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경그룹이 핵심 계열사인애경산업 매각에 나섰다.
주력 사업이 줄줄이 악화돼 차입 경영을 이어갔는데, 제주항공 참사까지 덮치면서 유동성이 악화되자 그룹의 모태 사업까지 팔아 자금난을 해결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전 세계적으로 K뷰티 열풍이 불면서 국내 화장품 기업가치가 뛰고 있는 만큼 매각의 적기라는 판단도 작용했다는 분석이다.
4일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따르면 애경그룹의 지주사인 AK홀딩스는 최근 애경산업 매각과 관련 "그룹 재무구조 개선과 사업 포트폴리오 재조정을 위해 다양한 방안을 검토 중"이라며 "아직 확정된 사항은 없다"고 밝혔다.
업계에서는 애경산업과 애경케미칼이 보유하고 있는 골프장 '중부컨트리클럽(CC)' 매각도 유력한 것으로 보고있다.

애경그룹은 창업주인 고(故) 채몽인 사장이 1954년 세운 애경유지공업이 시초다.
당시 애경유지공업은 화장비누 '미향'이 불티나게 팔리면서 이름을 알렸고, 주방세제 '트리오' 등 생활용품에서 두각을 보이면서 사세를 확장했다.
1970년 채몽인 사장이 타계하면서 부인인 장영신 총괄 회장이 경영권을 이어받았고, 생활용품을 팔아 현금을 확보한 장 회장은 애경화학 등을 설립하고 화학 사업에 진출했다.
1980년대에는 영국의 유니레버와 기술제휴를 맺으면서 화장품 사업에 뛰어들었다.
이 때 애경유지공업은 애경산업으로 이름을 바꿨다.
애경산업은 애경산업은 1992년 유니레버와 결별할 때까지 유니레버가 인수한 화장품 '폰즈' 등을 생산했고, 이후 에이솔루션과 루나, 에이지투웨니즈(AGE20'S) 등을 출시하면 화장품 기업으로 거듭났다.
지난해 기준 애경산업의 매출 비중은 화장품 부문이 39%, 생활용품은 61%를 차지한다.
애경그룹은 1990년대 서울 구로 애경백화점을 짓고 백화점 사업에도 진출했다.
또 2004년 제주특별자치도와 제주항공을 공동 설립, 항공기 사업까지 확대했다.
애경그룹의 최근 유동성 위기는 이들 계열사 실적이 줄줄이 고꾸라지면서다.
애경그룹의 지주사인 AK홀딩스 사업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주요 계열사 대부분이 당기순손실을 기록했다.
애경케미칼은 지난해 매출액이 1000억원 가량 줄었고, 2023년 270억원이던 당기순이익이 지난해 8억원의 손실을 내면서 적자 전환했다.
같은기간 1000억원대 당기순이익을 기록한 제주항공도 고환율 여파로 지난해 적자 전환했고, AK플라자의 당기순손실은 659억원으로 확대됐다.
주요 계열사 중 애경산업만 유일하게 437억원 상당의 당기순이익을 거뒀다.
AK홀딩스는 계열사들이 경영난을 겪을 때마다 구원투수로 등판해 자금을 지원해왔다.
코로나19 당시 사실상 영업이 중단된 제주항공(2845억원)과 AK플라자(790억원) 유상증자에 참여하며 운영 자금을 수혈했다.
올해 초에는 재무구조 개선이 필요한 AK플라자에 대여금과 자금조달 명목으로 각각 1000억원씩 지원했다.
이같은 계열사 지원은 차입을 통해 이뤄졌다.
AK홀딩스의 지난해 별도 기준 총자산은 9758억원이다.
이 중 회사가 외부로부터 차입한 자금은 5049억원에 달한다.
차입금을 총자산으로 나눈 차입금 의존도는 2020년 22%에서 지난해 52%로 급증했다.
차입금 의존도는 높을수록 회사의 재무 건전성이 악화했다는 의미다.

AK홀딩스의 지난해 기준 유동성 자산은 1조3460억원, 유동부채는 2조6735억원으로 유동비율은 50% 수준이다.
유동비율은 기업이 1년 내 갚아야 할 부채의 상환능력을 알 수 있는 척도다.
유동비율은 200% 이상으로 유지되는 것이 이상적이며, 100% 이하는 부실기업으로 분류된다.
더 큰 문제는 차입금 대부분이 AK홀딩스가 보유한 상장 계열사(애경산업, 애경케미칼, 제주항공) 주식을 담보로 빌렸다는 점이다.
AK홀딩스는 NH농협은행과 KB증권, 등에 주식을 맡기고 자금을 단기 차입했다.
주식을 담보로 제공된 차입금은 3330억원에 달한다.
지난해 기준 전체 차입금(5049억원)의 65%가 주담대로 이뤄진 것이다.

주담대 대출은 담보로 내놓은 주가가 부진하면 자금 압박을 받을 수 있다.
주가가 내려가면 자산 가치가 하락한 것으로 계산돼 금융권에서 추가로 증거금(마진콜)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애경그룹 계열 상장사 대부분이 기업가치가 우향했는데, 특히 제주항공은 최근 1년간 40%가량 하락했다.
지난해 12·29 제주항공 참사로 주가가 크게 하락한 이후에도 좀처럼 회복세를 보이지 못하고 있다.
애경케미칼은 같은 기간 47% 하락했다.
애경산업만 매각설 이후 30% 가량 뛰었다.
AK홀딩스는 올해 2월 제주항공 교환사채(EB)에 대해 787억원 규모의 조기상환 청구권이 행사되면서 앞으로 계열사 지원 여력이 부족할 것으로 추정된다.
이 회사는 2022년 9월 제주항공 주식을 교환 대상으로 하는 교환사채 787억원을 발행했다.
해당 채권은 2년 뒤인 지난해 9월 6일 이후 교환 대상의 주식 가격이 교환 가격(1만5050원)을 밑돌 경우 전부 또는 일부에 대해 조기상환을 청구할 수 있도록 하는 권한이 붙었다.
업계에서는 애경산업이 그룹내 유일한 캐시카우인 만큼 매각을 통해 유동성 위기의 급한 불을 끌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는다.
애경산업은 AK홀딩스와 특수관계인이 지분 63.38%(AK홀딩스 45.08%, 애경자산관리 18.05% 등)를 보유하고 있다.
애경그룹은 채형석 애경그룹 총괄부회장 외 특수관계인이 AK홀딩스(지주사)를 지배하고, 지주사가 각 계열사를 지배하는 구조다.
채 부회장 일가가 소유하고 있는 100% 개인 회사인 애경자산관리도 제주항공, AK플라자, 애경산업 주식을 보유하고 있다.

애경산업의 시가총액은 4300억원대로, 매각 대상 지분 가치는 2600억원 정도다.
여기에 경영권 프리미엄과 자산가치 등을 더하면 매각가는 이보다 훨씬 더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K뷰티가 최근 호황기를 맞으면서 애경산업의 지분 가치는 고평가가 가능하다.
지난해 K뷰티 수출 규모는 전년대비 20%가량 폭증한 가운데 올해 성장세가 더욱 가파를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자본시장업계 관계자는 "뷰티 부문은 사모펀드(PEF)나 펀드들이 지난해부터 가장 좋아하고 관심 있게 지켜보는 있는 부분"이라며 "뷰티업계 행사에 직원들을 적극적으로 업계 정보를 확보할 정도"라고 말했다.

다만 애경산업은 K뷰티의 수혜에서 벗어났다는 점에서 기업가치의 발목을 잡을수 있다.
최근 K뷰티는 미국을 중심으로 열풍이 불었는데, 애경산업은 중국 시장에 집중하면서다.
중국 시장은 경기 침체와 궈차오(자국소비 성향)로 인해 국내 화장품 회사들이 고전 중이다.
이 때문에 지난해 애경산업은 매출액 6790억원, 영업이익 468억원을 기록했다.
매출액은 소폭 늘었지만, 영업이익은 20% 넘게 꺾였다.
애경산업 측은 "신규 국가 진출로 2027년에는 비중국 매출을 40%까지 키울 것"이라며 "애경산업 내 화장품 매출도 현재 38%에서 50%까지 확대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민지 기자 ming@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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