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아연 경영권 분쟁의 승부가 안갯속에 빠졌다. 오는 23일 임시 주주총회를 앞두고 외국인 투자자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의결권 자문사가 최윤범 고려아연 회장측에 유리한 권고안을 내면서다. MBK·영풍 연합 측의 이사회 장악 가능성이 현저하게 줄어들어 경영권 분쟁이 장기화할 것으로 보인다.
15일 투자은행(IB) 업계에 따르면 전날 미국의 의결권 자문사 글래스루이스는 고려아연 임시 주총에서 집중투표제를 도입하는 안건과 이사 수를 19명으로 제한하는 안건에 모두 찬성을 권고했다. 모두 고려아연측이 제시한 안건이다. 신규 이사 후보에 대해서는 고려아연측이 추천한 4명에 대해서만 찬성을 권고했다. MBK파트너스는 "기존 경영진에 대한 편향성뿐만 아니라 집중투표제 찬성 이유와 이사진 구성 간 논리적 모순까지 담고 있다"며 반발하기도 했다. 글로벌 의결권 자문사의 권고에 공개 반박하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그만큼 글래스루이스의 영향력은 상당하다. 글로벌 의결권 자문 시장에서 ISS와 합쳐 점유율 9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양대 산맥이다. 고려아연의 외국인 지분율은 7% 수준이며, 이들은 대부분 자문사가 권고한 대로 의결권을 행사한다. 실제로 최근 미국 캘리포니아공무원연금은 ISS의 권고안 그대로 의결권을 행사하기로 결정했다.
집중투표 도입 가능성↑…MBK연합 이사회 장악 가능성↓ ![](//cdn2.ppomppu.co.kr/zboard/data3/hub_news2/2025/0115/newhub_2025011415080888599_1736834888.jpg) 현재 고려아연 이사회는 13명이다. 장형진 영풍그룹 고문을 제외하면 모두 최윤범 회장측 인사로 분류된다. 12대1 구도다. MBK측이 이사회 과반을 장악하려면 3개의 산을 넘어야 한다. 집중투표제 도입과 이사 수 상한을 부결시키고 자신들이 추천한 이사 후보 14명을 이사회에 입성시키는 것이다. MBK연합은 최근 수개월 동안 공개매수와 장내 매입을 통해 지분율을 40.97%까지 늘리며 승기를 잡는 듯했다. 34%대로 추산되는 최윤범 회장측과 격차가 7% 수준이다.
그러나 양대 의결권 자문사의 입장이 정리되면서 최윤범 회장측이 대결해볼 만한 발판이 마련됐다. 신규 이사 후보에 대해 글래스루이스는 고려아연측 추천 후보 4명 찬성, 나머지는 전부 반대를 권고했다. ISS는 MBK연합측 인사 4명에 대해서만 찬성을 권고했다. ISS가 MBK연합측의 손을 들어주긴 했으나 이사회 과반을 장악하려는 MBK연합측의 계획에는 턱없이 모자란다. 이사회 정원을 19명으로 제한하는 안건은 양대 자문사가 모두 찬성을 권고했다.
이번 주총 최대 관심사로 떠오른 집중투표제 도입의 경우 글래스루이스는 찬성, ISS는 반대를 권고했다. 의결권을 3%까지만 행사할 수 있는 '3%룰'이 적용되는 집중투표제 도입 안건은 지분이 잘게 분산돼 있는 최윤범 회장측이 유리하다. 반면 영풍그룹, MBK파트너스 등 소수에 지분이 집중된 MBK연합의 의결권은 3분의 1 이하로 대폭 감소한다. 집중투표제가 통과되면 보유주식 1주당 뽑는 이사 수만큼 투표권을 얻기 때문에 특정 후보에 '몰아주기'가 가능하다. 이 경우 MBK연합의 이사회 장악은 불가능하다. 국내 3대 의결권 자문기관 중 하나인 서스틴베스트도 집중투표제 찬성을 권고했으며 소액주주연대 '액트'도 공개 지지했다.
시장의 시선은 국내 최대 기관투자가 국민연금으로 향한다. 국민연금은 고려아연 지분 4.51%를 보유하고 있다. 최윤범 회장측이 글로벌 의결권 자문사를 등에 업고 지분 열세를 극복할 수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국민연금은 캐스팅보트로 꼽힌다. MBK연합과 최윤범 회장측, 외국인, 국민연금을 제외한 일반주주의 지분은 다 합쳐도 1%도 안 된다. 국민연금은 17일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수책위)를 열고 고려아연 주총의 의결권 방향을 심의할 예정이다.
수탁자책임 활동에 관한 지침에 따르면 집중투표 배제를 반대하고, 도입하는 안건에 찬성하게 되어있다. 그러나 정당한 사유가 있는 경우 원칙을 따르지 않아도 된다. 한석훈 수책위원장은 2018년 집중투표제를 의무화하는 내용을 담은 상법 개정안에 "외국에서도 점점 폐지되어 가는 제도를 강제적으로 도입한다는 것은 다분히 시대착오적"이라는 견해를 내놓는 등 집중투표 반대론자로 꼽힌다. 최근의 경영권 분쟁인 한미사이언스 주총 당시 국민연금은 찬반이 아닌 '중립'을 결정하기도 했다. 중립은 주주들의 찬반 비율에 맞추어 의결권을 나눠서 행사하는 것이다.
오유교 기자 5625@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 무단전재 배포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