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대(對)중국 반도체 제재를 레거시(범용) 반도체까지 확대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중국 기업들이 미국의 반도체 제재를 살짝 비켜간 레거시 반도체 생산에 사활을 걸며 세계 시장에서 점유율을 빠르게 확대해 나가고 있는 가운데 나머지 빈틈까지 막겠다는 미국의 의지로 풀이된다.
뉴욕타임스(NYT)는 미국 워싱턴DC 소재의 한 무역협회가 회원사들에 보낸 소식지를 인용해 바이든 행정부가 중국산 레거시 반도체를 상대로 불공정 무역 행위 조사를 실시하기로 했다고 16일(현지시간) 보도했다. 그동안 미국은 국가 안보 우려를 이유로 최첨단 반도체에 대해 중국의 접근을 차단해 왔지만 레거시 반도체에 대해서는 제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중국 정부가 레거시 반도체 생산을 위한 공장 건설에 막대한 자금을 쏟아붓고 있고, 이에 따라 미국 등에 있는 레거시 반도체 생산 공장들이 하나둘 문을 닫게 되면 중국에 대한 의존도가 더욱 높아질 수 있다는 우려가 미국 관리들 사이에서 나오고 있다고 NYT는 짚었다. 즉 전기차·배터리 시장에서 발생하고 있는 중국의 과잉생산 문제가 레거시 반도체 시장에서도 발생할 수 있다는 우려다. 미 싱크탱크 실버라도 폴리시 액셀러레이터에 따르면 2022~2023년 중국의 반도체 공급 가격은 해외 경쟁사보다 20~30% 낮았다. 이번 조사는 중국산 레거시 반도체에 대한 관세 부과 또는 수입금지 등 조치로 이어질 전망이다. 다만 조사에 최소 6개월이 소요되는 만큼 최종 결정은 내년 1월 출범하는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내릴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해 지나 러몬도 상무부 장관은 지난 7일 '레이건 국방포럼' 연설에서 중국이 레거시 반도체 생산 등에 보조금을 지급하고 있다면서 "그것은 불공평하다. 이 문제에 대해 관세가 필요한 경우도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세계 시장 장악하는 중국산 레거시 칩
실제 '메이드 인 차이나' 레거시칩은 세계 시장을 장악하고 있다. 미국 컨설팅업체 로디움그룹은 보고서를 통해 중국이 2027년 전 세계 레거시 반도체 생산의 약 40%를 장악할 것으로 내다본 바 있다. 이는 2015년 대비 2배 수준이다. 중국은 이미 지난해 글로벌 레거시 반도체 생산량 가운데 약 3분의 1을 차지했다. 중국이 미국의 반도체 제재에 대응해 투트랙 전략을 취해온 덕분이다. 비교적 생산하기 수월한 레거시 반도체부터 글로벌 점유율을 높이면서 동시에 첨단 반도체 개발도 함께 진행한 투트랙 전략이 효과를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 해관총서(세관)가 지난 16일 발표한 무역통계에 따르면 1~11월 중국 집적회로 수출 규모는 전년 동기 대비 18.8% 증가하면서 사상 최대치인 1447억 달러를 기록했다. 수출량은 2716억개에 달해 전년 동기 대비 11.4% 늘었다.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 산하 경제 분석 기관 이코노미스트 인텔리전스 유닛(EIU)의 쉬톈천 이코노미스트는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에 "중국이 28나노(나노미터·10억분의 1m) 칩 생산 기술을 숙달하면서 기업들이 비용 이점을 활용해 수출에 적극적으로 나섰다"면서 "이는 (중국 레거시 반도체가) 글로벌 시장에서 상당한 점유율을 확보하는 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한편 이 기간 중국의 반도체 수입량 역시 5014억7000만개로 전년 동기 대비 14.8%나 늘었다. 미국이 대중국 반도체 수출통제를 확대할 것을 대비해 중국 기업들이 반도체 비축에 속도를 내고 있다고 SCMP는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