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얼굴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편이라서요.”
주변에서 종종 들을 수 있는 말이지만, 단순한 건망증과 안면인식장애는 분명히 다르다.
일상생활에서 사람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저자는 중학교 때 친구를 고등학교에 다니는 내내 알아보지 못했다.
때로는 이모를 엄마로 착각했고, 낯선 사람의 차에 타는 일도 비교적 흔했다.
하지만 자신이 얼굴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편이라고 여기며 넘어갔다.
과학 기자로 활동하며 저널리즘 콘테스트 등 여러 수상 이력도 있었던 만큼 자신이 남과 조금 다를 뿐 큰 문제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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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디 딩펠더/이정미·이은정 옮김/웅진지식하우스/1만9800원 |
저자는 UC 버클리, 하버드 신경과학연구소 등의 신경과학자들과 교류하며 자신이 심각한 수준의 안면인식장애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안면인식장애와 뇌과학에 대해 배워갈수록 40년 넘게 그의 삶을 가득 채운 엉뚱한 사건들의 원인도 파악됐다.
학창시절 늘 외로웠던 것은 친구들을 알아보지 못하고 지나쳤기 때문이었다.
책을 읽는 속도가 유독 빠른 것은 장면을 상상하지 못하는 아판타시아 증후군의 영향, 바람피운 전 남자친구를 금방 잊을 수 있었던 것은 자전적 기억력 부족의 결과였다.
저자는 안면인식장애를 비롯한 자신의 여러 신경다양성에 대한 이야기들을 방대한 연구 자료와 논문을 통해 하나씩 풀어준다.
예를 들어 뇌에는 얼굴을 인식하는 데 특화된 방추상얼굴영역이 있다.
오른쪽 뇌 반구의 방추상얼굴영역이 손상되면 사람의 얼굴을 구별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뇌에는 평균 860억개의 뉴런이 있는데, 방추상얼굴영역과 연관된 뉴런의 신경 가지치기가 원활하게 작동하지 않으면 후천적으로 얼굴 인식 불능을 겪는 사례가 많았다.
“사실 나는 기자를 직업으로 삼기 훨씬 전부터 내 삶을 강박적으로 기록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다가 괴짜 중년의 위기로부터 마지막, 어쩌면 가장 큰 깨달음을 얻었다.
안면인식장애는 내게 강한 친화력과 알 수 없는 대상을 두려워하지 않는 굳센 마음을 선물했다.
”(369쪽)
저자는 안면인식장애를 없애야만 하는 질병이 아니라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인다.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면 기자를 할 수 없을 것이란 생각과 달리, 그는 낯선 사람과 오래 만난 사람에 대한 구분이 없어서 처음 본 사람과도 빠르게 관계를 맺었다.
안면인식장애를 겪는 사람들에게도 유난스러운 배려를 할 필요는 없다고 설명한다.
편견과 차별 속에 불편을 겪던 왼손잡이들을 위해 전용 도구들이 등장한 것처럼 언젠가는 얼굴인식 기능이 구현된 증강현실 안경이 문제를 해결해줄지 모를 일이다.
박세준 기자 3ju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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