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즈니+ 시리즈 '하이퍼 나이프'에서 정세옥(박은빈)은 불법 수술을 집도한다.
한때 촉망받는 신경외과 전문의였으나 면허를 박탈당했다.
링거 줄로 스승인 최덕희(설경구) 교수의 목을 졸라 내려진 처분이다.
미국 보스턴에서 연수할 기회와 수술을 주도할 권리를 빼앗기자 극단적 사태를 일으켰다.

그는 약사로 위장해 수술을 이어간다.
의뢰가 들어오면 반색하고 달려갈 만큼 인간의 뇌에 빠져 있다.
다만 철천지원수인 최 교수는 예외다.
뇌간에 악성종양이 생겨 찾아오자 문전박대한다.
"제가 수술을 어떻게 해요? 면허도 없는데." "일정 잡히면 연락하마." "돌았어요? 내가 왜!"
최 교수에게 정세옥은 애증의 대상이다.
비열한 마음을 읽혀 모질게 대했으나 첫 만남부터 후계자로 낙점했다.
가난했던 집안 환경부터 천재적 재능까지 모든 것이 데칼코마니처럼 닮아서다.
오랜 세월 쌓아온 지식과 경험을 공유하면서 세상을 보는 안목까지 같아졌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무엇을 바꿔야 하고, 어떻게 하면 바꿀 수 있는지 등에 대한 물음의 답은 책에서 찾을 수 없다.
오직 스승의 입을 통해서만 온전히 알 수 있다.
변화를 향한 시선도 마찬가지다.
스승은 축적해온 지식을 바탕으로 새로운 세상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있어도 여러 가지 이유로 이를 주도하거나 이끌어가지 못한다.
자신이 못다 한 실천의 영역을 제자에게 물려주고자 변화에 대한 안목을 키워주고 필요한 지식을 알려준다.
세상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새로운 문을 열어주는 것이다.

최 교수의 태도도 다르지 않다.
정세옥이 뒤늦게 수술을 승낙하자 일부러 병을 악화시킨다.
자기가 최고라고 자부하는 제자에게 깨우침을 주기 위한 특단의 조치다.
정세옥을 믿고 따르는 마취과 의사 한현호(박병은)에게 나지막한 목소리로 고백한다.
"나나 세옥이 수준의 외과의한테는 다음 단계가 없어. 절벽에서 떨어뜨리려고 하는 게 아니야. 더 날아오르게 하고 싶은 거야. 나는 못 날랐지만 세옥이는 다음 단계로 날아봐야지. 환자 때문에 울어도 보고, 통곡도 해봐야, 그래야 자기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거야. 간절히 살리고 싶은 누군가를 죽여봐야, 가슴이 찢기고 의사로서 자신을 불신하고 더 이상 메스를 잡을 수 없는 그 순간을 경험해야 해. 내가 줄 수 있는 건 다 줘야지."
그의 말대로 모든 제자가 스승의 가르침을 따르기만 했다면 세상은 지금처럼 발전할 수 없었다.
교육을 받아들이면서 자연스레 의문을 품었기에 변화를 일으킬 수 있었다.
스승이 가리키는 방향과 다른 곳을 함께 바라보며 새로운 세계를 꿈꿨다.
어쩌면 모든 일에 의문을 던지고 자신을 세상의 중심으로 놓는 인간의 특성상 당연한 과정일지 모른다.
인간은 순응하는 대신 질문하고, 그 물음에 답하면서 발전해온 존재다.

'하이퍼 나이프'는 이처럼 지식이나 신념을 전수할 대상이 아닌 변화를 위한 밑바탕으로 본다.
스승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른 제자의 치열한 삶을 펼치고 세상을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힘과 원칙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설정이 다소 과장되고 잔혹하나 계승과 창조로 대표되는 묘한 사제(師弟) 관계만큼은 절묘하게 살려낸다.
특히 혁신은 단순한 가르침에서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 그러하다.
그 안에 숨어 있는 창조의 법칙을 깨달은 소수만이 혁신을 이루고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 밑바탕에 스승의 가르침이 침전돼 있다면서.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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