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가는 비행기를 못 타는 것 아니냐."
5일 열리는 국내 금융투자업계 행사에 참석할 예정이었던 외국계 운용사 관계자는 비상계엄 사태로 국내 정세가 급박하게 돌아가자 이 기관 관계자한테 4일 새벽 전화를 걸어왔다고 한다. 국내 정치 상황을 깊게 알지 못하는 외국인 투자자 입장에선 '대통령의 계엄 선포'라는 상황 자체가 한국 방문을 주저하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했다는 것이다. 다행히 국회의 계엄 해제 요구 결의안이 의결되면서 시장에 대한 우려는 진정됐지만, 여진은 남아 있다.
이날 오후 1시25분 현재 코스피지수는 전 거래일보다 1.75% 떨어진 2456.54를 나타내고 있다. 코스피는 이날 장중 한때 2% 넘게 밀리며 2440선을 오르내렸다. 정부 개입으로 안정세를 보이는가 싶었던 코스피는 외국인 투자자들이 5000억원 넘게 매도하며 낙폭을 다시 키우는 모양새다.
해외 투자자들과 접촉하는 국내외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들은 대통령의 거취 및 국내 정치 상황이 어떻게 전개될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외국인 투자자들이 저점 매수가 아닌 관망세로 대응할 것으로 보고 있다.
국내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외국인 투자자들 사이에서 계엄사태가 봉합된 것이 아니라 급한 불만 껐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므로 당분간 외국인 투자자들은 국내 주가가 내려가도 저점 매수를 하지는 않을 것"이라며 "계엄사태로 인한 정치적 리스크가 어떤 경로로 갈지 예측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외국인 투자자는 관망세를 보일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이남우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 회장은 "환율이 고공행진하면 삼성전자, 현대차 등 수출기업은 상당한 이익을 낸다. 외국인 투자자들은 통상 기업 이익을 예측해 매수한다. 과거 같으면 이들 수출기업에 매수세가 들어왔겠지만, 이번엔 수출기업 대부분의 주가가 약세를 보이고 있다"며 "이는 외국인이 적극적으로 매수하지 않는다는 의미이고, 그만큼 계엄사태가 촉발한 리스크가 높다고 판단해 밸류에이션을 낮게 가져갈 가능성이 크다"고 내다봤다.
글로벌 투자자들의 관망세로 인한 수급 공백을 정부가 메울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정부는 이날 시장안정을 위해 증권시장 안정펀드와 채권시장 안정펀드 등 가용한 모든 자원을 동원하겠다고 밝혔다. 김병환 금융위원장은 이날 금융감독원장, 금융공공기관 등 유관기관장 및 금융협회장들과 '금융상황점검회의'를 열고 "10조원 규모의 증시안정펀드(증안펀드)가 언제든 즉시 가동될 수 있도록 준비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또 "채권시장·자금시장에는 총 40조원 규모의 채권시장 안정펀드(채안펀드)와 회사채·기업어음(CP) 매입 프로그램을 최대한 가동해 안정을 유지하겠다"고 덧붙였다.
밸류업·상법개정·금투세까지…제자리로 돌아간 자본시장 관련 정책들 외국계 자산운용사 관계자는 "원화 자산을 가져가는 것이 불안하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꼈다"고 한탄하기도 했다. 그도 그럴것이 윤석열 대통령이 3일 비상계엄을 선포한 이후 원·달러 환율은 한때 1430원까지 치솟았다. 국내 주식 선물과 가상자산 가격도 롤러코스터를 탔다. 환율이 심리적 지지선인 1400원대를 넘어선 지 이제 막 3주째 접어든 가운데 이마저도 뚫어버린 것이다.
원화자산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 악화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사공창한 슈로더투자신탁운용 본부장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 이후로 관세 인상 등 한국 경제에 대한 압박이 커진 상황에서 정치적 요인까지 더해져 한국 자본시장에 대한 외국인 투자자들의 부정적 시각이 심화할 가능성이 크다"며 "주식, 채권, 국채에 대한 아웃플로어가 추가로 발생할 수 있고 신용부도스와프(CDS) 스프레드가 올라갈 가능성이 있어 한국이 해외투자자를 유치하거나 해외자금을 끌어모으는 과정에서 비용이 올라갈 수 있다"고 전했다.
CDS는 국가나 기업의 신용위험 지표로 수치가 높을수록 국가신용도의 위험 수준이 올라가는 것을 의미한다. CDS 프리미엄은 국제금융시장에서 한국의 대외신인도를 측정하는 지표다. 이 지표가 상승하면 국내 대외신인도를 떨어뜨려 정부의 외화자금 조달 비용을 높일 뿐 아니라 해외자본의 유출과 국내 금융시장의 변동성을 높이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계엄사태 이후 글로벌 IB들의 코멘트를 확인했다는 사공창한 본부장은 "계엄사태로 인해 심화한 코리아 디스카운트가 해소되려면 당분간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며 "불안정한 정국 분위기가 해소되지 않고 지속되면 내년 1분기까지 외국인 수급이 돌아오지 않을 수 있다"고 했다. 외국인 매도 행렬이 지속되고 있는 가운데 계엄사태가 외국인 수급 악화를 부채질한 셈이다.
한국 증시 부양을 위해 속속 추진됐던 정책들도 추진 동력을 잃게 됐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더불어민주당이 개최하는 '상법 개정 토론회'에서 직접 좌장을 맡을 예정이었으나 계엄사태로 토론회가 돌연 취소됐다. 토론회 발표를 맡았던 한 관계자는 "새벽 3시에 취소 연락을 받았다"면서 "아무래도 정국 수습이 우선인 상황이라 상법 개정은 야당 우선순위에서 뒤로 밀리지 않겠냐"고 전했다. 금융투자소득세(금투세) 폐지에 대한 불확실성도 커졌다. 이달 10일까지 정기국회에서 여야가 금투세 폐지에 나설 것이란 전망이 지배적이었지만 이마저도 계엄 사태로 불투명해졌다. 윤 대통령이 올 초만 해도 한국거래소 증시 개장식에 참석해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를 선언하며 증시 부양에 힘을 쏟는 모습이었지만 오히려 증시를 뒷걸음치게 만드는 장본인이란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김윤정 LS증권 연구원은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은 올해 정부의 주요 정책 과제로서 적극 추진해온 자본시장 활성화 정책"이라며 "정책 추진 동력이 돼야 할 법안 개정 필요 안건들이 빠르게 통과되지 못하고 계류 중이던 상황에서, 이번 사태로 현 정권의 리더십과 정권 유지 여부에 대해 빨간불이 켜진 상황"이라고 판단했다.
김민영 기자 argus@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 무단전재 배포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