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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덕수 총리 '기각'...법이 정의(正義)는 아니다 [박종권의 나우히어]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총리가 25일 오전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국무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국무총리실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총리가 25일 오전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국무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국무총리실

[더팩트 | 박종권 언론인] 한덕수 국무총리가 돌아왔다. 탄핵소추로부터 87일만이다. 대체로 예견된 결과였지만, 결과를 구성한 내용은 법의 본질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법은 상태를 정의(定義)할 뿐 그 자체가 정의(正義)는 아니라는 점 말이다.

헌법재판소의 결정은 5대 2대 1로 기각이 됐다. 내용적으로는 5명이 기각, 2명이 각하, 1명이 인용 의견을 냈다. 법조계에서 오랜 경험을 쌓고 나름대로 능력을 인정받은 재판관들인데 각인각색(各人各色)인 거다. 여기에 법의 비밀이 있다.

바로 법 해석의 주체가 사람이라는 거다. 세상에 똑 같은 사람은 없다. 따라서 생각과 평가의 기준도 80억명이 다 다르다. 같은 사안이라도 보는 사람에 따라 평가에 차이가 생기는 거다. 예컨대 물이 반쯤 채워진 잔도 "절반밖에"와 "절반이나"로 보는 관점이 엇갈린다.

재판이 3심제로 이뤄지는 이유이다. 1심에서 유죄가 선고됐더라도 2심에서 무죄가 되고 3심에서 유죄 취지로 파기 환송되는 경우가 왕왕 생기는 이유이다. 대법원이 유죄로 확정 판결했더라도 추후 재심을 통해 무죄가 되는 경우도 많다. 특히 권위주의 시대에 힘 앞에 고개를 숙인 재판관들이 내린 판결들이 그렇다.

피고인들에게는 신(神)처럼 군림하지만 권력 앞에서는 눈치를 보는 나약한 수재들의 한계이겠다. 과거 유신독재 치하에서 이뤄진 인혁당 사건 판결이 대표적이다. 대법원은 1975년 4월 8일 관련자 8명에 대해 사형을 확정 판결했다. 이들은 이튿날 18시간만에 사형이 집행됐다.

그로부터 32년이 지나 재심이 청구됐고 2007년1월23일 서울중앙지법이 무죄를 선고했다. 그렇다고 사자(死者)의 명예가 회복됐을까. 죽은 자는 돌아오지 않고 그들의 무죄를 알리는 종소리는 그저 세월 속에 여운으로만 남을 뿐이다.

문제는 이러한 수많은 오심(誤審)에 대해 법원은 제대로 사과한 적이 없다. 사법부라는 이름으로 권력을 누리면서 손가락질은 개개 재판관들 몫으로 돌린다. 반면 각광은 혼자서 받고 비난은 집합체 속의 사실상 익명으로 피한다.

이러한 재판과 판결의 모순을 이번 헌법재판소가 극명하게 보여줬다. 활자가 뚜렷한 헌법 조문을 해석하고 판단하는 데도 8인 8색이다. 비록 권한대행이지만 대통령직을 대행하고 있으므로 국회의 탄핵소추 의결정족수도 3분의 2가 되어야 한다는 재판관이 2명이었다. 소수의견을 낸 이들 2명이 잘못 판단했고 결과적으로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들은 나름대로 "법과 양심에 따라" 최선의 판단을 했지만 다수가 되지 못했을 뿐이다.

한덕수 국무총리의 위헌 위법한 행위가 파면할 정도인지 아닌지는 그야말로 재판관의 현실을 보는 가치관 차이이겠다. 예컨대 위장전입이나 음주운전 경력이 공직자 임용에 결격사유인지 여부를 판정하는 것과 비슷하다. 정권에 따라 미세하게 새겨진 잣대를 들이대기도 하고 짐짓 눈을 감기도 한다.

마치 거품이 잔뜩 담긴 맥주잔을 두고 "이게 거품이지 맥주냐" "거품도 맥주다"라며 다투는 것과 비슷하다. 일본에서 이에 대한 재판이 있었는데 판결은 "거품도 맥주의 일부"였다. 하지만 과연 거품의 비율을 어느 정도까지 인정할지는 판정하지 않았다. 상식적인 수준일 텐데, 문제는 이 상식적 수준이 사람마다 다를 때는 또다시 분쟁이 일어나지 않겠나.

간통죄가 그렇다. "배우자가 있는 사람이 간통한 경우 2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는 형법 241조가 1953년 제정 이후 62년 만에 폐지됐다. 2015년 헌법재판소가 재판관 7대 2의 의견으로 "헌법에 위반된다"고 결정한 거다. 간통죄 위헌심판 청구는 5차례 심판대에 올랐고, 앞선 4차례는 의결정족수를 채우지 못해 기각됐다. 그런 것이 세월이 흐르고, 특히 재판관 구성과 생각이 달라지면서 위헌 결정을 내리게 된 것이다.

영화감독 홍상수가 2015년 만든 영화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가 묘한 연관성을 불러일으킨다. 마치 간통죄를 두고 내리는 평가처럼 들린다. 아마도 그의 애정행각과 궤가 비슷해서 그럴까.

여하튼 명백한 법이라도 시대에 따라 재판관의 성향에 따라 해석과 판단의 기준이 달라진다는 것을 이번 한덕수 국무총리에 대한 탄핵 심판이 극명하게 보여줬다. 재판관들은 신(神)도 아니고, 정의의 수호자도 아니다. 다만 각양각색의 조각들이 모여 뚜렷한 형상을 이루는 모자이크와 같은 거다. 물론 정의도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기도 하지만.

그래도 다행인 것은 인간사회에도 ‘항상성’이 유지된다는 점이다. 얼음을 먹는다고 체온이 뚝 떨어지지 않고, 뜨거운 차를 마신다고 체온이 금세 올라가지도 않는다. 추우면 인체의 피부가 땀구멍을 닫고, 더우면 땀구멍을 여는 거다. 추운 겨울에도, 따뜻한 봄날에도 체온이 36.5도를 유지하는 배경이다.

달릴 때 심장박동이 증가하는 것도, 컨디션에 따라 혈압이 오르내리는 것도, 체내의 산과 알칼리가 균형을 이루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생존을 위한 자동조절시스템이 작동하는 것이다.

인간사회도 그렇다. 프랑스의 경제학자이자 사회학자인 빌프레도 파레토는 "건강한 사회체계는 균형상태로 회귀하려는 경향이 있다"고 설파했다. 그는 저서 '정신과 사회(1916)'에서 "균형상태에 있는 사회체계는 어떤 인위적인 힘으로 수정 당하게 될 때 현실적이고 정상적인 상태로 되돌리려 반작용이 일어난다"고 설명했다. 그가 시장에서 ‘80대 20의 균형’으로 유명한 ‘파레토의 법칙’ 주인공이다.

이번 한덕수 총리에 대한 탄핵이 기각된 것도 사회적 항상성 회복을 위한 과정이겠다. 사회가 좀더 공직자의 책임을 무겁게 여기는 쪽으로 나아간다면 그때는 탄핵이 인용될지 모른다. 곧바로 파면하는 거다. 비록 지금은 8명 중 1명이지만 우리 사회가 성숙해지고 공직자들이 지배의식이 아니라 봉사의식이 높아지면 자연스럽게 공적 책임을 무겁게 물을 것이다. 아마도 그 무렵이면 우쭐한 엘리트 의식으로 후안무치한 얼굴을 당당하게 드러내는 일도 사라지지 않겠나.

이재명 민주당 대표에 대한 2심 판결도,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탄핵심판도 현재 우리가 서 있는 민주주의의 성숙도에 따라 결론이 날 것이다. 판결이 정의보다 불의에 가깝다면 시민의 힘이 작동해 사회적 항상성을 유지하는 쪽으로 진행될 것이다. 태양이 이글거리는데 땀구멍이 열리지 않는다면 열사병으로 쓰러지지 않겠나.

법은 정의가 아니다. 법은 정의를 향한 이정표이고 재판은 그 수단일 뿐이다. 사회적 정의를 이루고 본원적 자유와 평등의 목표에 도달하는 것은 그래서 법이 아니라 각성되고 성숙한 시민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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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15:51 * 점아이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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