고령을 발표했다. 도시의 긴장감은 순식간에 최고조에 달했다. 우원식 국회의장은 “모든 국회의원은 즉시 국회 본회의장으로 모여달라”며 긴급 소집을 알렸다. 계엄을 해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국회의 표결이었다. 여야를 막론하고 의원들은 본회의장으로 향했고, 이 소식을 들은 시민들도 하나둘 국회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인근 지하철역과 도로는 금방 시민들로 북적였다. 영하의 날씨에 눈발이 흩날렸지만, 국회와 가장 가까운 국회의사당역 6번 출구 앞은 카메라를 든 유튜버들과 시민들로 가득 찼다. 신호등 앞 인도는 이미 수백 명의 인파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 3일 밤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군 버스를 막아선 시민들이 경찰과 대치하고 있다. 이예림 기자 | 오후 11시30분, ‘대테러 초동조치 출동차량’, ‘대한민국 육군 버스’라는 글씨가 선명한 대형 버스가 등장하자 시민들이 이를 막아서며 소란이 빚어지기도 했다. 하나 둘 버스 주위로 몰려 든 시민들이 “군인들을 막읍시다”라고 외쳤다. 공중에서는 헬기 3대가 굉음을 내며 국회 주변을 선회해 현장의 긴장감을 더욱 고조시켰다. 자정이 넘자 어느새 인파는 6번 출구 앞 신호등 건널 목을 완전히 메웠다. 영하권의 추위 속에서도 시민들은 두꺼운 패딩을 입은 채 자리를 지켰다. 아이패드에 ‘윤석열은 퇴진하라’를 적은 젊은이, 태극기를 든 시민, 외신 취재진까지 현장은 다양한 사람들로 가득했다. 국회 정문 돌담 위로 젊은 남성 넷이 올라가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계엄!”이라는 선창에 수백 명의 시민들이 “철폐!”로 화답했다. 각자의 목소리로 흩어져 있던 외침이 한 방향으로 모아지는 순간이었다. 애국가와 임을 위한 행진곡이 울려 퍼지기도 했다. | 4일 오전 12시30분 서울 여의도 국회 정문 앞에서 시민들이 “계엄 철폐” 구호를 외치고 있다. 이예림 기자 | 오전 1시 5분. 의원 190명 전원이 계엄령 해제에 찬성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순식간에 국회 앞은 축제의 장으로 변했다. 시민들은 두 손을 머리 위로 들어 환호했고, 서로를 부둥켜안았다. 여기저기서 “이겼다!”, “해냈다!”는 외침이 터져 나왔다. 누군가 외친 “와!” 소리에 맞춰 시민들이 순서대로 두 손을 들어올렸다 내리는 파도타기가 시작됐다. 마치 축구장의 응원 같은 광경이었다. 한쪽에선 부부젤라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고, 다른 쪽에선 앞뒤로 뛰며 기쁨을 만끽하는 이들도 있었다. 한 여성 시민은 확성기를 들고 “해제 논의 마치고 후속 논의가 진행 중이니, 안에 있는 사람들이 나올 때까지 계속 구호를 외치자”고 제안했다. 시민들은 “탄핵”으로 바뀐 구호를 외치며 여전히 자리를 지켰다. ◆“뭐라도 해야겠다 싶어서”... 한밤중에 달려온 시민들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2학년 김예덕(25)씨는 “도서관에서 시험공부를 하다 비트코인이 급락하길래 뭔 일인가 했다. 뉴스에서 계엄령이 선포됐다길래 바로 나왔다“며 “처음에는 군인들도 있고 무서웠지만, 계엄령이 해제됐다는 소식을 듣고 안도했다”고 말했다. |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2학년 김예덕(25)씨. 이예림 기자 | 김씨는 “윤 대통령이 국회를 범죄자 소굴이라고 표현하며 계엄령을 선포했는데 납득하기 어렵다”며 “결국 본인을 지키기 위해 대통령 권한을 함부로 휘두른 거라고 본다”고 강조했다. 홍대에서 야근하던 박지은(30)씨는 직장 동료 두 명과 함께 막차를 타고 국회로 향했다. “유튜브로 군인들이 국회로 들어가는 걸 보면서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오는 길에 친구 아버지가 전화로 ‘조심하라’고 하시는 걸 보고 이게 정말 심각하구나 싶었다”고 했다. 송파구에서 온 정충규(60)씨는 TV로 계엄령 선포를 보고 아내와 즉시 지하철을 타고 왔다. 정씨는 “아주 어렸을 때도 계엄령이 있었는데, 그때는 밤 늦게 돌아다니면 안 되고 정말 삼엄했다”며 “그때와 비교하면 이건 완전 쇼, 완전 코미디다”라고 말했다. 옆에 선 아내 황모(59)씨는 "나라가 왜 이 모양이냐, 창피하다"며 연신 고개를 저었다. 이예림 기자 yeah@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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