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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기에 수도 브뤼셀에 위치한 EU 집행위원회(European Commission) 본부 전경. |
실제로 ‘ESG 경영’을 주요 전략으로 내세우던 대기업 한 곳은 전 계열사의 관련 팀을 모두 없애거나 작은 조직으로 축소했다고 하고, ‘ESG 금융’을 내세우던 한 금융그룹은 대신 ‘SDGs(지속가능발전목표) 금융’으로 바꾸었다는 뉴스가 나오기도 했다.
ESG라는 용어는 2006년 유엔을 통해 처음 등장했지만, 원래 금융 분야에서 투자 전략을 세우거나 기업의 성과를 평가할 때 쓰이던 용어였다.
이 개념의 창시자로 누구 한 명을 딱 짚을 수는 없지만, 통상 28년 전 존 엘킹턴(John Elkington)이라는 창업가가 ‘포크를 든 야만인(Cannibals with Forks: The Triple Bottom Line of 21st Century Business)’이라는 저서를 통해 지속가능경영의 3대 축을 의미하는 ‘Triple Bottom Line’(TBL)이라는 용어를 최초로 사용하면서 기업의 성과 평가 시 사회적·환경적·경제적 영향을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 그 발단으로 보고 있다.
ESG가 지금처럼 글로벌 이슈가 된 건 2020년 1월부터다.
당시 세계 최대의 자산운용사 블랙록의 래리 핑크 회장이 투자 대상 기업을 상대로 한 ‘최고경영자(CEO)에게 보내는 연례 서한’을 통해 “ESG 성과가 나쁜 기업에는 투자하지 않겠다”고 선언, 전 세계 주요기업의 큰 관심을 촉발했었다.
그 후부터 이른바 ‘ESG 열풍’이 전 세계를 빠르게 순환하더니, 그 정점이 한국에 이르러서 거의 최고조에 이르는 분위기였다.
2021년부터 국내 주요 언론은 연일 ESG 경영을 산업과 경제면의 주요 뉴스로 조명했고, 연말에는 관련된 수많은 ‘상’이 만들어졌다.
ESG라는 타이틀을 단 각종 컨설팅 기관 수십 개가 새로 생겨났고, 사회적 영향력을 미치던 시민·사회단체, 비영리기관들은 너나 할 것 없이 ESG 컨설팅에 뛰어들었다.
덕분에 2021년~2024년은 ‘기업 ESG 보고서의 전성시대’이기도 했다.
마침내 국내의 ESG 열풍은 크게 두 가지 분야로 모여지게 되었는데, 하나는 회계 영역의 ‘지속가능성 공시’이다.
국제재무보고기준 재단(IFRS Foundation) 산하의 국제지속가능성기준위원회(ISSB)가 지속가능성 관련 재무정보 공시를 만들어 전 세계 회계 기준에 ‘기후 관련 공시’ 및 ‘탄소 배출량’ 등을 반영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는데, 국내에서는 이 기준을 언제, 어떻게 도입할지 논의하는 과정이 집중 조명을 받았었다.
다른 하나는 ESG 활동을 상장기업의 다양한 평가 및 투자에 녹여내겠다는 논의였다.
먼저 ISSB의 지속가능성 공시는 140개국에 적용하던 기존 국제회계기준(IFRS)과 같이 국제 자본시장에 광범위하게 적용될 것이라는 전망에 따라 한국 정부도 금융위원회를 중심으로 활발히 논의한 바 있다.
‘곧 국내 회계기준에도 적용될 것’이라는 예측이 나왔지만, 현재로써는 2026년 도입조차 불투명하고, 이를 적극 검토하던 20여개 국가도 도입을 연기 또는 전면 취소하고 있는 실정이다.
ESG 평가의 새로운 기준을 만들겠다며, 한국거래소 유관기관이던 한국기업지배구조원은 기관명도 ‘한국ESG기준원’으로 변경했다.
또 거래소가 지속가능경영보고서 자율 공시를 적극 권하는 바람에 국내 주요 기업에 ESG 평가등급 열풍도 불었지만, 지금은 이 역시 분위기가 가라앉은 상황이다.
무엇보다 관련 뉴스의 거의 상당수를 차지하고 국내 ESG 활동의 ‘기준선’ 역할을 한다고 해도 무방하던 유럽연합(EU)발(發) 소식이 눈에 띄게 사라졌다.
오히려 최근 ‘ESG 속도 조절’ 소식이 들려온다.
EU 집행위원회((EC)는 지난달 26일 에너지 집약산업을 비롯한 제조업계의 청정에너지·순환 경제 전환을 지원하는 입법 패키지인 ‘청정산업 딜’(Clean Industrial Deal)을 발표했는데, 여기에는 기존 EU 규정을 간소화하는 새로운 정책인 이른바 ‘옴니버스 패키지’가 포함됐다.
옴니버스 패키지의 핵심은 EU 산업계의 탄소 중립과 기후행동책임 강화를 위해 마련했던 ‘기업 지속가능성 보고지침’(CSRD)의 규제 범위를 대폭 축소하겠다는 것이다.
ESG 강화를 적극 주장하는 이들에게 EU의 기업 지속가능성 보고지침(Corporate Sustainability Reporting Directive·CSRD)과 기업 지속가능성 실사지침(Corporate sustainability due diligence·CSDDD)은 바이블로 통한다.
기업의 공급망 리스크 관리와 관련해서는 상징과 같은 지침이었다.
그러나 EU 경제가 휘청거리면서 프랑스와 독일 등 핵심 국가들이 축소나 연기를 강력히 요구했고, EC는 이 제안을 받아들여 약 5만곳 이상으로 예상되던 CSRD 적용 대상 기업을 80% 이상 제외하고, 규모가 큰 대기업 위주로 보고 의무를 부여하겠다고 수정했다.
또 올해부터 2027년까지 보고 의무 대상인 기업은 2028년까지로 기한을 연장했다.
사실상 EU ESG 정책의 후퇴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더군다나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신행정부는 ESG 정책을 기업과 산업계를 죽이는 ‘반산업적 정책’으로 규명하고, 대대적 손보기에 나서고 있다.
무엇보다 ESG의 ‘큰손’ 역할을 하던 뉴욕 월스트리트 금융가도 더는 투자 요인을 찾거나 흥미를 가지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필자는 지난 3년간 EU의 위촉 홍보직책인 기후협약 대사로 활동하며, EU의 심장부인 브뤼셀에 직접 방문해 EC와 유럽의회(EP), 유럽경제사회위원회(EESC) 회의에 수차례 참석한 바 있다.
특히 EC 수석 부집행위원장, 캐비넷 멤버, 각 부처의 총국장(한국의 차관급)과의 미팅도 참여했지만, ESG 용어를 정확히 사용하는 책임자를 만나지는 못했다.
정말 우리가 아는 그 ‘EU發 ESG 광풍’이 어디에서 왔는지 궁금할 정도로 용어 사용 근원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유럽의 ‘녹색 수도’라 불린 에스토니아 탈린도 수차례 오갔지만, 여기서도 찾을 수는 없었다.
이제는 어떤 하나의 기준에 매몰돼 기업 활동을 ‘선과 악’으로 나눠 평가해서는 안 된다.
사실 ESG의 모든 의미를 포괄적으로 포함하고 있는 유엔의 지속가능발전목표(SDGs)는 다음 구호로 대표된다.
‘Leave No One Behind’(누구도 뒤에 남기지 말라) 즉 지속가능발전’은 누구도 소외되지 않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는 것으로 선과 악을 구분하라는 뜻이 아니다.
누구라도 지속가능성 안에 포함되도록 ‘작은 걸음’이라도 헛되지 않게 만드는 것이 진짜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응원하고 권고’하는 목표로써 ESG가 존재해야 하는데, 뒤처지는 기업에 낙인을 찍고 투자를 철회하라고 압력을 넣는 것은 분명 원래의 목적은 아닐 것이다.
우리 경제가 연 2% 미만으로 성장한 것은 1998년 외환위기를 포함해 6차례뿐인데, 올해와 내년 1%대의 저성장이 예고되어 있다.
우리뿐 아니라 유럽,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에 경제위기의 그늘이 깊게 드리워져 있는 상황이다.
이제 ESG를 위해 희생을 강요하기보다 모두의 성장과 번영을 위해 제대로 그 의미를 읽고 나가야 할 때다.
김정훈 UN SDGs 협회 대표 unsdgs@gmail.com
*김 대표는 현재 한국거래소(KRX) 공익대표 사외이사, 유가증권시장위원회 위원, 유엔사회개발연구소(UNRISD) 선임협력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