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 위기, 중국과의 경쟁 심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 재집권으로 독일 경제 모델이 붕괴하고 있다. ”(이코노미스트) “높은 에너지 비용, 이자율, 산업 침체, 소비자 신뢰 감소, 기업 투자 둔화로 성장이 정체된 프랑스 경제가 내각 붕괴로 더 큰 타격을 입게 될 위기에 놓였다. ”(뉴욕타임스·NYT)
유럽 경제 성장엔진을 담당해 오던 독일, 프랑스 경제가 시련의 계절을 맞이하고 있다. 독일 경제 핵심 축인 자동차 산업은 중국 부상에 따라 사상 처음 주요 공장 폐쇄 위기에 직면했고, 프랑스에서는 고금리에 허덕여 온 대기업들의 감원 발표가 잇따르고 실업률은 급증하고 있다.
그럼에도 독일, 프랑스는 극심한 정쟁으로 인해 침체의 늪을 벗어날 기회를 좀처럼 잡지 못하고 있다. 독일은 지난달 올라프 숄츠 총리가 이끄는 이른바 ‘신호등 연정’이 붕괴했고, 프랑스는 이달 4일 하원의 정부 불신임안 가결로 정부 내각 붕괴가 현실화했다. 내년은 ‘관세맨’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의 재집권으로 유럽과 통상 마찰 우려가 큰 중대한 시기라는 점에서 비상이 걸렸다.
유럽 최대 경제 대국인 독일에 대해 최근 주요 외신이 내놓는 헤드라인은 ‘유럽의 병자가 된 독일’이다. 연방정부 자문기구인 독일경제전문가위원회는 올해 독일 국내총생산(GDP) 성장률 전망치를 기존 0.2%에서 -0.1%로 낮추고 2년 연속 역성장할 것으로 내다봤다. 독일 경제가 2년 연속 뒷걸음친 것은 2002~2003년 이후 처음이다.
제조업 수출 중심인 독일 산업은 중국 시장에 크게 의존해 온 구조였다. 그런데 중국이 부동산 위기로 심각한 내수 부진을 겪은 탓에 독일이 역풍을 맞고 있다. 중국은 독일의 최대 교역국 타이틀마저 내준 형편이다. 미 경제매체 CNBC에 따르면 독일과 중국 간 무역액은 올해 1분기 기준 600억유로로 독일과 미국 간 무역액(630억유로)에 처음으로 뒤처졌다.
독일 경제의 핵심 기둥이자 독일 GDP의 5%를 담당하는 완성차 시장은 중국에 빼앗기고 있다. 공산품 대량 생산·수출로 ‘세계의 공장’이라는 별명은 얻은 중국은 정부의 막대한 보조금에 힙입어 전기차 등 첨단제품마저 대량생산할 수 있는 역량을 갖췄다. 지난해 중국은 판매량 기준 최대 전기차 업체인 BYD 약진으로 총 500만대 이상의 자동차를 수출해 세계 1위 자동차 수출국이 됐다.
독일 완성차 산업의 침체는 가시화했다. 지난 10월 유럽 최대 자동차 제조업체 폭스바겐이 87년 역사상 처음으로 자국 내 공장 폐쇄를 검토한다는 소식은 독일 사회에 큰 충격을 안겼다. 이로 인해 최대 3만 개 일자리가 사라질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아우디도 수천 개의 일자리 감축을 준비 중이며 독일 자동차 부품 공급업체 셰플러는 4700명을 감원한 것으로 나타났다. 프랑스에서는 막대한 재정적자로 인한 고금리가 경제의 숨통을 조이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유행) 때 과도한 지출로 올해 재정 적자 규모가 GDP의 6.1%로 유럽연합(EU) 재정 규칙이 허용하는 적자 수준(3.0%)의 두 배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국제신용평가사 피치와 스탠더드앤드푸어스가 각각 지난달과 5월 프랑스 신용등급을 안정적에서 부정적으로 하향 조정했다. 프랑스 차입 비용은 2008년 심각한 위기에 빠졌던 그리스와 비슷한 수준으로 올라섰다.
프랑스의 상징적인 기업들은 최근 대규모 감원을 앞다퉈 발표하고 있다. 지난달 자동차 제조업체 미쉐린, 화학 제조업체 등이 수천 개의 일자리를 줄이겠다고 밝혔다. 프랑스 최대 건설업체 넥시티는 1000명, 소매업체 오샹은 사상 최대 규모의 감원 계획을 발표했다. 높은 금리에 허덕이고 있는 프랑스 기업들의 파산도 늘어나고 있다.
이에 따라 지난해 초 7.1%로 15년 만에 가장 낮은 수준을 보였던 프랑스 실업률은 올 가을 7.4%로 높아졌다. 올림픽 특수로 지난 3분기 0.4% 깜짝 성장했던 프랑스 GDP는 4분기엔 0.1% 역성장이 예상되며 내년 성장률은 올해 1.1%에서 0.6%로 둔화할 전망이다. NYT는 “프랑스 고용 시장 불확실성에 따른 가계 부담으로 프랑스인들은 소비보다 저축을 선호하게 됐고, 이는 프랑스 경제 활동의 악순환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전했다.
독일, 프랑스 경기 부진이 긴 터널을 지나야 끝이 보일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는 것은 두 국가의 정치 분열이 역대 수준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독일에서는 지난달 사회민주당(SPD), 자유민주당(FDP), 녹색당으로 구성된 신호등 연정이 붕괴했다. 올라프 숄츠 총리가 자신의 경제 정책에 반기를 든 FDP 소속 크리스티안 린드너 재무장관을 해임하면서다. 이 때문에 독일은 ‘레임덕’에 빠졌다. 승부수로 숄츠 총리는 이달 중 총리 신임 투표를 발의해 내년 2월 조기 총선을 치르겠다고 밝혔다. 그는 연임에 도전하기로 했지만 2021년 9월 총선 이후 지지율이 우하향 곡선을 그려온 까닭에 연임 가능성은 매우 낮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이코노미스트는 독일이 공공 투자 확대와 같은 대규모 개혁에 나서야 하는 시급한 때 차기 독일 정부가 지혜를 모으는 것이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법인세 개혁, 노동시간 확대를 겨냥한 인센티브, 인프라·국방 투자, 관료주의 축소 등이 기장 시급한 현안”이라고 짚었다.
프랑스 정치 분열 정도는 독일보다 심각하다. 지난 7월 조기 총선에서 ‘헝의회(어떤 정당도 단독 과반을 차지하지 못한 의회)’가 연출된 프랑스에서는 결국 62년 만에 내각 붕괴가 현실화했다. 하원은 정부의 내년도 긴축 예산안을 두고 충돌했고 미셸 바르니에 총리가 지난 2일 의회 표결 없이 예산안을 단독 채택한 결과, 하원은 지난 4일 정부 불신임안을 발의·가결했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조만간 차기 총리를 지명할 예정이지만 이를 둘러싼 정당 간 견제가 극심할 것으로 예상돼 이러나저러나 내년 6월 이후 의회 조기 해산 전까지 대대적인 개혁은 불가능할 것이란 관측이 지배적이다.
내년은 더 문제다. 미국 우선주의를 주창하는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 재집권으로 통상 마찰이 격해질 가능성이 매우 커지면서 적극적인 전략책 마련이 시급한 때다. 세계 최대 채권펀드 운용사 핌코는 세계 무역전쟁이 벌어진다면 미국 달러화 대비 유로화 가치는 더욱 급락할 수 있다고 관측했다.
유럽 언론들은 관세 부과 조치를 하나의 협상 카드로 만지작거릴 트럼프 당선인에 대비하기 위해 독일, 프랑스의 역량을 기대하고 있으면서도 마크롱 대통령과 숄츠 총리의 리더십이 부재하다는 점을 비판하고 있다.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는 “독일과 프랑스의 ‘엔진’이 벨기에 브뤼셀의 EU 본부에서 함께 작동할 때 굴러가지만, 양국 지도자들은 국내에서 정치 혼란에 휩싸여 취약한 상태”라고 평가했다.
변선진 기자 sj@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 무단전재 배포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