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최악으로 불리는 의성 산불 화마가 휩쓸고 지나간 27일 오전 경북 안동시 길안면의 작은 마을. 사흘 만에 권모(70대)씨가 찾은 집은 그야말로 잿더미가 됐다.
모든 게 까맣게 타 형태조차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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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성 산불이 덮치고 지나간 27일 경북 안동시 길안면 묵계리의 주택 집기류가 모두 불에 탔다. |
권씨는 “숟가락 하나 못 챙겨 나왔는데 어떡하냐”며 “이게 모두 꿈이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며 울부짖었다.
권씨는 “우리 막내딸이 결혼하는데 살림살이에 보태라고 안 먹고 안 입고 500만원을 장롱에 모아뒀는데 홀랑 불에 탔다”면서 “어떻게 모은 돈인데···”라며 끝까지 말을 잇지 못했다.
김정자(86)씨는 뼈대까지 까맣게 타버려 무너진 집을 쳐다보며 옷소매로 눈가를 벅벅 닦아댔다.
“60년 넘게 머리 뉘여 자던 우리 집이 하룻밤 새 사라졌다”면서 “살아갈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며 가슴을 치며 울부짖었다.
이 마을에 매캐한 연기가 뒤덮이기 시작한 건 의성 산불 발생 나흘째인 지난 25일 오후 4시쯤부터다.
“대피하라”라는 이장의 외침을 듣기 전까지 김씨는 밭일을 나갔다가 집에 잠깐 들어와 한숨을 돌리고 있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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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성 산불이 덮치고 지나간 27일 경북 안동시 길안면 묵계리 마을이 잿더미가 됐다. |
결국 김씨는 휴대전화만 챙겨 헐레벌떡 집을 빠져나왔다.
그는 장화에 작업복 차림으로 집을 나선 뒤 사흘째 같은 옷을 입고 있다고 했다.
이재민 대피소가 마련된 안동체육관에는 가로·세로·높이 2m짜리 텐트 120여동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조금이라도 이재민 수용 공간을 늘리기 위해 콘크리트 바닥이 깔린 복도까지 텐트가 늘어졌다.
이곳에선 한 동마다 보통 4명이 몸을 누이고 있었다.
이들은 배급된 얇디얇은 여름용 홑이불을 덮고 새우잠을 청했다.
하늘을 뒤덮은 매캐한 연기가 실내까지 번져 마스크를 쓰지 않고는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였다.
마을주민들과 둘러앉아 한숨을 내쉬던 박대경(82)씨는 “치매가 있는 남편이 자꾸 ‘집에 가자’고 하는데 ‘우리집이 다 탔다’고 이야기를 하지 못했다”면서 “6·25때 맨몸으로 피난 간 거랑 지금이랑 다를 바가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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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일 안동체육관에 산불 이재민들이 모여 서로를 다독이고 있다. |
김씨는 “먼저 저세상으로 떠난 우리 남편 사진이 딱 한 장밖에 없는데 우리 애들이 ‘아빠 얼굴은 이제 기억으로 추억해야만 한다’고 할 때 눈물이 앞을 가렸다”면서 “우리 부모님 사진도 이제 없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김옥희(88)씨는 “재난은 정말 남의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눈 깜짝할 새집이 사라졌다”면서 “유일한 재산인 사과밭이 모두 불에 탔다”고 눈물을 글썽였다.
실제로 김씨가 사는 일직면 조탐리는 빈집을 제외한 마을 집 50채 가운데 22채가 불에 타 잿더미가 됐다고 했다.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던 주민 김모(50대)씨는 ‘마음에 까만 재’가 내려앉은 것만 같다고 했다.
손때가 묻은 오래된 폴더폰 속 잿더미가 가득한 집을 바라보던 김씨는 “트랙터랑 농기계가 모두 타 버려 농사도 못 짓는다.
희망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며 “가장으로 힘을 내야 하는데 눈앞이 캄캄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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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일 안동체육관에 산불 이재민 텐트가 즐비해 있다. |
의성·안동의 산불 영향 구역은 1만5185㏊, 청송·영양·영덕은 1만6019㏊다.
경북 북부 지역을 휩쓴 산불의 피해 면적은 지난 2022년 울진산불 1만6301㏊의 두 배에 이르는 규모다.
역대 최악의 산불 기록을 갈아 쓰고 있다.
인명 피해도 크다.
경북지역 사망자는 지난 25∼26일 주민 21명과 헬기 조종사 1명이 목숨을 잃었다.
건축물 피해는 전날 257개에서 청송·영양?영덕의 피해가 집계되면서 2572개로 눈덩이처럼 불었다.
지역별로는 안동이 952개로 피해가 가장 컸다.
이어 의성 194개, 청송 491개, 영양 73개, 영덕 862개다.
대피한 주민은 전날 1만8589명에서 이날 3만2989명으로 늘었다.
이 가운데 1만5490명이 귀가하지 못하고 대피소에 머물고 있다.
안동=글·사진 배소영 기자 soso@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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