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대풍선이 축구장에 어울리지 않는 이유
* 1997년 PC통신 하이텔 축구동호회에 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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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대풍선 응원에 관한 말들이 많이 나오길래 써봅니다.
요즘 축구협회로도 막대풍선 사용에 관한 문의 전화가 자주 걸려 옵니다.
막대풍선 제작업체 아니면 기업체에서 걸려오는 전화가 대부분인데, 앞으로
있을 국가대표팀의 평가전이나 프랑스 월드컵때 관중들에게 나눠주기 위해서인
모양입니다.
막대풍선에 기업이름이나 상품명을 써넣고 관중들에게 무료로 나눠주겠다는
곳도 있고, 축구가 너무 좋아서 '파이팅 코리아'같은 글자만 넣고 그냥 관중
들에게 나눠주겠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협회 차원에서 막대풍선 사용을 반대하고 있다고 이야기하고
간단하게 이유를 설명해주면 막대풍선에 상품이름 안쓰고 그냥 나눠주겠다는
사람은 알았다며 바로 전화를 끊습니다.
하지만 상품이름 씌어져 있는 막대 풍선을 나눠주겠다는 사람들은 "금지하는 법적
근거가 있느냐" 하면서 한참 동안 전화통을 붙들고 따진다는 것입니다.
막대풍선이 하나의 응원도구이긴 하지만 적어도 축구장에는 어울리지 않는
이유를 저는 이렇게 봅니다.
사회학자들에 의하면 인간이 즐기는 스포츠중에서 먼 옛날 원시 시대부터
인간이 치뤘던 전쟁과 가장 유사한 것이 축구라고 합니다.
전쟁에서 나타나는 그 격렬함, 투쟁성, 긴장감, 무리의 이동과 동작의 모든
형태가 축구와 가장 흡사한 형태를 띠고 있다는 것이지요.
다른 어느 스포츠 보다도 축구장엔 여자보다 남자들이 많습니다. 그것은 현대
남성들의 저 깊은 곳에 감추어져 있는 원시 시대 사냥에서 느끼던 쾌감이나
전쟁을 통해 느끼던 격정과 승리감을 가장 잘 드러내는 스포츠가 바로 축구
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축구와 엇비슷하며 같은 뿌리에서 나왔다고 하는 럭비가 유럽같이 스포츠 역사
가 오래된 곳에서 굉장한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을 보면 그말은 틀림없는 것 같
습니다.
가끔 홍콩 스타TV에서 해주는 유럽의 럭비경기를 보다보면 너무나 관중이
많아 저는 깜짝 놀랄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럭비는 격렬한 남성적 매력은
있을지 모르지만 왠지 세련된 맛이라든가 섬세한 멋은 없어 전 세계적으로
축구만한 인기는 아닌 것 같습니다.
먼저, 전쟁은 어떻게 진행되는지 상상해 볼까요.
그 상대를 고구려군과 수나라군의 싸움이라 해도 좋고, 유비와 조조의 군대
라 해도 좋고 아니면 나폴레옹군과 러시아 군의 전쟁이라 해도 좋습니다.
광활한 평야, 혹은 초원, 혹은 언덕에서 양쪽 병사들은 두 편으로 갈라 섭니다.
두 눈에는 긴장한 빛이 감돌고 가슴은 터질듯 하며 팔과 다리의 근육은 탱탱하
게 섭니다.
이윽고 장수의 신호가 떨어지고 나팔수의 힘찬 진군 나팔이 울리면 병사들은
우뢰와 같은 함성을 지르며 적진을 향해 달려 갑니다. 상대방이 반격을 해오면
재빨리 후퇴를 해야 합니다.
일진일퇴, 잠시도 한 눈 팔틈없이 치고 막고 부딪혀야 합니다. 수시간의 격렬한
싸움끝에 이긴 쪽은 승리의 노래를 부릅니다.
자, 이 전쟁터에서 병사들의 손에는 무기 외에 무엇이 있을까요?
어느 군대나 마찬가지입니다. 맨 앞에는 그 군을 상징하는 큰 깃발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수많은 작은 깃발들이 펄럭입니다.
깃발에는 군을 상징하는 깃발도 있지만 승리를 기원하고 아군을 격려하기
위해 만든 깃발도 있습니다. 때론 적군의 장수를 조롱하는 문구도 씌어집니다.
그리고 한쪽 옆에는 병사들이 진격할 때 치는 큰 북이 있습니다.
이 북에서 나오는 소리는 병사들의 발걸음을 일사불란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진격할때 울리는 '둥둥둥' 소리는 병사들의 감정을 격정적으로 만들어 용맹
스럽게 만드는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물러섰을 때 천천히 울리는 북소리는 다시
반격해야 한다는 의지를 북돋아 줍니다.
그리고 나팔이 있습니다. 그 나팔 소리는 곡조를 띠게 되는데 싸움중에 항상
울리는 것이 아니라 아군이 공격하면 강하고 빠르게, 상대가 공격해 오면 느릿
느릿 비꼬는 소리로 적군을 심리적으로 와해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싸움터에서 이 외에 무엇이 또 필요하겠습니까?
짝짝이를 친다고 해봅시다. 소리는 분산되고 병사들의 단결력은 떨어져 오히려
비참한 패배와 죽음만이 있을 것입니다.
인류는 수천년의 전쟁 경험을 통해 어떤 도구가 인간의 감정을 격노하게 만들고
피를 끓게 하며 단결하게 만드는지 실험해 왔습니다.
그 결과 싸움터에는 위와 같은 도구들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다시 축구장으로 돌아옵시다.
축구도 전쟁과 같습니다. 우리 편이 공격할 때는 그에 맞게 격렬한 북소리와
함성이 필요하며, 상대 편이 밀고올때는 야유와 조롱을 퍼부어야 합니다.
우리 편이 골을 넣었을 때는 북을 치며, 깃발을 흔들고 노래를 부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북과 나팔(뿔피리), 깃발 그리고 사람의 함성이 축구장에 가장
어울리는 도구인 것입니다.
만약 막대풍선을 흔들어 보십시오. 또 어느 분이 얘기하듯이 각자 짝짝이를
쳐보십시오. 막대풍선의 둔탁한 혹은 짝짝이의 딱딱대는 소리는 분산하는
소리이기 때문에 힘을 분산시키고, 응원을 개개인의 것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막대풍선은 그 소리 때문에 응원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게 합니다.
왜냐하면 북은 리듬의 시작을 알릴뿐, 그 뒤는 사람의 목소리에 맡기는 반면,
막대풍선은 부딪히는 소리가 사람의 함성, 목소리를 파묻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목소리가 담겨있지 않은 응원은 비주체적일수 밖에 없습니다.
또 막대풍선이나 짝짝이는 일정한 리듬을 표현하기가 매우 힘듭니다.
수많은 관중이 막대풍선을 두들기는 것은 응원이 아니라 거의 소음에 가깝다는
것을 작년 여름 브라질 대표팀 초청경기를 보신 분이라면 기억할 것입니다.
응원 소리가 분산되고 중구난방이 되면 경기하는 선수의 집중력도 떨어지는
것이 당연합니다.
거기다 막대풍선 때문에 사람이 가려져서 정작 응원하는 사람은 파묻혀서 보이
지도 않게 됩니다. 펄쩍펄쩍 뛰며 팔을 흔드는, 붉은 악마가 보여준 응원과
가만히 서서 막대풍선을 부딪히는 것, 어느 것이 더 힘있어 보이고 역동적
입니까?
막대풍선은 야구장에 퍽 잘 어울리는 응원도구인지 모릅니다.
축구는 90분동안 전쟁처럼 거의 쉴틈이 없이 공격을 주고 받습니다.
야구는 공수 교대때나 투수 교체 때, 또는 볼 아웃이 될 때마다 수시로 쉬는
시간이 있습니다. 그 시간에 화장실도 갈수 있고 매점에 가서 콜라도 마실수
있습니다.
그러나 축구 경기중에 하프타임도 아닌데 화장실 가는 사람은 어린이들 빼놓고는
없습니다.
축구를 전쟁에 비유하고, 야구는 즐긴다는 의미에서 게임(GAME)이라고 하는
이유가 바로 이런데 있습니다.
막대풍선은 우리 팀이 안타를 쳤을 때, 또는 우리 투수가 상대 타자를 삼진
아웃 시켰을 때 두드리면 더 없이 좋은 응원도구입니다. 왜냐하면 그 순간은
경기가 중단되기 때문에 잠시 동안 막대풍선을 치면서 저마다 즐거운 기분을
표현하기에는 딱 맞는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공수 교대할 때 앰프에서 나오는 음악에 맞춰 막대풍선을 부딪히면
신나는 응원이 될수도 있으며 유쾌한 놀이터에 온 기분을 낼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잠시도 쉬지 않고 눈앞에 공이 왔다갔다하는 축구장에서 자기가 치는
막대풍선 때문에 앞이 안보이는 것을 감수해가며 응원하겠다는 어리석은 사람은
없습니다.
막대풍선은 한국의 독창적인 응원도구이기 때문에 널리 세계에 전파시키는 것이
좋지 않느냐, 막대풍선 업체 사람들이 주로 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개발한 것을 세계에 알리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덮어놓고 우리가
만들었다고 세계에 다 통용되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생명체도 그러하듯이 모든 것은 진화의 법칙에 의해 환경과 실정에 맞고 가장
보편성을 가진 것만이 살아남습니다. 한국적이면서도 보편적인 것이 성공하는
것입니다.
막대풍선이 메이저 리그 야구장에는 어울릴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전 세계 축구장에서 응원도구로 사용되리라는 것은 막대풍선을 만드는
업체나, 축구장에서 그런 식으로라도 기업선전을 해야겠다고 마음먹는 사람들
만의 소망일 뿐입니다.
세계의 축구팬들은 처음엔 신기해 하겠지만 이내 외면해 버릴 것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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