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황에는 미래를 위한 인수합병(M&A)에도 신중한 전략이 필요하다. 최근 수년간 포모(FOMO·fear of missing out, 나만 뒤처진다는 불안감) 심리에 사로잡힌 대기업들의 대규모 M&A 투자가 그룹의 실적과 재무구조에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포모 투자로 발 빠르게 미래기술을 흡수한 기업집단이 있는가 하면, 업황 사이클을 잘 못 읽어 계열사 전반에 재무 부담을 안기고 기약 없는 침체에 빠진 기업집단도 눈에 띈다.
'캐시카우' 기대했지만, 다운 사이클 직면 '돈 먹는 M&A' 26일 투자은행(IB) 업계에 따르면 롯데그룹의 공격적인 M&A 후폭풍이 그룹 전체의 재무건전성에 영향을 주고 있다. 지난해 불황 속에서 롯데케미칼이 2조7000억원에 인수한 일진머티리얼즈(현 롯데에너지머티리얼즈)에 대한 투자는 계열사들의 신용등급 강등으로 이어지며 롯데그룹 재무구조 전체에 부담이 되고 있다.
세계 4위 동박업체 일진머티리얼즈 인수는 지난해 M&A 최대어로 꼽힐 정도로 규모가 큰 '빅 딜'이었다. 동박은 구리를 두께 100㎛(1㎛는 100만분의 1m) 이하로 얇게 만든 막으로, 배터리에서 발생하는 열을 외부로 방출하는 역할을 한다. 전기차 시장의 성장과 함께 시장의 주목을 받았다. 막판까지 인도 5대 기업집단인 아디뜨야 벌라(ADITYA BIRLA)그룹과 치열한 경합을 벌여 힘들게 인수한 회사로, 신동빈 회장이 미래사업을 위해 직접 움직여 세간의 관심을 끌었다. 추가 자금 마련을 위해 여러 차례 유상증자를 단행하기도 했다.
하지만 전기차 캐즘(Chasm·일시적 수요 정체)과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을 앞두고 전기차 및 배터리 관련 산업의 침체는 장기화할 전망이다. 롯데가 인수결정을 한 2022년 말까지만 해도 이 회사는 연간 848억원의 영업이익을 거뒀는데, 지난해 118억원 수준으로 줄었다. 올해는 약 220억원(증권사 전망치)의 영업손실을 예고하고 있다. 롯데케미칼은 인수 과정에서 금융권 자금 1조3000억원을 조달했는데, 내년 7000억원 규모 인수금융 만기가 도래하기 때문에 자금계획 수립이 시급한 상황이다.
한 M&A 전문가는 "롯데가 한때 M&A를 잘하는 기업으로 명성이 높았는데 최근 딜들은 결과적으로 포모의 덫에 걸린 것 같다"며 "M&A를 전문으로 하는 PEF들도 경기 사이클을 참조하지만, 항상 예측하기 어려워서 산업 사이클이 큰 업종은 피하려고 하는데 롯데의 경우 다운 사이클에서 극명하게 결과가 드러나는 M&A를 진행했다"고 말했다.
지금 투자하지 않으면 미래에 더 큰 비용 부메랑‥'돈 버는 M&A' 포모 심리에 따른 M&A가 기업에 나쁜 영향만 미치는 것은 아니다. 미래에 지불할 비용을 미리 내고, 외려 수익을 붙여 돌려받을 수 있다는 기대감이 큰 M&A 투자도 관측된다. 현대차그룹은 로봇과 자율주행 등의 기술을 확보하기 위해 2021년 1조원을 들여 보스턴다이내믹스(Boston Dynamics)를 인수했고 2022년에는 약 4300억원에 포티투닷(42dot) 지분을 인수했다. 이후 포티투닷 추가지분을 매입하면서 총 1조5000억원 가량을 투입했다. 현대차그룹은 이런 조단위 자금을 투입해 적자회사를 인수했다.
보스톤다이내믹스의 경우 인수 첫해 1970억원의 당기순손실을 낸 데 이어, 2022년 2550억원, 지난해에는 3348억원의 당기순손실을 기록했다. 지속 적자인 회사지만 기업가치는 증가하고 있어 상장(IPO)에 성공한다면 투자금 이상을 회수할 수 있다. 최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의 경호 임무에 보스턴다이내믹스가 개발한 로봇개 '스폿(Spot)'이 투입되는 등 미국 내에서 상용화에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또한 실제 사람처럼 일하는 휴머노이드 로봇 아틀라스의 작업영상이 공개되면서 외신의 뜨거운 조명을 받기도 했다.
소프트웨어 중심 차량(SDV)과 자율주행 기술을 개발하는 포티투닷은 2020년부터 지난해까지 2700억원 이상의 누적 적자와 함께 이익 결손금 3840억원을 기록했다. 당장 수익을 내는 사업은 아니지만, 자율주행차 시대 주도권 확보를 위한 투자는 지속될 전망이다. 자동차의 핵심이 소프트웨어로 넘어가는 만큼 자체적인 SDV 기술 보유 여부는 사업의 수익성에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현재는 적자기업이지만 미래에 다른 기업이 개발한 SDV체제를 활용하는 과정에서 비용이 발생하고 수익성이 낮아지는 것을 감안하면 이유 있는 투자라고 볼 수 있다. 지속 적자에서 불구하고 지난해 약 1조원 규모의 유상증자를 단행하는 등 투자 규모를 확대하고 있다.
고부가 제품에 투자‥연구개발 성과는 '미지수 M&A' LG그룹에서는 M&A를 통해 항암 신약 개발에 도전한다. LG화학은 2022년 약 8000억원을 투입해 미국의 항암제 전문기업 아베오파마슈티컬스를 인수했다. 세계에서 가장 큰 항암 시장인 미국을 겨냥한 전략이다. LG화학은 항암 신약 분야에 공격적인 연구개발과 파이프라인 확장을 이어가고 있다. 아베오를 활용해 후기 임상과 상업화까지 직접 준비한다는 목표다.
신약개발을 위한 연구개발 예산도 2020년 1740억원에서 지난해 약 4000억원으로 크게 증가했다. 올 3분기 실적을 보면 LG화학은 생명과학부문에서 매출 3071억원, 영업손실 9억원을 기록했다. 당뇨, 백신 등 주요 제품이 출하 호조를 나타냈지만, 연구·개발 비용 증가로 소폭 적자를 기록했다. LG화학은 지난해 IT필름사업과 진단사업부를 과감하게 매각했지만 고부가가치 제품인 항암 신약과 배터리, 친환경 소재 분야에 집중하겠다는 전략이다. LG화학이 어렵다는 항암 신약 분야에서 구체적인 성과를 낼 수 있을지는 아직 미지수다.
투자업계 한 고위관계자는 "M&A를 할 때는 인수 후에 회사를 운영할 전문적인 인재가 내부에 있는지를 중요하게 봐야 한다"며 "재무 상황 등 어쩔 수 없이 팔아야만 하는 회사가 아니고 단순히 대주주가 팔겠다고 하는 물건을 사면 2~3년 후 시장이 망가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파는 사람의 생각을 잘 읽는 것이 중요하다"고 귀띔했다.
박소연 기자 muse@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 무단전재 배포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