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감독원이 내년부터 퇴직연금 운용에 있어 위험자산 비중을 확대하도록 적극적으로 유도한다. 퇴직연금 수익률을 높이기 위해 사전지정운용제도(디폴트옵션)를 도입했음에도, 여전히 가입자의 90%가 예금 등 원리금 보장 상품에 투자하고 있어서다. 아울러 위험자산 비중 확대를 통해 한국 증시 밸류업도 달성하겠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다만 이를 위해서는 고용노동부의 적극적인 협조가 필요하다. 고용노동부는 퇴직연금 제도 주무 부처고, 연금의 원금 보장을 중요시하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17일 금융당국 및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금감원 연금감독실은 1월6일 업무보고를 진행하고, 1월 중순 세종시로 내려가 고용노동부와 퇴직연금 제도 관련 미팅을 갖는다.
앞서 금감원은 조직개편을 단행해 민생금융 부문에 속했던 연금감독실을 금융투자 부문으로 이동했다. 연금감독실이 금융투자 부문 아래 놓인 점은 상징적이다. 앞으로 주식, 상장지수펀드(ETF) 등 위험자산 중심으로 퇴직연금 운용 방향을 관리하겠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실제 금감원은 퇴직연금 시장의 성장과 중요성 확대 등에 따라 연금사업자 등에 대한 관리·감독 강화 필요성이 커졌다고 조직 개편 배경을 설명했다.
연금감독실이 구상하는 퇴직연금 운용 방향은 미국의 퇴직연금 제도인 '401K'이다. 401K는 매달 일정액을 근로자가 적립하면 회사가 기여금을 매칭해주는 것으로, 투자 비중의 약 71%가 주식이다. 반면 한국은 대부분 예금, 채권 등 안전자산에 투자하고 있다. 고령화 사회가 심화하는 가운데 연금 수익률을 끌어올리기 위해 정부는 지난해 7월 디폴트옵션 제도를 도입했다.
디폴트옵션은 확정기여(DC)형 혹은 개인형 퇴직연금(IRP) 가입자가 운용 지시를 하지 않을 경우 사전에 정해둔 방법으로 적립금이 자동 운용되는 제도다. 디폴트옵션 상품은 기대 수익률과 투자 위험도에 따라 초저위험·저위험·중위험·고위험 등 4가지로 나뉜다.
금감원 자료를 보면 올해 상반기 기준 디폴트옵션 상품에 가입한 퇴직연금 적립액은 32조9095억원으로 작년 말(12조5520억원)보다 162.19%(20조3575억원) 증가했다.
작년 말 적립금(12조5520억원) 가운데 초저위험 상품은 89%(11조2879억원)에 달했다. 올해 상반기 디폴트옵션 적립금은 2배 이상 증가했지만, 여전히 89%(29조3478억원)가 예금, 채권 등에 투자하는 초저위험 상품이다. 올해 상반기 기준 고위험 상품은 1.47%(4834억원) 수준에 머물렀다. 디폴트옵션 도입 취지를 전혀 못 살리는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올해 상반기 기준 퇴직연금 상품의 1년 평균 수익률을 보면 초저위험 상품은 3.47%에 불과하다. 이는 지난해 소비자 물가상승률(3.62%)보다 낮다. 반면 고위험은 16.55%, 중위험은 12.16%, 저위험은 7.51%를 기록했다.
금감원은 디폴트옵션 제도를 재정비하고 주식 비중을 높이도록 관리·감독할 계획이다. 이를 위해 이동규 자본시장감독국 총괄팀장을 연금감독실로 배치했다. 이 실장은 입사 후 줄곧 자본시장·회계 분야만 맡았다. 임원들로부터 업무 추진력이 강하고, 자본시장 제도 전반에 대한 이해가 높으며 카리스마가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퇴직연금 운용사의 운용 기조 변화를 유도하기 위해 이 실장을 전격 발탁했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금감원 조직 개편과 인재 발탁만으로 한계가 있다는 시각이 우세하다. 퇴직연금 제도는 고용노동부 소관이기 때문이다. 퇴직연금 제도를 바라보는 고용노동부와 금감원의 시각은 판이하다. 고용노동부는 퇴직연금 정책의 우선순위를 ①단계적 의무화 ②연금수령 유도(연금화 유인 강화) ③수익률 개선 순으로 설정했다. 특히 장기적으로 재정 안정성을 고려하는 것이 주요 과제다.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고용노동부는 퇴직연금 운용에 있어 원금을 지키는 데 중점을 두고, 금감원은 수익률을 높이기 위해 주식 등 위험자산 비중을 확대하고 궁극적으로 증시 가치까지 노리기 때문에 상반된 입장을 갖고 있다"며 "수익률 확대를 위해서는 반드시 고용노동부의 공감대가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황윤주 기자 hyj@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 무단전재 배포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