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사는 "얼마 전 선배의 장례식에 다녀왔다"고 했다.
초년 검사 시절 지청장으로 모셨던 가장 존경하는 선배가 지병으로 일찍 세상을 등졌다는 것이다.
묻지도 않았는데, 검사는 그 선배와의 일화(逸話)를 꺼냈다.
검사가 서울지검 특수부에 부임한 지 얼마 안된 날이었다.
지청 시절 동료들과 함께 서울고검 검사로 근무하던 선배를 찾아갔다.
선배는 그해 검찰 인사에서 검사장으로 승진하지 못하고 이틀 뒤면 퇴임하게 돼 있었다.
검사실 문을 열자마자 눈이 마주쳤는데, 선배는 "지금 누굴 조사 중이니 좀 기다려 달라"고 했다.
한참을 기다려 조사를 끝낸 선배에게 검사가 "낼모레 퇴임하실 분이 무슨 조사입니까"하고 물었다.
그랬더니 "아닐세. 내가 수사하던 사건이니 끝까지 마무리 짓고 나갈 참이네" 하더라는 것이다.
선배는 퇴임하는 날 검사로서 마지막이었을 사건 공소장에 서명한 뒤 검찰을 떠났다고 한다.
선배와의 옛일을 돌이키며 "내게는 공직자의 자세와 책임감을 일깨워준 분"이라고 안타까워하던 검사의 목소리가 아직 귓가에 남아 있다.
이미 짐작하셨겠지만, 그 검사는 윤석열 검사다.
윤 검사와 나는 김대중 정부 초기 서울지검 특수3부 말석 검사와 검찰 출입 기자로 만났다.
별 특별할 것도 없는 아파트 관리비 비리 사안에서 현직 치안감의 뒷돈 수수를 밝혀내 기소한 윤 검사는 '일 잘하는 검사'로 평판이 좋았다.
윤 검사 상관 부장검사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울 정도였다.
친구따라 잠시 대형로펌 변호사로 변신했다가, 검찰청 조사실 자장면 냄새에 이끌려 검찰로 원대복귀한 그는 대선자금 사건, 현대차 사건에서 실력을 발휘하며 승승장구했다.
박근혜 정권 출범 초기 인생 전환점이 된 국정원 댓글 사건 수사를 할 때 그는 내게 말했다.
"국가 안보를 위해 사용돼야 할 자원을 사적으로 전용한 것이 본질" "검찰은 진상을 밝히고 박 대통령은 유감을 표명해야 하지 않겠나"… 청와대의 방해로 수사가 벽에 부닥치고, 법무부 간부에게 "거 참, 부드럽게 좀 가자는데 말이 안 통하네"라는 면박을 당하고, 국회 법사위 국정감사에 증인으로 채택되는 와중에도 그는 말했다.
"누군가 나에게 병원에 입원하고 국감에 나가지 말라더라. 그러면 나를 믿고 의지하는 후배들은 어쩌란 말이냐. 공직자로서 그럴 수 없다.
" 그렇게 나간 국감에서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는 말이 나왔다.
그 순간 '검사 윤석열'은 일찍이 세상을 떠난 존경하는 선배가 몸소 보여준 공직자의 자세와 책임을 떠올렸는지도 모른다.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 전날, 양재천을 산책하다가 바람에 떨어진 벚꽃을 보았다.
불현듯 오래전 하고픈 말 삼키며 떠나간 어느 공직자의 퇴직의 변(辯)이 떠올랐다.
'자고 나니 벚꽃이 졌더라. 지난 일을 얘기하는 것은 사나이답지 못하다.
벚꽃처럼 사라지겠다.
'
'대통령 윤석열'은 민주주의의 적(敵)이 되었다.
민주적으로 선출된 대통령에게 "국민의 신임을 배반했다"는 낙인은 사형보다 더한 형벌일 것이다.
'인간 윤석열'의 화양연화 시절은 언제였을까. '별의 순간' 운운하는 선거공학자들을 만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비록 부질없을지라도 검사 윤석열과의 옛일을 옮겨 적는 것은, 그가 이제라도 공직의 무게를 두려워하며 후배들을 살뜰히 챙기던 시절을 돌아봤으면 하는 작은 바람 때문이다.
자고 나니, 벚꽃이 졌다.
이명진 사회부장 mjlee7@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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