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환율과 고금리, 각종 비용의 급격한 인상 등 대내외 여건이 가뜩이나 악화하는 가운데 성장의 기회를 얻기는커녕 생존을 위협받으며 시장 바깥으로 내몰리는 초기 스타트업이 늘고 있는 것이다.
초기 투자 부진은 단순히 한 기업의 문제가 아니라 벤처 생태계 전체의 지속 가능성과 직결된다.
아시아경제는 초기 스타트업이 처한 현실과 투자 위축의 원인을 분석하고 국내 초기 스타트업 생태계가 성장하기 위한 해법을 모색한다.
<i><u>①존폐의 기로…말라가는 돈줄에 비명만 지르는 기업들
<i>②'로우 리스크 로우 리턴' 투자기조에 사지 내몰려
<i>③전문가들 "글로벌·민간 투자 늘려 자금 유입 촉진해야
#약 2년 전 수도권에서 문을 연 제조 스타트업 A사는 머잖아 폐업을 고민해야 할 정도로 심각한 자금위기에 봉착했다.
지난해 벤처캐피탈(VC) 등의 투자 심사에서 번번이 고배를 들며 돈줄이 말라버린 것이다.
IT 부속장비를 개발하는 A사는 제품을 대량생산할 수 있는 틀(금형)을 특화생산해 시장에서 자리를 잡겠다는 계획이었다.
결과적으로 이 제품을 만들어야 본격적인 영업이 가능한 것인데, 그 단계에 접어들어보지도 못 한 채로 사업 자체가 위기에 놓인 셈이다.
A사 대표 김모(44)씨는 "제조업은 정보통신기술(ICT) 기업과 달리 매출이 나와야 투자받는 경우가 많다"며 "양산 과정에서 투자가 필요한데, 오히려 매출이 발생한 후에야 투자가 몰리는 역설적인 상황"이라고 토로했다.
그는 또 "매출이 잘 나오면 그걸로 금융이라도 일으키면 되는데 왜 투자에 목을 매겠느냐"고 따졌다.
#게임 개발 스타트업 B사는 최근 컨설팅 업체로부터 예상치 못한 조언을 들었다.
차라리 폐업 후 재창업을 고려하는 것이 낫다는 내용이다.
어떻게든 회사를 어엿하게 유지하며 아이디어를 가다듬고, 그러는 동안 필요한 자금과 시간을 확보하려고 외주 업무를 받아 수행하고 있는데 이런 노력이 자칫 사업의 포트폴리오를 훼손할 수 있고 그러면 투자를 받기가 어려워진다는 게 핵심이다.
B사 대표 박모(38)씨는 "투자 유치를 위한 여건을 갖추려고 몸부림을 치고 있는데, 이게 오히려 투자에 방해가 될 수 있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하소연했다.
B씨는 그러면서 "재작년까지만 해도 지금처럼 준비를 착실히 하면 투자에 유리한 상황이었는데 지금은 이상하게도 분위기가 확 바뀌어서 당장 무언가를 내밀어야만 한다.
저보다 더 열악했음에도 투자를 받아 사업을 일으킨 업체들을 보면 가슴이 먹먹하다"고 말했다.
벤처 투자 시장이 얼어붙으면서 초기 스타트업들이 생존 한계에 직면하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을 거치며 넘쳐나던 유동성이 급격히 줄어들고 시장이 위축되면서 초기 스타트업들을 둘러싼 시장 상황이 급변한 것이다.
12일 중소벤처기업부와 벤처캐피탈협회 등 유관 기관들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벤처투자 규모는 총 11조9000억원으로 전년(10조9000억원)보다 늘었지만, 7년 이상 된 후기 스타트업이 절반 이상(6조3663억원)을 차지했다.
3년 이내 초기 스타트업에 대한 투자는 2조2243억원으로 전체의 18.6%에 그쳤다.
최근 5년간 가장 낮은 비율이다.

벤처 업계에서 첫 3년은 '데스밸리(Death Valley)'로 불린다.
초기 창업 기업이 연구개발(R&D)에 성공한 후에도 자금 부족 등으로 인해 사업화에 실패하기 쉬운 기간을 일컫는다.
투자 경색이 심화하면서 이를 넘지 못하고 폐업하는 기업도 늘고 있다.
2023년 기준 전체 벤처기업의 13%(5021곳)를 차지하던 3년 미만 초기 스타트업 수는 지난 1월 기준 11.3%(4283곳)로 감소했다.
벤처확인기관 관계자는 "폐업뿐만 아니라 새롭게 창업하는 스타트업도 줄어드는 추세"라고 설명했다.
지난해 국내 창업 기업 수는 경기 둔화와 고금리 등의 여파로 전년 대비 4.5%(5만5712개) 감소한 118만2905개로 집계됐다.
특히 벤처 투자금이 집중되는 소프트웨어 산업은 글로벌 경기둔화 등으로 투자가 감소하면서 신규 창업이 부쩍 힘겨워졌다.

2000년대 이후 우리 경제는 과감한 도전과 혁신에 기반한 벤처·스타트업들의 성장을 통해 도약해왔다.
2013년 자본금 5000만원으로 출발해 금융업의 역사를 새롭게 써내려가고 있는 토스, 2002년 5억원을 종잣돈으로 시장에 뛰어들어 한국을 대표하며 글로벌 시장을 이끄는 기업으로 자리매김한 셀트리온 등 지금은 그 입지가 당연하게 인식되는 수많은 기업이 창업 초기 데스밸리를 뛰어넘고 성장한 곳들이다.
벤처투자는 이 같은 기업들의 등장과 성장을 뒷받침해 경제 전체를 살찌우겠다는 취지에서 출발하는 것인데, 그 취지가 갈수록 무색해지고 있는 것이다.
미국 기업 분석업체 씨비 인사이트(CB Insights)가 집계한 글로벌 유니콘 기업 1200여곳 중 우리나라 기업은 단 14곳에 불과하다.
2022년 이후 국내에서 신규 유니콘 기업은 단 한 곳도 나오지 않았다.
벤처 업계 관계자는 “유니콘 기업이 오랫동안 나오지 않는다는 건 심각한 문제”라며 “정부가 벤처 육성을 위해 정책을 더 정교하게 손보고 더 많은 기업이 모험에 나설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성민 기자 minute@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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