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어려운 가정형편 탓 교육 뒷전
여든 지난 나이 뒤늦게 공부 시작
“은행서류 직접 썼을 때 가장 뿌듯”
모, 남편 유언에 뒤늦게 연필 잡아
사별 후 배운 한글, 독립심 길러줘
“많이 배워서 주변 도우며 살고파”
“하늘을 날 것 같아요.”
25일 서울 마포구 마포아트센터에서 열린 일성여자중고등학교 졸업식에는 40대 이상의 만학도 500여명이 식장을 가득 메웠다.
졸업가운 대신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참석한 이들은 희끗한 머리에 두꺼운 안경을 쓰기도 했지만, 눈빛은 10대 졸업생만큼이나 반짝거렸다.
![]() |
20일 서울 마포구 일성여자중고등학교에서 모부덕(88·왼쪽)·김갑녀(88)씨가 책을 들여다 보고 있다. 이제원 선임기자 |
김씨는 “(졸업을 앞두고) 하늘을 날 것 같은 기분”이라며 “80살에 초등학교 들어가서 여기까지 왔으니 정말 꿈만 같다”고 감격에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일제강점기인 1937년 출생인 김씨는 어려운 가정 형편 탓에 제때 교육을 받지 못했다.
한글도 떠듬떠듬 읽었던 그는 글을 쓰거나 읽을 때면 주변 도움을 받아야 했다.
젊어선 배우자와 이른 사별로 다섯 아이를 홀로 키우느라 배울 겨를조차 없었다.
배움의 열정을 놓지 않았던 그는 여든이 지난 나이에 양원주부학교에서 처음 한글 교육을 받았고, 4년간의 초등교육을 마친 뒤 일성여자중학교에 입학했다.
늦깎이로 시작한 학업은 순탄치 않았다.
책상에 앉으려 하면 체력이 따라주지 않았고, 위장병에 시달리거나 넘어져 다치기도 했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수업을 자주 빠진 그는 자퇴까지 고민했지만, 선생님의 격려로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지난해 10월 한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 화제의 주인공이 됐다.
그가 배움을 다시 시작한 뒤로 가장 뿌듯한 순간은 타인에겐 평범한 일상일 수 있다.
김씨는 “은행에서 직접 주택연금 서류를 쓰니까 하늘을 날아다니는 것 같았다”고 웃으며 말했다.
김씨와 같은 반에서 공부한 모씨도 새 인생을 꾸렸다.
외교관인 남편을 따라 16년간 인도, 브루나이, 파키스탄 등지에서 생활하고 영어도 배웠지만, 정작 정규 교육과정을 마치지 못했다.
친구들 모임에서 양원주부학교에 다니는 사람들을 만나 배움에 도전한 모씨에게 가장 큰 시련은 중학교 1학년 때 찾아왔다.
남편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것이다.
남편은 생전 모씨에게 “운동하고, 공부하고, 병원 다니고, 이 세 가지는 꼭 하라”고 당부했다.
그 말을 가슴에 새긴 모씨는 다시 학교로 향했다.
배움은 그에게 독립심을 안겨주었다.
남편에게 의지했던 그였지만, 이젠 은행 업무를 보고 남편 사망신고까지 직접 처리했다.
모씨는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자식 신세 안 지니까 좋은 것 같다”고 말했다.
![]() |
만학도들의 졸업을 축하합니다 25일 서울 마포구 마포아트센터에서 열린 일성여자중고등학교 제23회 졸업식에서 졸업생들이 박수를 치고 있다. 이 학교는 개인적인 사정으로 인해 제때 학업을 마치지 못한 40대에서 80대까지의 만학도들이 공부하는 2년제 학력인정 평생학교로 이날 중학교 257명, 고등학교 243명이 졸업했다. 뉴스1 |
공통적으로 가장 어려웠던 과목은 수학이다.
김씨는 “머릿속에 안 들어가고 그 뜻을 모르겠다”며 “시험 볼 때는 아예 수학을 제꼈다”고 호탕하게 웃었다.
하지만 역사를 배울 땐 ‘열중모드’로 돌변했다.
김씨는 일제시대 때 살았던 기억이 떠올라 “그래, 맞아. 그때 그랬지, 우리나라가 그랬지”라며 재밌게 공부했다.
모씨는 과학 시간을 가장 좋아했다.
모씨는 “처음 알게 된 것들이 너무 많아 흥미로웠다”고 했다.
두 사람은 다음달 10일 숙명여대 평생교육원 사회복지학과에 나란히 입학한다.
김씨는 대학에 가서 캠핑도 하고 못해본 것들을 다 해보고 싶다고 했다.
모씨는 많이 배워서 지금보다 더 나은 길을 걷고, 도움받는 것보다 남을 도와주면서 살고 싶다고 했다.
두 사람은 배움을 망설이는 이들에게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김씨가 “포기하지 말고 무조건 도전해야 한다”고 말하자, 모씨는 “시작이 반이다.
시작만 하면 끝을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예림 기자 yeah@segye.com
<본 콘텐츠의 저작권 및 법적 책임은 세계일보(www.segye.com)에 있으며, 뽐뿌는 제휴를 통해 제공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