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가 주인공인 영화에 빠질 수 없는 소품은 칠판이다.
수학·물리학 분야 난제를 백묵(칠판용 필기구)으로 풀어가는 장면은 인간 지성 발현의 시각화다.
뉴욕 FIT 사진학 교수인 저자가 수학자 109인의 칠판을 촬영해서 그들의 글과 함께 펴낸 책이다.
저자는 여름 휴가지 뉴잉글랜드에서 이웃으로 만난 이론수학자 부부가 ‘수학을 위한 수학’을 일상에서도 궁리하는 모습에서 “왜 수학자들은 여전히 칠판을 사용하고 있을까”라는 질문이 떠올랐다고 한다.
교실에 대형 칠판이 처음 설치된 건 200여년 전으로 추정된다.
가장 오래되고 중요한 아날로그 학습 도구로서 칠판을 촬영하게 된 작가는 몇 가지 원칙을 세웠다.
유리보드나 화이트보드가 아닌 진짜 칠판만 촬영할 것, 칠판의 질감과 남아 있는 지우개 흔적, 덧씌운 내용, 표면에서 반사되는 빛까지 최대한 빼놓지 않고 담는 정직한 방식으로 촬영할 것 등.
![]() |
제시카 윈/ 조은영 옮김/ 단추/ 3만8000원 |
저자는 수학자들이 칠판에서 작업하는 모습을 보는 일은 ‘단 한 번뿐인 공연’으로 무척 즐거웠다고 한다.
시각예술가 못지않은 심오한 미의식으로 서로 다른 방식으로 칠판에 써내려가는 공식에서 주체할 수 없는 에너지가 느껴졌다고 한다.
원제인 ‘두 낫 이레이즈(DO NOT ERASE)’는 수학자들이 중요한 연구 내용을 칠판에 남겨두거나 잠시 자리를 비울 때 자주 쓰는 팻말. 어떤 수학자는 몇 년째 칠판에 적은 내용을 지우지 않기도 한다.
워낙 공식이 복잡해서 다시 쓰기 번거로울 때도 있고 계속해서 몰두해야 하는 ‘화두’인 경우도 있어서다.
수학자들이 칠판에 적어둔, 지울 수 없는 문제들은 아직 미완성일 수도, 이미 성공한 발견일 수도 있지만 모두 ‘기록해 둘 가치가 있는’ 생각들이다.
저자는 이 평범한 문구에 의미를 더해 “수학자가 하는 일은 모든 위대한 예술가의 작품처럼 보존되고 명예와 인정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제목에 담았다.
한국인 수학자인 오희 예일대 교수도 등장해서 “수학은 겸손을 가르친다.
인간이라는 존재의 한계를 알려주고 다양한 관점의 중요성과 그 속에 숨은 신비를 보여준다”고 수학의 본질을 설명한다.
박성준 선임기자 alex@segye.com
<본 콘텐츠의 저작권 및 법적 책임은 세계일보(www.segye.com)에 있으며, 뽐뿌는 제휴를 통해 제공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