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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국가부도의 날’ 떠올리는 을사년…김동연의 경고 [오상도의 경기유랑]

“‘골든타임’ 설 명절 전까지 50조 추경…정치 불확실성도 해소”
‘대한민국 비상경영 3대 조치’…설렁탕집 신년 간담회 열어
“윤석열·트럼프 쇼크가 우리 경제 덮쳐…특단의 대책 필요”
다보스포럼서 트럼프 1기 핵심인사 만나…“내란세력 단죄해야”
“계엄·내란으로 87체제 안 좋은 점 다시 부각…경제개헌 요구”


1997년 말 국제통화기금(IMF) 사태를 다룬 영화 ‘국가부도의 날’에는 이색적인 장면이 등장한다.
마치 뜨거운 물에 빠진 개구리가 고통을 느끼지 못하고 서서히 죽어가는 것처럼 무기력했던 당시 한국 경제의 모습이다.
이 영화에선 빌린 돈을 갚지 못한 채 신용불량자로 전락한 대한민국의 참담했던 과거가 여실히 드러난다.
신체 포기 각서와 다를 바 없는 IMF의 조건을 받아들이며 경제 주권을 헌납했던 치욕스러운 역사다.

‘을사년(乙巳年)’ 새해를 맞은 현 상황도 별반 달라 보이지 않는다.
곳곳에선 벌써 경고의 목소리가 들끓는다.
한국은 무역의존도가 높은 나라다.
기축통화인 달러의 비중이 크지만, 지난달 계엄·탄핵의 충격파로 환율이 급등하는 등 흔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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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연 경기도지사가 13일 수원시의 설렁탕집에서 열린 신년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
경기도 제공
◆ ‘데칼코마니’ 혹은 ‘묘한 기시감’…영화 ‘국가부도의 날’ 떠올리는 을사년

경제부총리 출신인 김동연 경기도지사가 경기침체와 계엄사태로 벼랑 끝에 몰린 경제를 되살린다며 50조원대 ‘슈퍼 추가경정예산안’을 13일 제안했다.
이른바 ‘윤석열·트럼프 쇼크’에 대응하기 위해 취약계층·기업 대상의 긴급지원과 ‘경제전권대사’ 임명 등 긴급 처방들도 쏟아냈다.
그러면서 “시효를 다한 87년 체제를 마무리할 제7공화국을 출범해야 한다.
과거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대선후보 단일화의 첫 조건은 개헌이었고 (경제민주화란) 경제개헌 조항이 정치개혁과 함께 담겨야 한다”며 근본적 해법에도 접근했다.
최근 탄핵사태와 관련해선 “지금 우리 경제의 가장 큰 리스크는 정치적 불확실성으로 이를 해소할 첫걸음은 윤석열 대통령이 관저에서 나와 제 발로 수사를 받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 지사는 단순히 경제 관료 출신의 정치인은 아니다.
현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기획재정부 국장으로 일하던 시절, 차관으로 재직하며 경제정책을 진두지휘했던 인물이다.
김대중·노무현·박근혜·문재인정부를 거치며 진보·보수정권을 두루 경험했다.
문재인정부의 ‘소득주도성장’을 두고 그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지만 엄밀히 말하면 그는 소주성과 결을 달리해 당시 정부 실세들과 갈등을 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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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일 열린 경기도지사 신년 기자간담회. 경기도 제공
김 지사는 이날 경기 수원시의 한 음식점에서 열린 신년 간담회에서 “대한민국 비상 경영 3대 조치를 제안한다”며 이같이 말했다.
이날 행사는 기자단과의 만남과 동시에 지역경제에 도움을 주고자 서민음식점에서 설렁탕을 곁들여 진행됐다.
강민석 경기도 대변인은 “요동치는 경제를 살리기 위한 의지를 담았다”고 설명했다.


김 지사가 던진 메시지는 간단명료했다.
“대한민국을 살리기 위해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슈퍼 민생 추경 △트럼프 2기 대응 비상체제 △기업 기 살리기이다.

그는 “경제 성장률과 수출·소비 증가율에서 ‘퍼펙트 스톰’이 현실화했고 윤석열·트럼프 쇼크까지 덮쳤다”며 “이에 대응하지 못하면 대한민국은 10년 안에 세계 경제지도에서 사라질지 모른다”고 진단했다.
이어 “산소호흡기도 달고, 긴급 수혈도 해야 한다”라며 “지금은 (정부·여당이 얘기하는 것처럼) 예산 조기 집행이 아니라 추경이 절실하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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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연 경기도지사가 13일 신년 기자회견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경기도 제공
그러면서 “지난달 30조원 이상 주장했던 추경은 한 달이 지나 이젠 50조원까지 늘려야 하는 상황”이라며 “설 명절 전까지 소상공인과 자영업자 등 민생 경제에 최소 15조원 이상, 취약계층을 더 두텁고 촘촘하게 지원하는 민생회복지원금에 최소 10조원 이상, 미래 먹거리 투자에 최소 15조원 이상을 써야 한다”고 강조했다.

현 정부가 그동안 집행해온 추경에 대해선 ‘조삼모사(朝三暮四)’라고 비판했다.
실질적으로는 긴축재정을 오갔던 추경이 우리 경제를 더욱 나락에 빠뜨릴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는 ‘슈퍼 추경’을 여·야·정 국정 협의체에서 과제로 다뤄달라고 촉구했다.

다만, 각종 지원금을 둘러싼 세간의 보편·차등 지원 논란과 관련해선 “보편, 차등이란 말에는 동의하지 않는다”며 “(단순히) 뿌려주는 방식이 아니라 취약계층을 더 두텁고 촘촘하게 지원해야 하는데 보편이 다른 뜻으로도 쓰이는 것 같다.
어려운 사람에게도 보편적으로 줄 수 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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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일 열린 경기도지사 신년 기자간담회. 경기도 제공
◆ “美 재무부 장관·대통령 만났던 김기환 특별대사…경제전권대사 필요”

트럼프 2기 출범을 앞두고 정부의 대응체계 미비를 지적하면서는 대외 경제문제를 책임질 ‘대한민국 경제전권대사’ 임명을 내세웠다.
이를 두고 “여야 합의가 어렵겠지만 반드시 성사시켜야 할 첫 단추”라고 했다.

그는 현 상황을 기업이 각자도생을 택한 사실상의 ‘경제 무정부 상태’로 규정했다.
“여야 협의를 거쳐 통상·투자 등에서 트럼프 행정부 최고위층을 상대할 대한민국의 권위 있는 경제 카운터 파트가 필요합니다.
과거 IMF 체제 극복을 위해 임명됐던 김기환 대외경제협력 특별대사가 미 재무부 장관, 대통령과 협의했던 전례가 있습니다.


김 지사가 국회·정부·경제계가 ‘팀 코리아’로 뭉쳐야 한다며 언급한 경제전권대사는 무엇일까. 한국은행의 외화 보유액이 급감했던 1997년 12월 임창열 경제부총리는 김기환 특별대사를 미국으로 급파했다.
앞서 맺은 IMF와의 협약서에 더 과감한 구조조정안을 담은 ‘IMF 플러스’가 로렌스 서머스 미 재무부 장관에게 제시됐고 미국은 김대중 대통령 당선인으로부터 이행 여부를 확약받는다.
이후 미국은 한국에 대한 지원을 다른 선진국들에 요청했고, 환율은 12월 말을 기점으로 2000원 턱밑에서 하락하기 시작했다.
같은 해 크리스마스이브에는 IMF가 한국에 대한 100억 달러 조기지원안을 발표하며 비로소 최종 부도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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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국가부도의 날’ 스틸사진
돌이켜보면 무차별적으로 자본시장이 개방되고 노동시장이 불안해졌지만 한국은 어렵게 재기의 발판을 마련한 셈이다.
김 지사는 당시 상황을 책임진 김 특별대사의 비서로 근무하며 이면을 살펴본 경험이 있다.

김 지사는 이달 말 세계경제포럼(WEF·다보스포럼)에서 트럼프 1기 핵심인사인 게리 콘 전 백악관 국가경제위원장과 만난다.
IMF 총재 등이 사회를 보는 50명 규모의 경제 세션에도 초대받았다.
다른 세션에선 각국 원로기자들을 상대로 한국의 계엄·탄핵사태와 회복 탄력성에 대해 강연할 예정이다.
‘경제올림픽’이라 불리는 올해 다보스포럼에 한국 정부의 고위급 인사들은 초대받지 못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문재인정부 시절 3차례 조우했던 인연이 있다.
대통령을 보좌하는 역할이었다.
이런 김 지사는 “관세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이라는 트럼프 대통령의 최근 발언에 “동의하기 어렵다”고 못 박았다.


그러면서 관세 폭탄·환율리스크 등에 맞서기 위한 수출용 원자재에 대한 수입 관세 한시적 폐지와 수출 중소·중견기업을 위한 무역·환변동보험 한도 폐기, 일몰한 임시투자세액공제 재도입과 투자 인허가 신속처리, 기업 세무조사 한시 유예 등을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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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국가부도의 날’ 포스터
◆ 트럼프와 세 차례 만남…“前 주한 美 대사 계엄사태 개탄”

계엄사태 이후 양 극단에 빠진 정치의 해법을 묻는 말에는 개헌을 언급했다.
“지난 대선 당시 이재명 민주당 대표와 합당했을 때 첫 조건이 개헌이었고, 두 번째가 정치개혁으로 특별위원장으로 활동하며 전 당원의 93% 지지를 받았습니다.
87년 체제의 단점이 다시 부각된 만큼 권력구조 개편을 위한 개헌과 승자독식 구조를 깨기 위한 제7공화국 출범이 필요합니다.


내란사태의 단죄를 요구하면서도 이를 여야 대립의 프레임으로 보는 시각에 대해선 경계했다.
“이 대표에 대한 선거법 선고는 별개 이슈로 법원의 정상적 판단에 따라 이뤄질 겁니다.
이 대표는 당당히 맞서면 됩니다.
불법 계엄과 군까지 동원해 국회의 기능을 정지시키는 걸 전 세계가 (방송)중계로 지켜봤습니다.
(안면이 있는) 외국 지도자들이 전화를 걸어 ‘괜찮냐’고 묻더군요. ‘대한민국이 이런 나라냐’고 했어요.”

최근 임기를 마치고 귀임한 필립 골드버그 전 주한 미국대사와의 일화도 소개했다.
그는 “(지난달 함께 식사할 때) 베테랑 외교관인 골드버그 전 대사가 계엄사태에 대해 개탄했다”며 “내란종식과 정권교체, (내란세력에 대한) 국민적 단죄가 요구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윤 대통령은 관저에 숨어 극우 메시지를 내지 말고 당당하게 수사를 받아야 한다”며 “(이런 식으로) 나라를 쪼개는 건 한심스럽고 화나는 일이다.
(이번 사태를) 종식하지 못하면 대한민국의 국격은 떨어지고 나라가 망할 수도 있다.
윤 대통령은 사퇴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 지사는 “경기지사, 정치인, 자연인의 한 사람으로서 내란사태 종결을 위해 노력하겠다”며 “새 길을 열기 위해 제게 주어진 소명을 다 하겠다.
우리 국민의 잠재력과 역량, 위기 극복의 DNA를 믿는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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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오상도 기자 sdoh@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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