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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프라이스워터하우스쿠퍼스(PwC)는 지난 11일 글로벌 회계 컨설팅 그룹 PwC에서 아시아·태평양 14개국의 지속가능성 현황을 조사한 보고서를 발간했다고 밝혔다.
보고서에 따르면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공시 의무화를 확정한 국가는 호주와 중국(홍콩),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대만, 인도, 베트남 등 7개국이며, 올해 로드맵을 확정하기로 계획한 국가는 한국을 포함한 일본, 태국, 인도네시아 등 4개국이다.
국제지속가능성기준위원회(ISSB)를 기반으로 자체 기준에 적용한 국가는 호주, 일본, 중국(홍콩)이었고, 인도와 베트남은 완전한 자체 기준을 수립했다.
ISSB 기준을 그대로 도입한 국가는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대만 등이었다.
한국과 인도네시아는 ISSB를 기반으로 자체 기준을 수립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보고서는 한국의 기업을 아태지역 경쟁자와 비교하면서 ▲지속가능성 성과와 보상 연계 ▲내부 감사를 통한 인증 ▲인증 기준 채택 차이 등이 저조하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경영진 성과보상과 지속가능성 성과를 연계하는 비율은 48%로 아태지역 기업 중 중위권 수준이었으며, 외부 인증을 통한 공시는 약 98% 이상으로 높은 비율을 보였지만, 내부 감사를 병행한 사례는 2%에 그쳤다.
앞서 한국은 금융위원회를 중심으로 지난해 5월∼8월 ESG 공시 관련 의견을 수렴했고, 100개 이상의 기업과 국내외 투자자들이 참여했다.
그 결과 대다수 기업이 기후 관련 공시의 필요성에는 공감했다.
다만 ‘스코프3’(공급망 등 간접 배출량) 공시와 관련해서는 데이터 확보의 어려움과 비용 부담을 이유로 유예가 필요하다고 요청했다.
금융위는 이러한 의견을 반영해 공시 의무화 시점을 2026년 이후로 계획하고, 올해 상반기 중 최종 공시 기준과 적용 로드맵을 발표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현재 이 계획이 그대로 시행될지는 미지수다.
그동안 금융위는 유럽연합(EU)의 기업 지속가능성 보고지침(CSRD), 미국 연방증권거래위원회(SEC)의 기후공시 규칙 등 주요국의 ESG 공시 정책을 참고해 글로벌 정합성을 확보하고자 노력했는데, 최근 EU와 미국의 ESG 공시 기준이 후퇴하는 양상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EU는 지난 2월 에너지 집약산업을 비롯한 제조업계의 청정에너지·순환경제 전환을 지원하는 입법 패키지인 ‘청정산업 딜’(Clean Industrial Deal)을 발표했는데, 관련 계획에는 CSRD의 규제 범위를 대폭 축소하는 내용이 담겨있다.
EU 경제가 휘청거리면서 프랑스와 독일 등 핵심 국가들이 축소나 연기를 강력히 요구했고, 유럽집행위원회(EC)는 이 제안을 받아들여 약 5만곳 이상으로 예상되던 CSRD 적용 대상 기업을 80% 이상 제외한 데다 규모가 큰 대기업 위주로 보고 의무를 부여하겠다고 수정했다.
미국 역시 비슷한 상황이다.
SEC는 지난해 3월 상장기업을 대상으로 2026년부터 온실가스 배출량(스코프 1·2)과 기후 관련 리스크를 공시하도록 의무화하는 기후공시 규정을 확정한 바 있다.
이 규정은 발표 직후 9건의 소송에 직면했고, 이에 따라 SEC는 법원의 판결이 나올 때까지 시행을 자발적으로 보류한 상황이다.
특히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취임 직후 다양성·형평성·포용성(DEI) 정책을 폐지하고, 생물학적 성별만 인정한다는 내용의 행정명령에 서명하는 등 포용적 사회적 역규제에 대한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한 바 있다.
ESG 정책도 ‘기업의 정치화’라며 분명한 반대 의사를 밝혀왔다.
한국의 최대 무역 대상국인 중국 역시 독자적 공시체계를 운용하면서 국제 기준 도입에 신중한 입장을 보인다.
지속가능성 공시를 적극적으로 도입하고자 하는 회계업계와 정부는 한국이 ESG 공시 제도를 도입하지 않거나 미룬다면 외국인 투자자의 신뢰를 잃고 자본시장에서 배제될 수 있다는 점, EU나 미국의 역외 공시 규제에 따라 기업이 개별적 대응을 하려면 행정 부담과 비용이 증가할 수 있다는 점, 글로벌 공급망 내에서 ESG 공시가 미비한 기업은 협력사 선정에서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는 점, 그리고 ESG 등급 하락으로 금융 조달비용이 상승하고 브랜드 가치가 훼손될 수 있다는 점 등을 이유로 든다.
하지만 단순히 ‘도입’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전략적이고 유연한 접근을 통해 ‘한국형 ESG 공시 로드맵’을 수립해야 한다.
이를 위해 무엇보다 단계적 도입이 필요하다.
대기업부터 공시 의무화를 시작하고, 중견·중소기업은 유예 기간을 두는 것이 바람직하다.
아울러 국내 공시 기준은 ISSB의 그것과 50% 이상 정합성을 확보하되, 한국 기업이 처한 환경에 맞는 유연성을 확보해야 한다.
나아가 공시 부담을 완화할 수 있도록 정부 차원의 지원책이 병행되어야 하며, 교육과 컨설팅, 데이터 플랫폼 구축이 함께 추진되어야 한다.
또 공시 제도를 탄소 중립, 녹색 금융 등 국가정책과 유기적으로 연계해 정책 수단으로 활용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민·관 협의체를 통해 지속적인 피드백과 제도 개선도 보장해야 한다.
ESG 공시는 제대로만 도입된다면, 한국 기업의 글로벌 경쟁력 확보와 투자 유치의 좋은 기반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맹목적인 도입과 속도전으로 접근하는 것은 지양해야 한다.
글로벌 스탠다드에서 한국이 배제되지 않기 위해서는 도입의 속도보다 전략성과 설계의 정교함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국제 기준을 그대로 따르는 무리한 ESG 공시로 경제와 산업이 어려움을 겪는 지금 기업에 또 다른 허들이 되어서는 안 된다.
지금이야말로 한국형 ESG 공시의 방향을 제대로 잡아야 할 시점이다.
김정훈 UN SDGs 협회 대표 unsdgs@gmail.com
*김 대표는 현재 한국거래소(KRX) 공익대표 사외이사, 금융감독원 옴부즈만, 유가증권(KOSPI) 시장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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