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를 러시아라 부르지도 못해”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18명의 목숨을 앗아간 러시아의 미사일 공격에 대한 미국의 미지근한 반응을 강하게 성토했다.
다만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겨냥하는 대신 우크라이나 키이우에 주재하는 미국 대사를 표적으로 삼았다.
백악관 집무실에서의 정상회담 도중 심한 언쟁을 벌인 일로 트럼프의 분노를 산 젤렌스키는 이후 가급적 트럼프를 자극하지 않으려는 기색이 역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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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4일(현지시간) 러시아의 미사일 공격으로 어린이 9명을 포함한 민간인 18명이 숨진 직후 기자회견 도중 참담한 표정을 짓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
전날인 4일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 동남부 도시 크리비리흐에 미사일을 발사해 어린이 9명을 포함한 민간인 18명이 숨진 것과 관련해 미 대사관의 대응이 부적절하다는 취지에서다.
크리비리흐는 젤렌스키의 고향이기도 하다.
브리지트 브링크 주(駐)우크라이나 미국 대사는 미사일 공격 이후 SNS 글을 통해 “끔찍한 일”이라며 “이것이 바로 전쟁이 끝나야 하는 이유”라고 밝혔다.
희생자들의 명복을 비는 구절이 빠진 것도 그렇지만 미사일 공격의 주체가 러시아라는 사실조차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전쟁을 빨리 끝내야 한다’는 트럼프의 입장만 되풀이했다.
젤렌스키는 “안타깝게도 미국 대사관의 반응은 놀라울 정도로 실망스럽다”며 “이렇게 강한 나라가 어떻게 그토록 약한 반응을 보일 수 있느냐”고 지적했다.
이어 브링크 대사를 겨냥해 “아이들을 살해한 미사일에 관해 말하며 심지어 ‘러시아 것’(Russian)이란 표현조차 쓰길 두려워했다”고 꼬집었다.
그는 “러시아가 미사일로 어린이들을 학살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침묵을 지키는 것은 잘못되고 위험한 일”이라며 “이는 모스크바의 범죄자들이 전쟁을 계속하고 외교를 무시하도록 부추길 뿐”이라고 강조했다.
비록 미국 대사의 언행을 문제삼긴 했으나 젤렌스키의 불만은 미 행정부, 즉 트럼프를 향한 것으로 풀이된다.
다만 외교적 참사로 끝난 트럼프와의 정상회담 이후 젤렌스키는 트럼프에 대한 직접적 비판을 철저히 삼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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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왼쪽)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2월28일 백악관에서 정상회담을 하는 도중 격한 언쟁을 벌이고 있다. AFP연합뉴스 |
이 자리에서 젤렌스키는 “살인자에게 우크라이나 영토를 양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살인자’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지칭한 것이다.
이에 푸틴과 종전 협상에 나선 트럼프는 젤렌스키 면전에서 “무례하다”고 쏘아붙였다.
젤렌스키가 노리는 것이 결국 미국 등 서방과 러시아 간의 제3차 세계대전 아니냐고 다그친 트럼프는 “우크라이나가 종전 협상에 동의하지 않으면 미국은 (중재에서) 손을 뗄 것”이라고 위협했다.
젤렌스키가 당황하자 트럼프는 “당신은 아직 평화를 위한 준비가 안 돼 있다”며 “준비가 되면 다시 오라”는 말로 정상회담 결렬을 선언했다.
젤렌스키는 남은 일정을 모두 취소한 채 일찌감치 백악관을 떠나야 했다.
트럼프가 젤렌스키를 내쫓은 것이나 다름없다.
이후 미국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 원조를 중단하는 등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결국 젤렌스키는 트럼프에게 서한을 보내 앞서 백악관에서 벌어진 일에 관해 정중히 사과했다.
김태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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