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제 폭력에 시달리다가 집에 불을 질러 남자친구를 숨지게 한 혐의로 1심에서 중형을 선고받은 40대 여성이 항소심에서 감형받았다.

9일 광주고법 전주재판부 제1형사부(양진수 부장판사)는 현주건조물방화치사 혐의로 기소된 A씨(43)의 항소심 선고 공판에서 징역 12년을 선고한 원심을 깨고 징역 10년을 선고했다.
A씨는 지난해 5월11일 군산시 한 주택에 불을 질러 술에 취해 잠든 남자친구 B씨를 살해한 혐의로 기소됐다.
그는 자신이 지른 불이 주택 전체로 번진 이후에도 현관을 나와 그 모습을 지켜봤다.
A씨는 이를 의아하게 여긴 수사관의 물음에 "불이 꺼지면 안 되니까…만약 그 불이 꺼졌다면 제가 죽었다"라고 진술했다.
조사 결과, 숨진 B씨는 2023년 교제 폭력으로 기소돼 징역 1년의 실형을 받았다.
하지만 출소 이후에도 A씨에게 주먹을 휘두른 것으로 드러났다.
당시 판결문에 따르면 B씨는 "너 때문에 감옥 갔다"며 A씨의 목을 조르거나 발로 걷어차는 등 거듭 폭력을 가했다.
또 A씨의 목에 흉기를 갖다 대거나 몸을 담뱃불로 지져 큰 상처를 입히기도 했다.
항소심 재판부는 "현주건조물방화치사는 사형 또는 무기, 7년 이상의 징역에 처하는 매우 무거운 범죄"라면서 "이 범행으로 건물이 모두 탔고 피해자는 생명을 잃는 돌이킬 수 없는 피해가 발생했다"고 지적했다.
이어 "피고인은 장기간 교제 폭력으로 무기력감과 분노를 느낀 상태였지만, 피해자가 깨어나면 같이 불을 끄려고 했다는 진술 등으로 미뤄 확정적 살해 의도로 범행에 이르렀다기보다는 미필적 고의를 갖고 있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며 "이러한 사정을 모두 고려하면 원심의 형은 너무 무거워 부당하다고 판단된다"고 판시했다.
전국 여성단체 등으로 구성된 이 사건 공동대책위원회는 선고 직후 전주지법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교제 폭력 피해자에게 법적 책임을 묻는 이번 판결은 대한민국 사법시스템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낸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단체들은 A씨를 '피고인'이 아닌 '생존자'로 지칭하고 "이번 사법부의 판결은 교제 폭력 피해자가 죽어야만 비로소 피해 사실을 인정받을 수 있다는 처참한 현실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례"라며 "지금 이 순간에도 남성 파트너에 의해 폭행당하거나 살해당하는 여성들을 보호하기 위한 대책 마련이 절실하다"고 촉구했다.
윤슬기 기자 seul97@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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