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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삼월인데도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듯 우리 민주주의 들녘도 침묵하는 양심에 아직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지 못하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 탄핵 심판 선고를 앞둔 15일 오후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담벼락에 철조망이 설치돼 있다./장윤석 기자 |
[더팩트 | 박종권 언론인] 계절은 전령을 앞세운다. 요란한 매미소리에 여름은 깊어 가고, 어디선가 귀뚜라미 소리에 가을이 스며든다. 차단한 하늘에 기러기 합창이 울려 퍼지면 마침내 겨울이다. 그런데 만일 만물이 소생하는 봄날에 종달새의 지저귐이 들리지 않는다면 대자연의 순환에 고장이 난 거다.
미국의 해양생물학자이자 환경운동가인 레이첼 카슨이 1962년 이와 관련한 책을 낸다. 바로 '침묵하는 봄'이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무차별 살포된 살충제 DDT의 영향을 고발한다. 유독성 살충제가 해충만이 아니라 익충(益蟲)까지 죽이면서 생태계 먹이사슬의 하부구조가 무너진 거다.
먹이가 사라진 봄의 들판에서는 새들도 살아갈 수 없다. 새들 뿐이겠나. 벌과 나비가 사라지면 화수분이 불가능해 꽃은 내년 봄을 기약하는 씨앗을 만들 수 없다. 과수원 과일은 물론 논밭의 곡물 생장에도 치명적 영향을 미친다.
이렇게 자연생태계의 균형이 무너지면 인간의 생존환경까지 위태로워지는 것이다. 카슨은 '소리 없는 봄'의 들판에 인류 존망의 경고 사이렌을 울린 거다. 미국 케네디 대통령은 1963년 환경문제를 다루는 자문위원회를 구성한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나지 않아 미국 환경부(FDA)는 DDT 사용을 금지하게 된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농약을 전혀 사용하지 않을 수는 없겠다. 다만 유독물질 사용을 줄이면서 지구와 자연과 공존하는 지혜를 모색해야 하는 거다. 자연친화적 유기농의 확산도 이러한 고민의 결과물일 것이다. 한편에선 비록 생태계에 위협적이라는 우려 속에 염색체 조작 품종을 개발하기도 하지만.
지금 한국은 ‘떠들썩한 봄’이다. 겨울잠에서 깨어난 개구리와 짝을 찾는 까치들의 사랑을 향한 지저귐이 아니다. 탄핵을 두고 양극단으로 갈라진 민심이 서로 확성기를 틀어대고 있는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이 역대 최장으로 길어지면서 광화문 일대는 일촉즉발의 분위기가 팽만하다.
본디 민주주의는 떠들썩하다. 독재의 겨울을 물리친 민주주의의 봄은 다양한 의견이 만발하는 백화제방(百花齊放)과 같다. 한 종류의 꽃으로만 덮인 들판이라면 섬뜩하지 않겠나. 벌과 나비의 날갯짓도 없이 쥐 죽은 듯이 조용하다면 여전히 독재체제의 엄동설한일 가능성이 높다.
다양한 꽃이 가득한 정원에 꿀벌이 잉잉거리고 온갖 새들이 지저귄다면 가히 봄의 교향악이라 부를 수 있겠다. 헌데 꽃밭 사이로 생태계를 좀먹는 미국자리공이 자란다. 여러해살이 풀인 미국자리공은 1950년대 전래됐는데 그 열매는 위장장애를 일으키는 독성을 가졌다.
이를 방치하면 아름답던 정원은 머지않아 폐허가 된다. 마치 돌보지 않는 밭에 쑥이 돋아나면서 미구에 쑥대밭이 되듯 말이다. 조화를 이루지 못한 소리는 삑삑거리는 불협화음에 지나지 않는다. 그저 시끄러운 소음일 뿐이다.이를 조율하는 이들이 이른바 사회 지도층이겠다.
비록 좌우로 나뉘더라도 이들의 양심이 발하는 고고성이 표준음이 돼 사회적 화음을 이뤄내는 거다. 헌데 양심의 소리가 모깃소리보다 작은 듯하다. 그야말로 ‘침묵하는 양심’이다. 양심은 법 위의 도덕과도 다르다. 도덕이 선악(善惡)을 구별하는 능력이라면 양심은 이러한 도덕을 바탕으로 행동하거나 행동을 돌아보게 하는 ‘내면의 목소리’에 가깝다.
왕이 되려는 자는 왕관의 무게를 견뎌야 한다. 기독교에서는 천국에 가려는 자에게 십자가의 무게를 견디라고 한다.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에서 남에 앞서는 자, 이른바 지도층이라면 양심의 무게를 견뎌야 한다. 이러한 양심이 침묵하면 우리 사회는 네트워크의 고리들이 다 풀리게 된다. 민주주의의 기반이 무너지는 거다.
춘삼월인데도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듯 우리 민주주의 들녘도 침묵하는 양심에 아직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지 못하고 있다. 우리의 민주주의는 군부독재를 피로, 맨주먹으로 극복하면서 봄을 기다렸다. 1980년 서울의 봄은 꽃샘추위에 움츠렸지만 6월항쟁으로 끝내 꽃망울을 터뜨렸다. 한때 어둠에 싸인 민주주의도 촛불로 지켜냈다.
그런데 이상기후의 습격처럼 민주주의 들녘에 비상계엄 한파가 닥친 거다. 민주주의를 깨우는 봄의 전령이 바로 양심의 소리이다. 좌이든 우이든 진보이든 보수이든 지도층이라면 과연 무엇이 옳고 틀렸는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분명하게 가르마를 타 줘야 한다.
양쪽으로 갈라진 아스팔트의 불협화음을 조율해 화음으로 이끌어야 한다. 조개와 해오라기가 서로 물고 있어봐야 지켜보는 어부만 좋은 일이다. 지금의 세계 정세가 그렇다. 양극단의 적대감 속에서 진영논리에 따라 달디단 소리를 내는 것은 쉽다. 하지만 진영을 넘어선 쓴 소리는 쉽지 않다.
삭막한 광야의 고고성이 그렇다. 좁쌀만한 산수유 꽃도 첫 꽃망울은 온몸으로 피고 개나리도 몸살을 견디며 처음 꽃을 내민다. 저 먼 산 중턱에서 손을 흔드는 진달래꽃도 그렇다. 그럼에도 먼저 핀 꽃은 외롭지 않다. 하나 둘 깨어나면서 금세 우르르 피어난다.
양심의 소리도 그렇다. 지도층이 교향악 단원들에게 평균음을 제시해 화음을 빚어내면 이윽고 시민들의 ‘떼 창’도 합창으로 승화한다. 고 김대중 대통령은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결국 악의 편"이라고 말했다. 그는 서거 직전 지나친 양극화로 민주주의가 퇴보하고 경제도 퇴보하고 남북관계가 위기를 맞고 있으니 마치 꿈꾸는 것 같다고 했다. 그러면서 진정 평화롭고 정의로운 나라를 원한다면 행동하는 양심이 되라고 주문했다.
굳이 몸으로 나서지 않더라도 침묵을 깨고 양심의 소리를 내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겠다. 양심의 소리는 결단과 행동을 이끈다. 어느 민족 누구나 결단할 때가 있다고 했다. 바로 지금 여기이다. 최근 대화와 타협이 사라진 정치적 진공 상태에서 종교와 역사를 앞세운 목소리들이 시민을 선동하고 있다.
이들은 되레 맑은 양심의 소리, 밝은 진리의 소리를 억누르는 듯하다. 이에 대한 성경 말씀이 있다.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그야말로 소란스런 봄이다. 반면 양심은 침묵하고 있다.
금명간 윤 대통령에 대한 탄핵심판 결과가 나올 것이다. 인용이든 기각이든 광장은 시끄럽겠지만 이내 다채로움으로 조율되리라 믿는다. 이를 위해서는 행동하는 양심까지 아니더라도 감연히 소리 내는 양심이 앞서서 꽃망울을 터뜨리길 바란다. 민주주의의 완연한 봄이 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