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SK하이닉스 등과 협력 중인 독일 반도체 소재 기업의 수석부사장이 '트럼프 2기' 관세 정책으로 전세계 반도체 생태계에 타격이 우려된다는 관측을 내놨다.
글로벌 기업 간의 자유로운 파트너십에 제약이 생기면 기술 혁신도 지연될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아난드 남비어 머크(Merck) 일렉트로닉스 부문 수석부사장 겸 최고상업책임자(CCO)는 20일 서울 강남구에서 진행된 아시아경제와의 인터뷰에서 "반도체 산업이 지난 60년간 기술적으로 눈부신 발전을 거듭한 건 필요에 따른 협력을 가능케 한 '공급망의 세계화' 덕분"이라며 "상식을 기대한다"고 밝혔다.
자유무역과 글로벌 공급망의 중요성을 강조한 발언으로,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정책에 대한 비판으로 해석된다.
남비어 수석부사장은 "공급망이 상호 연결돼 있다면 필요한 기술을 가진 기업들과 파트너십을 통해 고객의 문제를 신속하게 해결할 수 있다"며 "무역 등 사안에서 특정 국가가 배제될 경우 비용은 높아지고 효율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기술 협력 파트너십이 막히면 혁신이 지연되고 결국 우리 모두 더 높은 비용을 지불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관세 장벽이 강화될수록 기업들은 더 많은 비용을 감수해야 하며, 이는 결국 소비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반도체 산업은 상호 의존적인 글로벌 네트워크 속에서 발전해온 만큼, 특정 국가의 일방적인 조치는 전체 산업 구조에 장기적인 악영향을 줄 수 있다.

인공지능(AI) 시장에 대응하기 위한 삼성전자·SK하이닉스 등과의 협력 내용을 묻는 말에는 고대역폭메모리(HBM) 사양을 높이기 위한 '기술 난도'를 직면 과제로 지목했다.
그는 "HBM 집적도가 높아질수록 양산 단계에서 완벽한 커넥션을 추구해야 하는데, 하이브리드 본딩을 비롯한 새로운 기술력이 요구된다"며 "수율 문제 등을 해결하기 위해 연구개발(R&D) 단계부터 첨단 패키징까지 삼성전자·SK하이닉스 등과 긴밀한 파트너십을 유지하고 있다"고 했다.
하이브리드 본딩은 기계적 결합과 전기적 연결을 동시에 구현하는 첨단 패키징 기술로, 대역폭을 키우면서도 전력 소모를 줄일 수 있다.
현재 공급 중인 5세대 HBM3E에선 SK하이닉스가 유일하게 16단 양산 준비에 착수했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업계 최초로 12단 개발에 성공했지만, 낮은 수율로 엔비디아 등 주요 고객사에 HBM3E를 공급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르면 올해 하반기 등장할 차세대 HBM4 역시 최대 16단 적층이 요구될 것으로 전망된다.
남비어 수석부사장은 같은 맥락에서 AI 시대를 맞아 떠오른 과제로 '새로운 소재 개발'을 지목했다.
더 나은 성능을 구현하면서도 전력 소비를 낮추는 게 경쟁력이 될 것이라고 봤다.
그는 "지난 2년간 AI 서버들이 갖춰지는 데 14기가와트(GW)에 달하는 전력이 쓰였다"며 "원자력발전소 14개를 새로 지어 소비한 셈"이라고 했다.
이어 "인간의 뇌는 20W만 있어도 최신의 AI 서버보다 훨씬 빠르고 효율적"이라며 "이것이 바로 우리가 나아갈 길"이라고 강조했다.
특히 중국의 생성형 AI '딥시크' 출현에 대해서는 "저사양·저비용으로 많은 것을 구현해낼 수 있다는 영감을 줬다"고 평가했다.
미 항공우주국(NASA)이 우주인 1명을 양성하는 데 10억 달러를 들였는데, 스페이스X 프로젝트가 이 비용을 5000만 달러까지 획기적으로 낮춘 데 비유하기도 했다.
남비어 수석부사장은 "어떤 유형의 기술이든지 저비용으로 보다 많은 것을 구현할 수 있다면, 더 많은 이들이 AI 기술을 활용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줄 것"이라고 했다.
357년 역사를 가진 머크는 1989년 한국에 처음 투자를 시작한 뒤 36년간 반도체를 중심으로 일렉트로닉스 부문 핵심 사업을 추진해왔다.
제조 공정에 필요한 소재·재료 등을 모두 제공하며 특히 반도체 평탄화 및 패터닝, 박막 공정에서 쓰이는 소재 분야에서 강점을 가졌다.
머크는 2021년 글로벌 단위로 30억 유로를 투자하겠다고 발표했었다.
이 가운데 6억 유로를 국내에 투입하겠다고 밝힐 만큼 한국을 주요 시장으로 두고 있다.
2022년에는 삼성전자·SK하이닉스의 협력사인 반도체 소재 기업 엠케미칼(옛 메카로 화학사업부)을 인수하기도 했다.
그는 "한국에서의 반도체 경쟁력은 곧 세계 시장에서의 경쟁력을 뜻한다"며 한국의 소재·부품·장비 기업들과 (엠케미칼 인수 같은) 시너지 효과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이어 "한국에는 뛰어난 테크 리더들이 많다"며 "언제든지 인수합병(M&A)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고 했다.

장희준 기자 jun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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