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 정신질환자 자립 ‘아답터’ 프로그램 병원·재활시설 등 퇴소 장애인 대상 복지사가 3개월 동안 물심양면 지원 임대주택 신청 방법·서류 준비 안내 생필품 제공 지역 사회 정착 뒷받침 참가자들 독립 후 정신적 안정 경험 “눈치 안 보고 미래 설계… 행복감 절로” 장애인 자립 유지 시스템 강화 시급 “탈시설 장애인 정착 도울 예산 보강을”
양극성 정동장애(조울증)를 가진 손정환(35·가명)씨는 최근 인생 첫 독립생활을 시작했다. 이전까지는 장애인 자립생활주택에서 다른 입주자와 함께 살았던 손씨는 올해 10월 서울 은평구에 위치한 한국토지주택공사(LH) 청년전세임대주택으로 보금자리를 옮겼다. 오랫동안 자립을 꿈꿔온 그였지만, 막상 혼자 이사를 준비하자니 막막함을 느꼈다. 가구와 가전제품을 모두 새로 사야 하는 데다, 혼자 살아본 경험이 없어 공과금 납부 방법부터 음식을 만들고 빨래하는 방법까지 처음부터 익혀야 했기 때문이다. 70대에 접어든 부모에 기대 일일이 도움을 구하기도 어려운 환경이었다. | 정신질환자 지원기관 태화샘솟는집이 운영하는 ‘아답터(아름답게 터 잡기 프로젝트)’ 프로그램을 통해 자립에 성공한 손정환(35·가명)씨가 2일 서울 은평구 자택에서 영상 편집을 하고 있다. 이제원 선임기자 | 손씨는 정신재활시설 ‘태화샘솟는집(샘솟는집)’의 ‘아답터(아름답게 터 잡기 프로젝트)’ 프로그램에 참여하며 자립할 용기를 냈다. 가구·가전과 생활용품을 지원받아 물리적으로 쾌적한 주거환경을 갖출 수 있었다. 샘솟는집의 사회복지사는 손씨가 동네에 정착할 수 있도록 뒷받침했다. 손씨의 이사 준비를 돕는 것부터 이사 후에도 매주 손씨의 집을 방문해 주변 가게를 함께 찾아나서기도 했다. 손씨는 “‘당근’으로 중고거래하는 법도, 화장실 수건걸이를 설치하는 법도 이번에 배웠다”며 “자립을 너무 겁낼 필요가 없고, 도움을 청하면 세상에는 생각보다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웃으며 말했다. ◆자립 후 3개월 집중 지원… 효과↑ 8일 사랑의열매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따르면 샘솟는집은 모금회 기획사업으로, 병원이나 정신재활시설에서 퇴소해 지역사회의 독립 주거로 이동하는 정신장애인의 초기정착을 지원하는 업무를 진행하고 있다. 2022년부터 조현병이나 양극성 정동장애 등을 진단받은 정신장애인 20명을 도왔는데, 수혜자는 20대부터 60대까지 다양하다. 서울시복지재단의 2018년 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정신장애인 73.5%가 퇴소 후 자립생활을 원한다고 응답했을 만큼 자립의 욕구가 크다. 문제는 이들이 장기간 안정적으로 머물 공공 또는 민간임대주택을 확보하는 과정 자체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샘솟는집은 LH와 서울주택도시공사(SH) 사이트에 올라오는 임대주택 공고문을 확인해 회원별로 신청 조건을 충족하는 주택이 있을 경우 안내하고, 신청서 작성과 서류 준비 등 초기 단계부터 돕는다. 양극성 정동장애가 있는 박민수(53·가명)씨 역시 샘솟는집의 도움으로 임대주택에 안착했다. 박씨는 장애인 공동생활가정(그룹홈)과 모텔·여인숙 등 여러 주거 형태를 전전하다 올해 서울 용산구 소재 SH 전세임대주택에 입주했다. 박씨는 “그룹홈 시설장이 거실에 폐쇄회로(CC)TV를 설치해 회원들을 감시하고, 눕거나 잠자는 시간까지 통제하는 등 과도하게 자유를 침해하는 통에 살 수가 없어 여인숙으로 탈출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SH 임대주택에 당첨돼 샘솟는집에서 세탁기와 냉장고, 가스레인지 등 가전제품 일체를 지원받았고, 부동산 계약서 작성과 이삿짐 옮기기까지 도움을 받아 현재의 집에 들어왔다. 지금의 주거환경에 만족한다”고 말했다. 주거 문제가 해결돼 고대하던 자립생활을 시작한다 해도, 싱글라이프 초반의 외로움과 두려움을 견디지 못하거나 일상생활 전반의 어려움을 호소하는 이들도 많다. “막상 독립하면 좋을 줄 알았는데 불안하다”거나 “혼자 어떻게 하루를 보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등 반응이 대표적이다. 자립을 시작한 장애인이 생활을 긍정적으로 경험하고 안정적으로 시작할 수 있도록 초기적응을 위한 적극적인 지원체계를 구성하는 일이 중요한 이유다. 이 때문에 아답터 프로그램은 지역사회로 옮겨온 정신장애인이 고립된 생활을 하다 병원이나 시설, 원가정으로 복귀하지 않도록 포괄적 서비스를 원스톱으로 제공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정철민 샘솟는집 자립지원팀장은 “자립생활 초기 발생할 수 있는 어려움을 사전에 점검해 참여자의 심리적 불안을 낮추고, 의식주 해결과 금전관리, 건강관리 등 일상 전반을 혼자 꾸려가도록 지원하는 게 핵심”이라며 “사회복지사가 담당 참여자를 자립 후 3개월 정도 물심양면으로 밀착 지원하면, 이들이 지역사회에 잘 적응해 자립을 유지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 손정환(35·가명)씨가 ‘아답터’를 통해 지원받은 냉장고 안에서 음식을 꺼내고 있는 모습. 이제원 선임기자 | ◆“증상 관리하며 미래 설계” 사업에 참여한 이들은 자립 이후 정신적 안정을 경험했으며 스스로 미래를 설계해나갈 자신감이 붙었다고 말한다. 손씨는 “남의 눈치를 많이 보는 성격인데, 자립생활주택에서 지낼 땐 낯선 타인과 한집에서 살면서 서로 생활 리듬이 다르다 보니 불편하고 힘들었다”며 “이사 후 확실히 스트레스가 줄었다”고 말했다. 그는 “얼마 전 혼자 치킨을 시켜먹으며 스포츠 경기를 보는데, ‘행복하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며 웃으며 말했다. 그는 영상 제작 경력과 흥미를 살려 취업을 준비하고 있다. 손씨는 “평일에는 매일 아침 8시에 일어나 주간 재활시설에 출석해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오후에 귀가해 구직사이트를 확인하고 이력서를 쓰는 루틴(일상)을 지킨다”고 말했다. 증상 발현이 두렵지 않은 건 아니다. 그는 “조울증 같은 기분장애는 스트레스에 매우 취약하다”면서도 “증상이 올라오지 않도록 규칙적인 생활을 유지하며 최대한 관리하고, 취업에 성공해 오랫동안 직장 생활을 하고 싶다”고 힘줘 말했다. 이러한 주거대책과 생활 유지를 위한 지지체계가 튼실하게 마련되지 않을 경우 장애인의 지역사회 정착 시도가 실패로 돌아갈 위험이 크다는 지적도 나온다. 정 팀장은 “장애인 지원주택 공급이 충분하지 않다 보니 시설에서 나온 정신장애인이 고시원 같은 주거 취약시설에 들어가거나 노숙 상태로 내몰려 열악한 환경에서 증상이 심화되고, 결국 다시 시설로 들어가거나 병원에 입원하는 사례가 많다”고 했다. 올해 5월부터 아답터 사업에 참여한 김모씨는 “장기입원 후 퇴원해 고시원에 산 경험이 있다”며 “그때는 내가 병원 치료를 받아야 하는 상태인지, 위생관리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시원에서 벗어나서 어디에서 살 수 있는지를 고민하지 않고 하루하루 술만 마시며 지냈다”고 토로했다. 그는 현재 샘솟는집의 도움으로 자립생활주택으로 거주지를 옮겨 안정적인 생활을 유지하고 있다. 샘솟는집 관계자는 “가족의 보호도, 공적 영역의 돌봄도 받지 못하는 탈시설 정신장애인 상당수가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며 “이들이 독립 주거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초기적응을 도울 주체를 명확히 하고, 정부가 예산과 인력을 보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공동기획: 세계일보·사랑의열매 사회복지공동모금회 이규희 기자 lkh@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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